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老兵이 겪은 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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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老兵이 겪은 6.25.
Created on
06/24/2012
어느 老兵이 겪은 6.25
逢 南 韓泰格 (www.TedHan.com)
오늘은 6.25 동란(動亂)이 발발(勃發)한 지 62주년 되는 날이다. 이를 상기(想起)하기 위해 23일(토)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뉴욕지회 (회장 尹永濟)주최로 뉴욕시와 인근지역에 거주하고 있거나, 아직도 Veteran’s Hospital에 입원 또는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미군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한미 6.25 참전용사 합동 오찬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한인거주 지역 선출 직 시, 주 의회의원들과 뉴욕주재총영사가 참석하였다. 한편, 이명박대통령은 한국전(戰)참전 UN 16개국 가운데 한국대통령으로서 1953년 휴전이래 미(未)방문국이었던, 남미 꼴롬비아(Colombia)를 방문하여 60 여 년 전 낯선 나라로 파병되어 목숨 바쳐 Communism(공산주의)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守護)하여 준 꼴롬비아 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동시에 양국 국교(國交)수립 5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체류 중이다.
현대 한국사(史)중 최대 민족의 비극(悲劇)인 6.25 62주년을 맞아 현재 맨해턴 미드타운에 거주하고 계시며 전쟁 초기 북괴군(北傀軍)으로 강제 징집되어 인민군 “전사(戰士)”로 참전하였다가 대동강전투에서 국군에 투항, 귀순한 노병(老兵)한 분(81세)이 필자에게 보내 주신 글을 당신의 승낙을 득하여 전재(轉載)하기로 한다. (필자 주-본인의 요청에 따라, 함자는 밝히지 않으며, 구어를 맞춤법에 따라 정정하였음.)
칼럼니스트 韓 泰格氏에게, New York의 日刊紙上에 揭載되는 선생의 글에, 크게 共感을 가지고 읽곤 하는 愛讀者中 한 사람입니다. 여러 面으로 넓은 知識을 가지시고 글을 쓰시는 것으로 보여 혹시 參考가 될까 하여 개인적인 체험과 느낌을 적어 보내 드립니다. 본인은60餘 年 前 소위 6.25 戰爭 初期 本意 아니게 朝鮮 人民軍 第 99聯隊 제 3大隊 迫擊砲(82m/m)中隊에 配屬되어, U.N.軍의 北進 時에는 平壤 防衛 司令部 所屬 부대로 평양 東北方100里 가까운 大同江邊에 配置되어 약간의 交戰 後 北西 쪽으로 後退하다가 隊列에서 離脫하여 逃亡하기까지 길지 않은 동안이나마 人民軍 生活을 體驗하였던 사람입니다. 季節이 6月 下旬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今年에도 어김없이 가장 마음 아프게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6,25 動亂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6,25 전쟁 初期에 제가 보고 느낀 바를 中心으로 몇 줄 써 보고 저 합니다. 이제는 62년 前 이야기인 바 다 아는 대로 그 날은 日曜日이었다. 그 때 우리 家族은 서울市 城北區敦岩洞에 살고 있었다. 미아리 고개 밑이며 서울 市內에서 그 方向으로 運行하는 電車의 終点 附近에 位置한 동네이다. 이 ‘미아리 고개’는 바로 옆에 ‘아리랑 고개’가 위치하고, 더욱이 6,25 戰爭初期에 ‘北朝鮮 人民軍’의 서울 占領 部隊가 東斗川과 의정부를 거쳐 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市內(門안)로 처 들어온 아주 重要한 길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이 UN軍에 의해 수복될 때 數多한 南쪽 大韓民國의 人士들이 拉致되어 이 미아리 고개를 거처 北쪽으로 끌려간 연유로 더욱 널리 알려졌으니, 한때 슬픔의 노래로 많은 사람의 心琴을 울리며 불려졌던 ‘恨 많은 미아리 고개’ 창자가 끊어져 나가는 것같이 가슴이 쓰라리다는 ‘斷腸의 미아리 고개’란 歌謠도 이곳에 緣由한다. 이때 나는 19세(滿 18세)의 나이로 아직 어리다고도 할 나이였다. 나의 兄님이 親友 2인과 함께 同業으로 軍 部隊에 副食(반찬거리)을 納品하는 사업을 하였기에 나는 서울 근방에 駐屯하고 있는 여러 軍 部隊를 出入하였었다. 例를 들면 당시 水色에 있던 第1師團과 師團傘下 第11聯隊 第12聯隊, 泰陵의 陸軍 士官學校, 大方洞의 陸軍 病院과 醫務大隊 等等. 그 當時의 國內 狀況을 내가 보고 느낀 바에 따라 簡略히 적어 보면: (1) 남쪽 大韓民國은 1948年 5月 10日 Menon(印度人)을 團長으로 하는 UN 選擧 監示團의 監示下에 치러진 自由 選擧를 通하여 그 해 8월 15일 樹立 公布된 韓半島 內 唯一한 合法 政府 (北半部에서는 이러한 UN감시하의 자유 선거를 反對하고 이 UN감시단의 入北 조차 拒絶하였기에)로서 UN의 承認을 받은 政府인데, 38度線 北側의 侵攻을 받게 된 戰爭이 6,25 戰爭이다. (2) 그 당시 國內的으로는, 初代 大統領의 主導下에 樹立된 대한민국은 南韓의 半조각 單獨 政府라고 하며 어떻게든 北側과 合하여 統一된 하나의 政府를 이루어야 한다는 金 九 先生을 비롯한 ‘南北 協商 派’와 對立 角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北朝鮮 內에도 1945年 8月15日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나고 우리 韓半島는 北偉 38度線으로 分割 됨과 同時에 北半部에 進駐한 蘇聯軍과 함께 金日成(當時 33歲이며 本名은 金聖柱라고 함)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와서 朝鮮 共産黨의 이름으로 세운 정부가 存在하게 되었다. 여기에 反對하는 北朝鮮 百性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曺晩植先生이라는 분이 主導하는 朝鮮 民主黨이 있었는데 6,25 戰爭이 나기 前에 北 朝鮮 政府에 依해 監禁된 狀態로서 外部와의 接觸이나 一切의 活動이 禁止된 狀態이었다. (3) 한편 南韓에도 朴憲永이라는 분이 ‘共産黨’을 이끌고 나가다가 北朝鮮으로 넘어가서 그 곳 北朝鮮政府 內에서 活躍하였고 南韓 內에서는 金三龍, 李舟河 라는 두 사람이 朴憲永의 뒤를 이어 共産黨의 指導者로서 活動을 하다가 拘束되어 西大門 刑務所에 收監 中이었다. 이 때 北側에서 南側에게 이들 金三龍, 李舟河 두 사람과 金日成 一黨이 가장 두려워하며 그들이 軟禁 中이던 朝鮮 民主黨 黨首 曺晩植先生을 맞交換하자는 兩側이 協商 끝에 어느 날 開城의38度線上에서 交換하기로 했었다. (4)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純眞한 南韓社會(나의 個人的인 表現)가 脈을 플고 있을 때인 1950年 6月 25日인 日曜日 새벽을 期하여 38度 全 線上에서 南쪽을 向하여 일어난 戰爭이 ‘6,25 動亂’이라도 하는 戰爭이다. 또 이 때 내가 우리 國軍의 狀況을 보고 느낀 바에 따라 몇 가지를 말해 보면은; (1) 몇 가지 論難은 있으나, 이 南쪽 大韓民國 쪽에서는 이런 南侵에 대한 情報가 없었다. 따라서 38線 前方을 包含한 全 國軍의 大部分의 兵力이 週末 休暇로 營外로 外出을 나온 상태였다. 이렇게 北方을 向한 防衛 網이 텅 텅 빈 상태가 된 要因 하나는, 部隊 將兵을 外出시키면 거기서 節約되는 補給物資, 例를 들면 쌀 반찬 등의 量이 莫大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否定的인 面을 떠나; (2) 이 때는 요즈음처럼 電話 等 通信施設이 없을 때라 外泊 나온 一般 士兵은 커녕 웬만한 部隊 指揮官 將校들에게도 非常 召集令을 急히 傳達할 方法이 없었다. TV도 없었고 Radio도 빈약하게 國營 KBS 하나만 있고 이 Radio도 없는 집이 大部分이었다. 그래서 서울市內 에는 軍用 Jeep車를 탄 憲兵들이 천천히 運行하면서 또는 將兵들이 들어가 있을 可能性이 많은 劇場같은 곳에 들어가서 擴聲器를 가지고 “非常召集令이 내렸으니 將兵들은 急히 所屬部隊로 復歸하라”는 비상 소집령을 전달하고 다녔다. 軍 將校들 집에는 部隊에서 連絡兵이 大衆 交通 手段인 電車를 타고 가서 ‘非常 召集令’을 알렸다. 實際 南侵 戰爭은 새벽 4時에 일어났는데 이런 非常 召集은 날이 다 밝은 아침 8時 以後에나 전달되고 있었다. (3) 이런 狀況下에서 나는 미아리 고개 밑 電車 終点 敦岩洞에 살고 있었기에 平生을 두고 記憶에서 지워질 수 없는 光景을 많이 보았다. 많은 將兵들이 市內에서 電車를 타고 와서 이 電車 終点에서 내린다. 憲兵 下士官 2名이 이들 將兵들을 所屬 部隊別로 集合시킨다. 그런데 이 날은 日曜日이므로 電車의 運行數가 아주 적다. 한참 있어야 하나씩 오는 電車를 기다리지 못하여 많은 國軍 將兵들이 電車線路를 따라 所屬部隊가 있는 前方으로 뛰어가다가 終点으로 와서 合流한다. 그러니 時間은 10時 11時 12時가 되며 날씨는 자꾸 더워진다. 뛰어가는 軍人들은 웃동(上衣)을 벗어 들고 땀을 철철 흘리며 뛴다. 얼마만큼 식 있다가 所屬 部隊別로 한 추럭이 찰 만 하면 憲兵의 引導 下에 추럭의 뒷문을 닫고 미아리 고개를 올라가 北쪽 前方으로 간다. 이 때 미아리 고개 넘어 議政府 동두천 方面으로 간 將兵들은 倉東에 駐屯하고 있었으며 後에 越南 派兵戰鬪 部隊의 猛虎 部隊로서 잘 알려진 國軍 第1聯隊 所屬 將兵들이었을 것이다. 오랜 後에 나는 생각한다. 이 때 한시 바삐 所屬 部隊로 復歸하기 爲하여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뛰어 가든 이 將兵들이야 말로 軍人 精神이 充滿했든 愛國 將兵들이다. 나는 이 때 戰爭이 두렵고 자기의 生命이 아까워서 이 非常 召集令에 應하지 않았든 國軍 將兵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다. 나는 이 때의 이런 國軍 將兵들이야 말로 정말 大韓民國을 사랑한 愛國 將兵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많은 꽃 같은 젊은 愛國 國軍 將兵들 中에서 얼마나 많은 生命이 희생되었을까? (4) 서울은 開戰 3日만인 28日 새벽 北쪽 共産軍의 手中에 陷落되었다. 우리 가족은 27日 午後 늦은 時間에 砲聲이 의정부로부터 점점 미아리 쪽으로 가까워짐에 따라 新堂洞 어떤 집으로 避難을 갔다가 나는 28日 늦은 午前 時間에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東大門 박 崇仁洞 警察 派出所 앞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 派出所 옆에는 여름 무더운 날씨에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쓰레기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파리 떼가 왕왕거리는 쓰레기 더미에 입과 코를 틀어박고 비스듬히 엎어져 있는 죽은 사람의 屍體가 눈에 들어왔다. 軍服을 입은 國軍의 屍體이다. Helmet鐵帽도 옆에 내 둥그러져 있다.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戰死者의 屍體이다. (5) 그 다음달 2日 나는 門안(市內)에 갔다가 옛 城郭이 있는 落山을 넘어 돈암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든 길에서 두 번째의 처참한 狀況을 볼 수밖에 없었다. 人民軍 몇 명이 한가롭게 落山 꼭대기 옛날 쌓은 성곽 위에서 小銃 射擊 練習을 하며 히히 덕 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밑 漢城女子 中 高等學敎 뒷山을 내려다 보니까 10餘名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다섯 명의 젊은 國軍 兵士들이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웅크리려 곤두박질 되여 처박혀 있었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戰鬪 中 負傷 당하여 서울 大學 病院에 後送되어 治療 받든 負傷 당한 國軍들이 國軍이 後退하고 人民軍이 들어온 다음 이 人民軍들에게 落山 꼭대기 城壁 위에 까지 끌려와서 銃殺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銃에 맞은 國軍들이 城 밖 漢城 女學校 쪽 몹시 傾斜진 쪽으로 곤두박질 되여 떨어져서 뒹굴어 내려오다가 어린 외솔포기 나무에 걸려서 여기 저기 처 박혀들 있는 것이었디. 그 중 몇 명은 그 때도 숨은 붙어 있어서 숨을 할딱할딱 쉬고 있었다. 銃에 맞았기에 피(血)를 흘려서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핏기 없는 얼굴 색깔은 누렇고 蒼白한 허연 색깔로 變하여 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들여다 보던 사람들 중 특히 아주머니(婦女者)들은 얼마나 불쌍해하며 안타까워하든지! “아이구! 저놈들(人民軍)만 없으면 지금이라도 업어 醫師한테 가면 목숨은 살릴 수 있을 텐데!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원!!!” 그런데 이 場面을 想像 속에 그리며 생각해 보자. 이들 우리 國軍 將兵들 4肢(팔 다리)가 다 부러지고 脊椎 뼈 어깨 뼈 다 부러지고 頭개骨도 부러졌을 것이 아닌가?? (6) 또 한가지 내가 나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이웃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共産軍의 戰車가 미아리 고개 마루를 向하여 올라오기 시작하나 도무지 막아낼 方法이 없다. 國軍 將兵들이 가지고 있는 M-1 小銃이나 手榴彈에는 끔적도 안 하고 轟音을 울리며 올라 오고 있다. 여러 명의 國軍 將兵이 手榴彈을 가슴에 끌어안고 人民軍 戰車( 그 當時로서는 蘇聯製 T-34型이라는 重型 戰車) 밑으로 기여 들어가 爆死한다. 그러나 그 怪物 같은 共産軍 戰車는 끄떡도 안 하고 고개 마루로 기여 올라온다. 이 때 몇 명의 軍人이 가지고 있던 수류탄 몇 발과 함께 통 나무(木) 토막을 하나 씩 앞 가슴에 끼여 안고 전차 밑 Caterpillar 바퀴 속으로 기여 들어가 爆死하며 죽음으로 이 戰車들을 막아 보려고 시도하지만 -----. 내가 알기로는 第2次世界 大戰 中 ‘그 勇敢 無雙하다’는 日本軍의 ‘肉彈 3勇士’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고 그 後에 ‘가미가제(神風) 特攻隊’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으며, 또 6,25 事變 前 開城 松嶽山의 有利한 山 頂上 部에 있는 人民軍의 機關銃 陣地에 爆彈을 끌어 안고 들어가 죽음으로 爆破한 우리 국군의 ‘肉彈 10勇士’의 산화 事件이 알려져 있었지만, 1950年 6月 28日 새벽 이 미아리 고개 마루에서의 ‘肉彈 勇士’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이야 말로 이 나라 大韓民國을 지키기 爲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무 代價도 없이 목숨 바쳐 죽어 간 젊은 勇士들이 아닌가! 그로부터 62年이 지난 오늘날도 나는 그 때를 回想하여 볼 때 마다 여러 가지 말 할 수 없는 깊은 感懷에 빠져들곤 한다. (1)나는 1967년 英國이라는 나라에 滯留하고 있을 때 中東의 Israel對 Arab 國들간의 戰爭이 벌어지는 상황을 보도하는 TV나 신문들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戰爭이 일어나자 英國에 체류하던 Israel靑年들이 本國의 전쟁에 參戰하기 위하여 London의 Heathrow 國際空港을 向하여 달려 나가는 상황을 보면서 6,25 한국전쟁 초기에 週末 休暇로 外泊 中이던 우리 국군 장병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미아리 고개 밑 돈암동 電車 終点 지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든 場面이 생생 하게 떠 올랐다.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인구 250萬 정도의 조그만 나라 Israel이 주위의 Arab 연합군에 의해서 침공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參戰하고 저 앞을 다투어 서두르는 Israel靑年들!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Arab의 여러 나라에 둘러 싸여 있는 요 조그만 Israel이 國體를 保存하여 나갈 수 있는 연유를 알 것 만 같았다. 우리 大韓民國이 지켜져 온 原動力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2)위의 이야기는 6,25 開戰 初 내가 본 이야기일 뿐이고 전쟁 총체적으로는 전사한 國軍 將兵들의 數만도 約15萬 名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들 희생자들은 다 젊었던 사람들이다. 人生의 앞날이 千里 萬里 같았던 사람들이다. 앞날의 꿈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人生의 꽃을 한번도 피워 보지 못한 靑年들이었다. 俗된 말로 總角 鬼神 된 경우도 허다하다. 婚談이 오고 가던 사람, 約婚 날짜 結婚 날짜 잡아 놓고 그 날만 손 꼽아 기다리는 處女 約婚女 두고 홀로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날수 밖에 없었던 경우도 많이 있었으리라. 休暇 때 마다 만나서 두 손 꼭 붙잡고 將來의 生活 設計를 나누며 幸福했던 경우도 적었을라구! 病患 中에 있는 늙으신 父母를 두고 갈 수 벆에 없었든 유난이 孝性이 지극한 아들들은 없었을라고? 그 중에는 責任지고 父母 祖上들 墓所를 돌보아야 될 씨받이 외아들들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子息들 홀로 責任지고 키워야 될 젊은 妻에게 그 어린 아이들 맡겨두고 갈 수 밖에 없었던 靈魂들 ; “여보! 당신 미안하오!” “얘들아! 미안하다!” 말 한마디 못 남기고 갈 수 밖에 없었든 靈魂들…..! 그런데 수 많은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 갔나? 공교롭게도 또 우연히도 1950年 그 때 國軍의 一員으로 있었기 때문인가? 6,25 戰爭이 일어나기까지는 徵兵(義務兵) 制度도 없었는데, 그런데도 軍隊에 自進하여 志願했든 罪(?)때문인가? 이 將兵들은 모두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世上 살아갈 經濟的 能力이 도무지 없는 無能力者들이기 때문에 軍隊에나 들어가지 않고서는 하루 세끼 밥 먹고 옷 입고 추위를 막아줄 房 한 칸 없어서 軍隊에나 들어가 國家에서 주는 밥 먹고 月給 받아 먹다가 그 代價로 죽어 갔을 따름인가? 그 個個人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타고 난 “運命” 때문인가? 이 때 죽어간 將兵들은 하나같이 모두 손바닥의 生命 금이 생기다 말고 흐지부지 되여 있다던가? 머리 위 정수리가 위로 치 솟고 윗 입술인 “인중”이 길고 턱이 길어서 얼굴 전체가 갸름한 觀相을 가지고 태여 나야 長壽한다고 한다는데 이 때 죽어간 將兵들은 하나 같이 머리 정수리는 푹 꺼졌고 윗 입술은 생기다 말아서 윗 입술이 擴大된 ‘언챙이’나 ‘드라큘라’ 같이 드러나고 턱도 있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태어난 연유로 人生의 切半도 못살고 죽어 갈수 밖에 없었던가? 그런 타고 난 運命 때문이란 말인가? 이처럼 많은 젊은 이들이 어머니 배속에서 태어날 때 하나같이 生年 月 日 時를 잘 못 타고 태어 난 四柱 八字 탓인가? 이런 點에 着眼하여 硏究 論文 하나 쓰면 博士 學位뿐만 아니고 Nobel賞受賞도 바라 볼 수 있을지 모르지? 여기서 나는 對答한다, Nonsense! 허튼 X수작들 마라! 地下에 고이 잠 들었든 勇士들의 靈魂이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리라! 그 때쯤 寡婦가 될 수 밖에 없었든 많은 戰爭 未亡人들의 타고 난 運命 때문인가? 친 아버지 없이 繼父 밑에서 눈치 보며 살아야 됐던 많은 戰死者子女들의 타고 난 運命 때문인가? 젖먹이 어린 아이 까지도 媤어머니인 늙은 애기 할머니에게 맡겨놓고 다시 八字 고쳐 시집 가서 살며 平生을 가슴 아프게 살은 戰死者의 未亡人이 어디 적은 숫자인가? 그 때의 젖먹이 아이들로서 平生을 두고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들 많이 있다. 戰爭 遺腹子의 숫자인들 작은 수인가? 기껏해야 獻忠日 날 銅雀洞 國軍墓地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 석字 찾아가 붙들고 울먹이며 부르짖는 그것도, 單純히 그 아이들의 타고 난 八字 소관인가? 그 중에는 大韓民國 國軍 軍服 입고 찍은 男便 寫眞이 共産軍에게 發見되면 處罰 받을 것이 두려워서 갈기갈기 찢어서 부엌 아궁이에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故人의 寫眞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어렸던 子息들이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살아 오는 경우도 許多하다. 이 때 낳은 딸 아이들, 1970年代에 이르러 자기들 人生의 짝을 찾아 結婚들 할 때 남과 같이 자기에게 生命 주신 아버지 팔짱 끼고 主禮 先生 앞에 나아가서 新郞에게 넘겨질 수 없었다. 가슴 속으로 눈물 삼킨 이런 戰死者의 딸들도 많이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들은 왜 일어났을까? 도대체 왜? 왜? 그들의 아버지가 戰爭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죽어 갔는가? 흔히는 그들이 죽은 곳도 모른다. 따라서 죽은 屍體의 行方을 알 길도 없다. 흙 한줌 덮어질 수 없었던 경우도 많이 있다. (3) 많이 알려졌던 毛允淑(1910-1990)이라는 大韓民國 建國에 功이 컸든 女流 詩人이 있었다. 이 분이6,25 動亂이 일어났을 때 미쳐 南쪽으로 避難 가지 못하고 人民軍 治下에서 땀 냄새에 찌들고 헤어진 옷 입고 山골 火田民 女人으로 變裝하고 南漢山城 近處 山 골자기 洞窟속等에 避身하여 풀잎과 심지어는 신발이 떨어졌기 때문에 발에서 흐르는 피(血)를 찍어 먹기도 하면서 延命했던 분이다. 그 녀가 다음과 같은 題目의 長文의 詩를 썼다. 몇 줄만 引用하며 이 글을 마친다.
國軍은 죽어서 말한다 (What a Fallen Soldier Says)
외딴 골짜기에 홀로 누워 있는 國軍을 본다. 말도 없이 表情도 없이 두 눈은 하늘을 향하여 감겨 있구나 카-키색 軍服 兩 어깨에 빛나는 階級章 그는 자랑스러운 大韓民國의 陸軍 少尉였구나 --------- 中 略 ------------ 나는 스무 다섯 젊은 나이에 죽었노라 大韓의 아들로서 죽어 갔노라 노도와 같이 밀려 내려오는 怨讐를 맞아 祖國을 지키려고 勇敢히 싸우다가 죽었노라 ----------- 中 略 ------------- 나에게도 어머님 아버님 계시고 또 兄弟도 있다. 사랑하는 어여쁜 少女도 있다. 새로 피여 나는 이 疆土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살아갈 화려한 앞날도 꿈꾸고 있었다. 나는 勇敢히 싸우다 죽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죽었다.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의 祖國이여! ------------- 中 略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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