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자하혁명 조직과 북한, '진보의 그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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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지하혁명 조직과 북한, '진보의 그늘'
1990~2000년대 NL계열 지하당 운동의 역사와 특징
1. 1980년대 자생 주사파의 탄생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자생 주사파는 기존 1960~1970년대 구 좌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출발했다. 물론 운동노선에서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표방하고 있지만 조직이나 활동에서 인과 관계는 없다고 볼수있다.
1980년대 주사파는 독자적으로 주체사상을 수용해 운동권 내부에 확산시겼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종북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생 주사파들은 1980년대 이후 종북 지하당을 건설해 지하혁명활동을 진행한다.
자생 주사파가 출현한 1980년대 중반 한국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1970년 초반 시작한 중화학공업화 전략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고 대외적으로 산업 호황에 힘 입어 경제 성장률이 북한을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전두환 군부정권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정부에 저항적인 분위기가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1980년대 자생 주사파의 원조는 서울 대학교 법과대학 출신 김영환이다. 그는 1985년부터 북한의 '구구의 소리' 방송과 도서관에 있던 주체사상 비판 서적들을 통해 주체사상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결과 한국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혁명을 위해서는 NL(민족해방)이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김영환은 먼저 자신의 주변동료 (서울대 고전연구회 82~83학번 멤버)들에게 주체사상과 NL이론을 전한 다음 서울대 운동권들에게 본격적으로 보급했다.
그는 또한 '강철서신', '기수'(일명 해방서신) 시리즈 등 지하 팜플렛을 수도권 대학들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팜플렛은 "한국사회는 식민지이기 때문에 반미투젱을 전면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운동가에게 필요한 자세로 '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의 품성론을 제기했다.
또한 당시 마르크스- 레닌주의 원칙에 의지해 소규모 패밀리 형태에 머물던 운동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제기해 학생운동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겼다.
2. 자생 주사파 세력의 확산
1986년 3월 서울대의 한 강의실에 운동권 1백여 명의 집결했다.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국내 최초 NL노선의 학생운동조직인 (구국학생연맹)을 조직했다. 이들이 내건 NL 노선의 요체는 반미 자주화 노선이었다. 한국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1차적으로 미국을 축출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은 반미운동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대중적 방도로 제시된다. 이들이 내건 반미투쟁 노선은 서울대를 넘어 서울지역 대학가에 큰 방향을 일으켰다. 고려대, 연세대 등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대학에서 구학련과 연계해 사업하자는 제안이 이어졌다.
그 여파는 1986년 10월의 건대 사태로 이어졌다. ( 구학련) 은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정부가 강경진압에 나서면서 1,288명이 구속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건대사태 이후 주사파의 활동력은 더욱 강해졌다, 1987년을 넘어서면서 전국적으로 NL 계열의 총학생회가 등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되고 학생운동에서 주사파들이 급속도로 주류를 형성하게 됐다.
구학련이 붕괴된 이후 <전대협>의 초기는 반미청년회가 주도한다. 반미청년회는 고대 출신 조혁이 총책으로 있던 주사파 학생운동 그룹이다. 3기 의장 (임종석)부터는 반미청년회가 공안 당국에 적발돼 조직이 붕괴되면서 뚜렷한 주도세력이 부재했다. 그러나 <전대협> 중앙위 주도로 임수경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전개했다. 일부에서는 당시 <전대협>중앙위의 평양축전 참가 및 임수경 밀입북 결정이 조직적 지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나온 좌경적 결정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다음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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