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는 없었다, 천재의 열정만 있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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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뒤인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벨트만과 토프트의 소감도 다르지 않았다. 시상식장에 선 토프트는 “양자역학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과학 분야에서 언제나 한국인 첫 노벨상 수상자 후보로 꼽혔던 고(故) 이휘소 박사(1935~77)에게 박사 논문을 지도 받았던 저자(고려대 교수)가 이 박사의 가족·친구·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해서 한 권의 전기로 엮었다. 지난 4월 이 박사는 역사상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들을 모신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19번째로 헌정됐다. 당대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이휘소 박사는 미국 페르미 연구소 연구심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42세에 요절했다. 이 때문에 1974년부터 전산화한 고에너지 물리학 데이터 베이스에는 그의 논문이 60여 편 밖에 수록돼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전체 인용 횟수는 1만 회 이상에 이른다. 학계에 미친 영향을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가 논문 인용 횟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노벨상 수상자들의 소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박사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재직 시절, 저녁식사나 술자리 같은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으로 연구실에만 붙어있었다. 이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선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불과 26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 조교수에 임용된 뒤 2년 뒤에 부교수, 다시 2년 뒤에 정교수로 ‘고속 승진’한 배경에는 천재성 못지 않게 그의 땀방울이 배어있었다. 또 고국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는 항상 ‘존경’ ‘감사’ ‘그리움’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는 구절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죽음에는 항상 ‘의문사’와 ‘음모론’ 같은 말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과학자인 저자는 “소설과 사실은 마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의 아이가 과학자를 꿈꾸고 있다면, 반드시 서재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읽혀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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