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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오가며 고향을 찾다 - 김승철
동지회 14 7717 2005-12-13 15:08:39
한겨울의 따스한 햇볕이 방 아랫목을 비추었다. 햇볕의 끝자락이 닿은 방 아랫목에는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다 담은 그윽하고도 절절한 아버님의 눈빛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을 그리셨던 아버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시는 그 순간에도 말없는 눈빛으로 어릴적부터 수없이 들었던 말씀을 다시금 되뇌이고 계셨다.

"이담에 통일이 되면 아버지 고향에 꼭 가보거라"

꼭 잡은 아버님의 손은 식어갔지만 그후 나에게서 통일과 아버님 고향 찾기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러시아의 매섭고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에서 고향을 생각할 때면 북한의 고향과 함께 '남조선'의 아버님 고향도 함께 그리워했다. '남조선 방송'을 들으면서도 혹 아버님의 고향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나 귀를 귀울였다.

젊음의 열정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벌목장에서 탈출하여 중앙아시아를 떠돌다 '남조선'으로 가는 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 이제 정말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간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하늘 어딘가에서 당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나를 지켜보실 아버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가보고 싶으셨던 고향으로 제가 갑니다. 운명하시기 전 병문안을 온 고향친구들에게 '고향에 가고싶다'며 눈물 흘리시던 그 한을 제가 조금이나마 대신 풀어드리렵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찾은 아버님의 고향은 나에게 낯설기만 했다. 아버님의 먼 친척분들이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님을 기억했고 아버님께서 살으셨던 고향집 터에는 한포기 붉은 홍초만이 외로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아버님의 고향을 찾았건만 나는 아버님께서 그토록 그리셨던 귀향의 한을 누구에게도 전달 할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났지만 나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님처럼 귀향을 꿈꾼다.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흥분과 함께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내 고향으로 귀향하리라는 꿈을 꾸어 왔었다. 돈을 많이 벌어 북의 내 고향에 돌아가는 꿈도 꾸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통일에도 이바지해서 명예도 얻어 귀향하는 꿈도 꾸었다.

이제 나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열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다. 아버님께서 저녁 늦게 퇴근하시면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형제를 깨워 "아버지 고향이 어데냐"고 물으시던 그 열망처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처럼 내 고향에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다진다.

하지만 나의 고향 찾기는 지난해부터 새롭게 바뀌었다. 아버님께서 바라셨던 고향찾기는 훌륭하게 장성한 자식들을 앞세우고 귀향하는 것이었다면 나 역시 초기에는 돈과 명예와 같은 나만의 '성공한 귀향'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내가 바랬던 '성공한 귀향'이 돈이나 명예만으로는 부족함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고향찾기는 통일만이 가능하다. 통일이 됐을 때 고향의 혈육이나 친구들 그리고 모든 고향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만을 위한 돈이나 명예보다 통일로 인해 필요하게 될 귀중한 가치들이다. 분단 반세기만에 이념과 문화, 관습과 의식 등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진 남과 북의 통일로 피해를 볼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한에 와서 체험한 10년의 삶은 반세기만에 달라진 남과 북의 문화와 이념의 충돌이었고 나는 그 충돌의 '전사'였다. 우리의 통일이 분명 자유와 민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를 지향함은 자명할진데 내 고향은 그것에 너무나도 취약하다.

체험과 주관으로만 알고 있던 북한을 지성으로 알게 된 지금 나는 대학원에서 배움으로 또다른 고향찾기를 시도한다. 나의 의식과 가치관이 10여년전과 지금에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지금의 북한의 진실과 남한의 현실과의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바로 바로 나의 진정한 고향찾기가 아닐까 하는 심정에서 말이다.

2004년 2월 김승철 북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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