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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의 가장 어려운 벽을 넘어(수기)
Korea, Republic o 민복 0 678 2012-02-24 07:56:03

탈북, 그것은 체제의 탈출만이 아니라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다. 남한의 젊은이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목숨 걸고 왔지만 당신들은 이 땅에서 공짜로 태어났음을,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장진성

 

북한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아득해질 때까지 친구와 나는 서로를 부축한 채 뛰고 또 뛰었다. 그때는 뒤의 총구들만 공포가 아니었다. 눈앞의 어디에선가 중국 공안들이 불쑥 나타날 수도 있어 우리는 그 와중에서도 너는 우측, 나는 좌측 이렇게 시야를 분담하기도 했다. 그 정해진 시선으로부터 괜찮아! 괜찮아! 하는 소리침이 들려올 때마다 서로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북한과 달리 나무로 꽉 찬 산기슭에 엎어질 때까지 중국 쪽 지역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때야 우리는 북한쪽을 돌아볼 수도 있었다, 따라오는 북한병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살았다고 소리라도 막 지르고 싶었지만 쫓겨 온 남의 나라가 쫓아오는 자기 나라보다 더 은혜롭고 감사함에 억이 꺽 꺽 막혔다. 그래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떠나온 북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친구는 돌 하나를 쥐고 힘껏 던지기까지 했다.

이어 친구는 나무가 울창한 산의 깊은 내면에서 안정감을 얻고 싶었는지 두 팔을 기껏 벌리고 大자로 눈 위에 덥석 드러누우며 말했다.

“우리 이 산에서 며칠 푹 쉬자. 난 이젠 이 산에서 얼어 죽어도 좋아”

나도 그러고만 싶었다. 수령제일주의도, 집체주의도, 국가보위부도 없는 이 땅에서의 죽음이라면 그야말로 해방만세였다. 그러나 목숨 걸고 온 길이어서 이제부터의 우리 자신이 더 소중했고. 그래서 이제부터 정말 탈출이라는 생각이 나를 이내 일으켜 세웠다.

“아니야, 우리 이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돼, 북한에서 중국 경비대에 연락할거고, 그럼 우린 여기서 어물거리다간 잡혀, 그러니 조금만 더 뛰자, 시내로 들어가자”

“어떻게? 시내가 어딘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의 시야로 저쯤에 마을이 보였다. 처음엔 그 인적이 당황스러웠지만 총구 앞에서도 탈출했다는 자신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꼼짝 말고 여기 숨어있어, 내가 만약 마을에서 붙잡히면 소리칠게, 그러면 즉시 산 속 깊이 뛰어!”

나는 지금의 상황에선 이 선택밖에 없다고 설득했고 그래도 계속되는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며 마을로 내려갔다.

처음 만난 사람은 아줌마였는데 “말 좀 물어봅시다!”하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무작정 어느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가 중국인이고 그가 가리킨 곳이 조선족이 사는 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북한 집들과 별반 차이 없는 기와 얹은 그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흰 개가 컹컹 짖어댔다. 그 소리에 나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친구도 뒷산에서 틀림없이 듣고 있으리라. 이 생각이 나를 금시 안심시켰다.

“누구요?”

40대 중반의 남성이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중국 현지인을 기만하거나 설득하기엔 시간이 너무도 촉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700달러를 꺼내 보였다.

집주인은 돈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신변 때문인지 맨 발로 달려 나왔다.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황소 같았다.

연길시내까지만 데려달라는 내 말에는 안중에도 없이 장롱을 열어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

“빨리 입으소”

“괜찮아요, 이 옷은 일본 옷이에요, 관광객처럼 보이려면”

“안돼요, 여기사람 같아야지 공안에서 단속할 때 주목받을 수 있소, 잔말 말고 이 옷을 입으소.”

“잠시만요, 저기 친구 하나가 더 있어요.”

“엥? 그럼 왜 그러고 섰어?, 빨리 델꾸 오소.”

잠시 후 내가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집주인은 이미 나들이차림을 끝내고 난 뒤였다.

십분 후면 버스가 마을 앞에 도착할 시간이라며 서두르는 과정에 집주인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우선 말을 일체 하지 마소. 혹시 공안이 단속 할 때 말 시켜도 아픈 척 하고, 내가 옆에서 대신 말하겠으니깐. 만약 단속 당해도 중국말 모른 척해요, 여긴 중국말 모르는 조선족들도 가끔 있으니깐? 그리고 주머니에 돈이 더 있으면 나한데 다 맡기소, 혹시 붙잡히면 내가 그 돈으로 공안과 사업해볼테니. 얼마나 있소?”

나는 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십분 후에 버스가 정확히 도착했다.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도 불가능한 버스통행 정상화가 중국의 이 외진 산골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우리는 몸을 실었다. 친구와 나는 되도록 집주인과 가까운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버스 문이 쾅 닫히자 조롱박에 갇힌 듯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어 눈이 저절로 감겨졌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목청도 크고 말도 참 많구나 하는 새로운 발견에 안정감이 회복되었다. 주변을 힐끔힐끔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북한 사람들에 비하면 중국의 시골 사람들은 선진국민의 자유로움과 풍요가 물씬 풍겼다. 그들의 옷차림과 얼굴빛에서 북한 중산층을 능가하는 부유함이 엿보였다. 친구와 나는 어느새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버스 차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지나치는 두만강과 그 너머 북한 땅을 새삼스레 바라보니 기분이 묘했다. 한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저 건너편에서 이쪽을 여념 없이 쳐다봤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상황이 돼 버린 것이 왠지 잘 실감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벗어진 북한의 민둥산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그 헐벗은 산들이 거기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가긍한 처지인 것만 같아 눈이 아렸다. 중국인들의 눈빛들도 하나 같이 어두웠다. 심지어는 전율을 느끼는 듯 치를 떠는 모습까지 보고 있자니 북한을 저 지경으로 만든 김정일 정권이 더 가증스러웠다.

그렇게 30분쯤 가고 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무심결에 버스기사가 앉아있는 앞 쪽을 보니 얼룩무늬의 차단물이 보였다. 그 가운데서 손을 든 무장한 군인들도 보였다. 순간 그들이 우리를 뒤쫓아 왔고 그래서 차도 멈춰 세우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이런 곳으로 안내한 집주인의 무책임한 처사에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공안들이 총구를 들이대면 어떻게 차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를 재빨리 흩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척했다. 그 전에 친구의 감은 두 눈을 잠깐 살폈는데 눈썹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약간 코를 골았다. 차가 멈춰서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군화발이 올라오는 둔탁한 소리에서 총의 무게도 느껴졌다. 버스 안의 소음들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는 큰 목청의 중국말이 울렸는데 마치 우리를 향해 명령하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군화발소리,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눈을 뜨면 지금 어떤 상황일까? 군인이 우리를 노려보는 것일까? 머리카락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을 세고 있는데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떠보니 정말 차가 가고 있었다. 돌아보니 군인들이 뒤 트럭을 세우기 위해 높이 쳐든 흰 장갑 낀 손이 보였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 눈 감고 있는 친구를 흔들었는데 그는 눈 감은 채로 히쭉 웃고 있었다. 훗날 집주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공안들은 일일이 검열하기 바쁘니깐 버스에 올라와 한번 쭉 흩어보오, 탈북자 색출이 목적이니깐, 탈북자 얼굴피부를 보면 우리랑 틀리오, 못 먹고 여기 와서도 오랜 방랑생활 때문인지 버짐이 있고 새까맣고 때에 그을렸거든, 그런데 자네들 피부는 평양사람들이어선지 우리랑 비슷해서 그냥 넘어간 것 같소,”

그렇게 피 말리는 두 개의 검문초소를 지나고서야 우리가 탄 버스는 앞이 확 트인 연길시내로 들어섰다. 두만강을 넘을 때의 공포보다 바로미터의 더 큰 긴장들을 체험한 나의 온 몸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시원해진 것 같았다. 이제는 공안도 찾기 힘든 시내로 들어섰다! 이제는 13억 중국인의 품에 몸을 숨길 수 있다! 이런 격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서 나는 친구의 살을 마구 꼬집었다. 그도 같은 심정인지 차창 밖을 내다보는 자신 넘친 시선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여유를 과시하기나 하려는 듯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그것은 “연변은 세계로! 세계는 연변으로!”라는 한글 플랜카드였다.

그 글을 보니 이 외국 땅에 한글이 버젓이 걸려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중국의 이 작은 마을도 세계를 지향하는데!” 하는 부러움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자본주의 바람을 막기 위해 모기장을 치자! 쇠살창을 치자!”는 북한 구호에 익숙했던 나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 플랜카드가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더불어 폐쇄와 야만으로부터 탈출한 우리의 용단이 얼마나 천만번 옳았는가를 다시금 자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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