일본책 - 「일본책, 김정일의 요리인 : (하)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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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편 ※ 마지막편 ■ 金正日(김정일)은 차남 김정운을 좋아해 기분파인 金正日(김정일)은 파티나 도박 경품으로 日製(일제) 카메라, 온수청정변기(비데), 피아노, 소니 비디오 같은 高價(고가)의 물건들을 내놓았다. 기쁨조를 불러서 연회를 벌이다가 갑자기 옷을벗고 춤을 추라고 한 적도 있다. 信川(신천)초대소의 연회장에서 기쁨조 5명이 디스코를 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金正日이 『옷을 벗어』라고 말했다. 기쁨조가 옷을 벗었더니 이번에는 속옷도 다 벗으라고 말했다. 할 수 없이 기쁨조가 全裸(전라)로 춤을 계속 추고 있는데, 이번에는 黨(당) 간부들에게 『너희들도 함께 춤을 춰』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쁨조를) 만지면 안 돼. 만지면 도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金正日은 간부들에게도 『기쁨조를 만지지 말라』고 하고 있는 만큼, 기쁨조 여성들이 밤시중까지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후지모토는 전했다. 실제로 그들이 밤시중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후지모토는 金正日의 가족과도 거리낌 없이 지냈다. 金正日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들을 낳은 부인은 成惠琳(성혜림)과 高英姬(고영희) 두 사람이다. 高英姬(고영희) 부인은 평양의 金正日 관저에서 살면서 金正日이 지방으로이동할 때는 반드시 동행하는 실질적인 본처이다.사람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高英姬(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 출신으로 金正日이 일본 제일의 미인이라고 칭찬한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를 닮았다. 金正日은 그녀를 아주 신뢰하고 있어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가거나 일본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다 오기도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유럽 여행을 갔다가 모스크바에 잠시 들른 高英姬(고영희)와 아이들의 기내 도시락을 위하여 모스크바까지 출장 간일도 있다. 金正日의 전용 비행기는 그의 생일이 2월16일이라 하여 「216호」로 불린다. 전용기뿐 아니라 노동당 간부의 자동차 번호는 모두 「2-16」으로 시작한다. 북한에서 「216」은 신성한 숫자이다. 후지모토는 이 책에서 金正日의 후계자로 高英姬(고영희) 부인의 차남 김정운을 지목하여 주목을 받았다. 成蕙琳(성혜림)의 장남 金正男(김정남)이 2001년 5월 일본 밀입국에 실패한 이래 북한에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高英姬(고영희)의 큰아들 金正哲(김정철)이 유력하다는 설도 있지만, 金正日은 金正哲(김정철)에 대해 『저놈은 안 돼. 여자 같아』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金正日이 마음에 들어 하는 아들은 체형까지 자신을꼭 닮은 차남 정운이다. 다만 차남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대놓고 정철, 정운 형제는 「왕자」,高英姬(고영희)의 외동딸 여정은 「공주」라고 불렀다. 金正日에 대한 존칭은 「장군님」. 왕자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으며, 후지모토는 그들에게 당구를 가르치기도 했다. ● 1990년대 초반 金正日 落馬說(낙마설)은 사실 金正日 초대소(별장)에서의 생활은 후지모토에게꿈같은 나날이었다. 金正日과 제트스키 시합을 해서 이기기도 하고, 金正日이 선물한 백마를 타고승마를 하고, 金正日이 선물한 권총으로 하루에 수백 발씩 사격 연습을 하고, 160kg이나 되는 커다란 물개를 사냥해서 金正日의 칭찬을 들었다는경험담은 거의 무용담 수준이다. 자신이 그토록 金正日의 총애를 받은 것에 대해 후지모토는 金正日이 좋아하는 오락을 자신이 맞상대할 정도로 잘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金正日의 호화별장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다. 후지모토가 金正日과 함께 주로 다녔던 초대소는 백두산, 함흥, 영흥, 원산, 信川(신천), 昌城(창성), 묘향산, 평양, 대동강, 江東(강동) 등 열 군데이다. 널찍한 잔디밭에 연못과 분수가 펼쳐져 있고 승마장이나 볼링장,당구장, 롤러 스케이트장, 사격장 같은 오락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초대소 안은 너무 넓어서 이동을 위해 각 건물 앞마다 일본 최고급 승용차 「마쓰다 RX7」이 놓여 있다. 창성초대소의 경우 옥외 주차장 바닥이 반짝이는 대리석일 정도로 초호화판이다. 초대소 안 金正日이 묵는 건물에는 모두 위성 안테나가 달려 있어서 CNN, NHK, WOWOW를 비롯해 全(전)세계 위성방송을 마음대로 보았다. 후지모토는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원산초대소를 꼽았다. 그곳에서 겨울 바다오리 사냥을 즐기기도 했는데, 1992년 11월2일부터 12월12일까지 일행이 잡은 오리가 무려 1만914마리, 무게로 치면 19t507kg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잡은 오리를구워 먹었다. 1990년대 초반 金正日이 말에서 떨어져 한때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說(설)이 나돌았었다. 이 책은그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金正日은 승마를 매우 좋아했는데, 대개 기마대가 선두에 달리고, 그 뒤를 金正日, 부인 高英姬(고영희), 후지모토와 「왕자들」이 뒤따랐다. 1992년 어느 날신천초대소에서 金正日은 말 앞발이 미끄러지면서 낙마, 머리와 어깨를 강하게 부딪쳐 의식불명이되었다. 그는 그날 밤에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御用(어용)열차로 옮겨져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나중에 金正日은 매일 밤 통증완화 주사를 맞았는데, 주사액에 소량 들어간 마약에 혼자서 중독되기싫다고 하여 측근들 5,6명을 불러 함께 주사를 맞았다.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북한 특권층의 생활을 만끽하던 후지모토는 金正日 곁에 머물면서 북한의어두운 모습과 金正日의 또 다른 모습을 종종 접하게 되었다. 1994년 7월 金日成(김일성) 死後(사후) 최고 권력자가 된 金正日이 한동안 고뇌에 휩싸였었다고 한다. 당시 金正日은 고민이 많은 듯자기 방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어떤때는 권총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을 부인이 보고 깜짝 놀라 달랜 적도 있다. 『우리나라가 核(핵)무기 갖는 것에 반대하나?』 1989년에는 核(핵)무기 시설에 대해서 후지모토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후지모토, 우리나라가 核(핵)무기를 갖는 것에 반대하나』 후지모토가 『세계 유일의 被爆國(피폭국)의 국민으로 반대한다』고 답변하자, 金正日은 『核(핵)무기를 갖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쳐들어온다』고 말했다. 核(핵)무기와 관련하여 후지모토는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1995년 12월30일 중앙당선전부장인 김기남이 金正日에게 와서는 『核(핵)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가 빠지고 머리가 빠지는 등 被爆者(피폭자)가 속출하고 있다. 매우 비참한 상황이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4년쯤부터는 미국 정찰위성에 발각되지 않기위하여 金正日이 초대소로 이동할 때는 심야나 이른 아침을 이용했다. 그것도 눈가림을 위해 벤츠 열 대가 동시에 이동했다. 하지만 金正日의 자동차는 항상 선두에 서서 달렸다. 출발 시간도 갑자기 통보되었다. 『10분 후 집합!』이라는 식으로 느닷없이 통보하고, 모든 사람이 모이면 그때서야 행선지를 알려 줬다. 후지모토는 비밀스런 숙청에 대해서도 엿들었다. 1995년 12월30일 일곱 명의 장군들이 모여 있는자리에서 金正日은 『그들을 쏘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예, 어제 쏘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죽은 사람들은 金正日 반대파인 것 같은데, 한꺼번에 24~25명이 사살되었다고 했다. ● 불쑥 다가오는 공포감 후지모토가 북한 사회에 진저리를 치고 脫北(탈북)을 결심한 것은 특권층의 달콤한 생활 속에서도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던 공포감과 답답함이 실제상황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식품 구입을 위해 일본에 들어왔던 그는 동행한 북한인의출입국 관리법 위반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시청에 체포되고 만다. 『다시는 북한에 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가까스로 석방된 그는 오키나와 등지에서 어렵게일자리를 얻어 살다가 1998년 6월 1년9개월 만에다시 북한에 들어갔다. 金正日은 이전과 다름없이 그를 대해 주었지만, 후지모토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북한의 체제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후지모토는 북한에 있을 때뿐 아니라 생선을 사기위해 일본에 가 있을 때에도 늘 감시당했다. 묵고 있는 호텔 앞에는 늘 같은 벤츠가 서 있다가 후지모토가 택시를 타고 나가면 그 택시를 뒤쫓아 왔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 벤츠의 뒤를 또다시 일본경시청의 차가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후지모토가 결정적으로 북한 당국의 의심을 사게된 것은 중국에서였다. 1998년 11월 일본제 생선통조림을 사기 위해 北京(북경)을 가게 되었는데,호텔방에 혼자 남아 있는 사이 일본 경시청 관계자에게 전화를 건 것이 도청당한 것이다. 3개월 후 그는 일본에서 무언가 임무를 받았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추궁을 당했다.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신분증 일체를 몰수당했다. 그리고 1년2개월 동안 아파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軟禁(연금)당하는 동안 그는 고문의 악몽에 시달리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반 후인 2000년 4월 후지모토는 드디어 金正日의 부름을 받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마음은이미 이전 같지 않았다. 2001년 봄 그는 성게알덮밥이 소개된 일본 비디오를 金正日에게 보여 주고『홋카이도에 가서 성게알을 사 와서 똑같이 만들어 드리겠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金正日에게 1만5000달러의 旅費(여비)와 식료품값을 받아 일본으로 내뺐다. 그리고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들은모든 것을 밝힌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으로 <(자신이) 일본의어느 가게에서 일을 한다면 장군님이 찾아내서 반드시 죽이라고 할 텐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을하지 않고는 먹고 살수가 없다.>고 적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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