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선족 부부의 북한방문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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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 3人의 이야기
도착한
며칠 후 나는 부탁받은 한국 이산가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데 달라붙었다. 1980년도까지 고건원 탄광마을에 6·25 전쟁 당시 한국군
포로병들이 몇 명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함경북도 온성 군에 있는 주원탄광과 은덕군에 있는 아오지탄광으로 이주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은 각 郡마다 다니자면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우리 중국교포도 통행증에 새별군 밖에 밝히지 않아, 온성군이나 은덕군에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마을 주민들에게 부탁했더니 하루는 한 주민이 은덕군에서 왔다는 한 주민 을 데리고 왔다. 그 주민에게 은덕군 아오지탄광에 한국군 포로병이
있는가고 물어보 았더니 그는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열댓명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실 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없는가 요청했다.
한국군
포로병 한 분을 직접 만나든가, 아니면 그 가족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나의 의향 앞에 그 주민은 쾌히 승낙했다. 수고비 겸 부탁비로 나는
주머니에서 북한돈 1백원을 꺼내주며 수고비에 쓰라고 주었더니 그 주민은 꼭 데리고 오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과연
약속한지 이틀 만에 그 주민이 어떤 할머니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 할머니는 72세 된 조OO이라는 분이었는데 은덕군 학송리에 살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러면서 6년 전에 사망한 자기 남편의 이름은 김OO이고 나이는 77세 인데 6·25 전쟁 당시 북한 황해도 해주 근방에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 포로병이라 하는 것이다.
고향은
경기도이며 고향엔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있다고 하였다 한다. 북한에서 30세 정도 되어 자기와 가정을 이룬 김OO은 아들과 딸을 보았다. 현재 그
아들은 교원을 하고 있고 딸은 출가했다 하였다. 연길 아주머니가 알아보자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또 이 할머니는 자기 남편의 친한 친구인
박OO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박OO은 전라도 태생인데 영감과 같이 포로가 되었다 한다.
나이는
76세 정도이며 영감과 같이 아오지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연로보장 후 은덕군 상농경에 집을 잡고 있는데, 현재 생존중이라 하였다. 할머니는
박OO은 34세 된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은덕군 편의봉사 지도원을 하며 돈을 잘 벌고 있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며 부러워하였다. 박OO의 집은
학송인민학교 앞에 자리잡고 있다 하였다. 이 박OO씨도 역시 그 아주머니가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전한 포로들의 운명
조OO
할머니는 자기 영감과 같이 포로된 친우들이 아오지탄광에서 1970년도까지 같이 일하다가 20명 정도가 온성군 주원탄광 에 집단 이주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영감 친우들은 기본인원이 온성군 주원탄광에 있으며, 1998년에도 정OO이라는 온성에 있는 포로병 출신 영감이 은덕에 왔다가
자기 집에 들러갔다 한다. 정OO의 말에 의 하면 5명 정도가 주원탄광마을에 아직 생존중이다.
맥이
풀렸다. 아무리 물어보아야 찾고자 하는 연길 아주머니의 친척이 없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이렇게 걸음을 시켜 안됐다 는 사과를 하며, 북한돈
1천원을 주어 생활 에 보태쓰라고 한 후 돌려보냈다. 온성군 주원탄광 쪽으로 몰래 가볼까, 아니면 사람을 찾아 연줄을 달아볼까 궁리하는 데
뜻밖의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조OO
할머니를 보낸 다음날인 10월23일 점심시간에 웬 낯선 남자들 3명이 우리집에 찾아 왔다. 그들은 자기네는 은덕군 보위부에서 온 반탐과
보위원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후 은덕군 보위부에 같이 가야겠다는 것이다. 무슨 영문이냐고 묻자 그들은 국가문제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므로 그건
가서 논의해야 된다고 딱 잘랐다.
그러면서
나의 아내도 같이 갈 것을 요구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그들이 타고 온 지프에 앉게 되었다. 지프에 오르자 이들은 우리 손에 족쇄를 덜커덕
채웠다. 왜 그러는가 물어도 아무 대답 없이 막무가내인 이들 앞에서 더 항변하고 싶었지만, 죄가 없는 우리는 흑백이 가려지리라 생각하고 마음
든든히 떠났다.
고건원
탄광마을에서 은덕군까지는 약 2백리 가량 되었는데 도로가 울퉁불퉁해 3시간 남짓 걸렸다.
은덕군
보위부 청사에 이르러 어느 한 방에 들어서니 중년이 넘은 반탐과 부부장이라 는 사람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군 포로병들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가 물었다. 있다고 대답하니, 목적이 뭔가 묻는 것이다.
나는
연길에서부터 부탁받고 알아본 사유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나의 아내에게도 물었으나 아내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 더 알아 볼 것이
없었다. 보위부 반탐과 부부장은 연길 아주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으며 어떤 관계인가 물었다. 그저 마을에서 가깝게 지내며, 남편과 같이 살림을
꾸려보자고 아둥바둥하는 정직한 아주머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책상을 탕 치며 똑바로 말하라고 을러댔다.
나
역시 그 이상 더 할 말이 없던 차라 무슨 말을 더 하느냐고 맞섰다. 그러자 그는 옆의 보위원들에게 데려가라고 말하며 음흉하게 웃음지었다.
몸집이 실한 보위원 두 명은 마누라를 보위부 감방 안에 집어넣고 나를 명패도 없는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방
구조를 보니 천장 꼭대기에 손목을 매다는 쇠사슬이 걸려 있고, 그 옆에 불을 피우는 난로 같은 것 외에 몇 개의 양동이가 뒹굴고 있었다. 나무
몽둥이가 열댓 개 정도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는데 나무책상과 의자가 하나 댕그라니 놓여 있는 것이 대뜸 고문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에는
소리가 밖에 못 나가게 두툼한 방음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내가 들어서기 바쁘게 벽에 걸린 나무몽둥이를 손에 쥔 두 사나이는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똑바로
대라, 너 이남 간첩이지?』
얼굴
부위를 빼놓고는 온 몸 어디라 할 것 없이 마구 때리는 그들에게 나는 말 한마디 변변히 해볼 틈이 없었다. 난생 처음 이렇게 맞아보니, 정말
아팠다. 비명소리만 계속 나갔다. 입고 있던 나의 옷은 몽둥이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한참 때려 나를 아예 곤죽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이들은
뜻밖의 말을 던졌다.
『똑바로
대라, 너 이남 간첩이지?』
『간첩이오?
나 중국 사람이오!』
『이
자식이 중국 사람인 걸 누가 몰라, 이남에서 간첩임무를 받았지?』
『아니오,
난 그런 걸 모르오!』 또 다시 때리니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후에는 더 생각나지 않는데 눈을 떠보니 쇠창살을 댄 웬 독감방에 내가 혼자
누워 있었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습기가 축축 했고, 10월 말이라 온 몸이 추위에 덜덜 떨렸다.
조금
후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두 남자가 들어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개처럼 질질 끌고 처음 보았던 그 방에 들어가 의자에 겨우 앉혀
놓았다. 뒤 따라 반탐과 부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피우던 중국 담배를 권하며 솔직히 말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두어 모금 정신없이 빨아댔다. 그런 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남북이 갈라져 간첩이요, 뭐요 하는데 그런 건 우리한테 상관없소, 난 그 게 뭔지, 말도 잘 모르는 사람이오!』 반탐과 부부장은『흥』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중국 쪽에 사람을 파견해 나의 정체를 다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내가 서로 갈라져 찾지 못하는 이산가족을
위해 물어보았을 뿐인데 나의 정체고 뭐고 다 정당하다고 외쳤다.
순간
반탐과 부부장은 일어서더니 구둣발로 의자에 앉은 나를 사정없이 차기 시작했다. 옆에 서있던 두 명의 남자도 합세하여 가죽혁대로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아픔과 고통에 고개를 쳐들 힘도, 말할 힘도 없었다.
『똑바로
말해, 너 무슨 임무를 받았어?』
『돈
얼마에 포로병 문제를 알아보기로 했어?』
그들이
고아대는 소리가 귓속에 모기소리처 럼 앵앵거리는 게 마치 꿈속에서 그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난
모르오! 난 간첩이 아니오!』 하는 소리만을 겨우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참 맞고 나니 내가 헛소리만을 하자 이들은 나를 감방 안에 끌어다 도로
처넣었다. 이렇게 잡혀온 지 하루가 지나갔다.
그
다음날 저녁에 한 남자가 사발 두 개를 들고 왔다. 식사였는데 통옥수수알 삶은 것 두 숟가락 정도에 소금물을 탄 맹물이었다. 입이 말라 소금물만
들어 목을 축이고 옥수수알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조금 후 식사를 가지고 왔던 남자가 그릇을 가지러 왔다가 그대로 있는 그릇을 보고『흥, 잘 먹던
놈이 이런거야 성에 차지 않겠지?』 하고는 그릇을 도로 가지고 나갔다.
물
속에 몸 담그고 이틀간 서 있어
생각해볼수록
정말 억울했다. 식량지원 나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남들은 돈버느라고 웃고 떠들며,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고국 땅이란 곳에 와서
뚱딴지 같은 「간첩」이라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북한놈들이 증오스러웠고, 그 연길 아주머니까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한편
아내가 어찌 되었는지 걱정되었고, 내 앞길이 어찌 되겠는지도 근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중국공민인 나를 외교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어쩌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음날 아침 또 불려간 나는 그들이 묻기 전에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처는 어떻게 되었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요!』
반탐과
부부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알아, 너의 처는 내보냈다. 문제는 너한테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후』 한숨이 나 왔다. 다시 무슨 임무를 받았느냐는 똑같은 질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도 전 같았다.
그들은
악기가 날 대로 났다. 마치 없는 죄를 억지로 씌워서 내가 자백하게 만들려는 꼴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가져온 몽둥이로 찜질을 당하고
난 나는 또 끌려나갔다. 끌려 간 곳은 목욕탕 같은 욕실 안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별난 감방이었다.
사방
벽이 타일을 붙여서 매끈매끈하고 쇠살창을 박았는데 물속에 집어넣고는 살 창 열쇠를 덜컥 채워버렸다. 앉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이른바
물 고문장 같았다.
여기서
나는 옹근 이틀 동안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내내 서있어야 했다. 살은 물속에서 허옇게 부풀어나고 온 몸이 저려왔다. 하루는 그럭저럭 이를
악물고 참아왔지만, 졸음이 자꾸 실리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깜빡 잠이 들어 다리맥을 늦추면 풀썩 주저앉아 물속에 잠기곤 하여 벌떡 다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곤 하였다. 아예 이 속에서 자살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또
쇠창살 밖에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지키고 있어 죽을 수도 없는 곳이었다. 이틀이 되니 잠을 못 잔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앞에 있는 것이
부옇게만 보였다. 쇠창살 바깥에서 부부장이라는 사람과 보위 부원들이 연속 무슨 임무를 받았느냐 질문 하였지만 없는 일을 말할 내가 아니었다.
그후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물속에 주저앉은 기억이 난다.
희미한
그 기억만 있는데 눈을 떠보니 나의 몸이 찬 시멘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어느새 나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의 몸에 무슨 고약 같은 것을
발라놓았는지 살이 진득 진득했다. 아마 물에 퍼진 살에 발라주는 약 같았다.
한참
있으니 전과 같은 통강냉이알 삶은 것에 소금물을 또 들여왔다.
그때
나는 일생에 먹어보지 못한 이 통강냉이 알 삶은 것을 한알 맛보았는데 그리도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정신없이 몇알 씹어 먹던 나는 그만 생각이
굳어졌다. 節食(절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죽든 살든 절식하면 병보석으로라도 나를 내놓을 것 같아서였다.
3일 후 또 불려간 나는 같은 질문 앞에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그랬더니 웬일인지 때리지는 않고 종잇장을 주며, 나의
경력, 북한에 들어오게 된 동기, 들어올 때와 들어와서 움직인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적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응했다.
감방
안에서 수갑을 찬 채로 글을 쓰라고 준 자그마한 널판자 위에 종이를 놓고, 있는 사실 그대로 다 쓰니 하루가 지나갔다. 먹지 못한 나는 그만
감방 안의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무엇을 나의 입에 떠 넣어주는 감각에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아내가 앞에 앉아 나의 머리를 자기 팔로
받치고 미음을 떠넣어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니 아내는 엉엉 울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소!』라고 겨우 말하며 웃어보였다. 미음을 먹으니 한결 정신이 들고 기운이 솟았다. 마누라는 다시 쫓겨나 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았다.
벌금
1만원
그동안
나는 보위부의 요구에 의해 쓴 것을 다시 쓰고 또 쓰며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 감옥에 들어온 지 꼭 7일이 지나 불려간 나는 반탐과 부부장과
마주앉았다. 그는 살기차던 얼굴색을 돌변하여 뜻밖에도 웃음을 띠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안됐소, 한국군 포로병 문제는 중대한 국가 안전 문제이므로 우리가 신경을 썼던 거요, 당신에게 간첩죄는 없다고 보고 우린 석방하려 하오!』
그러며
손목에서 수갑을 풀어주고 종잇장을 꺼내 주며 읽어본 후 손도장을 찍으라는 것이다. 타자한 종이에 적힌 것을 보니 국가 안전 보장에 영향이 있을
요소와 관련하여 나를 구속하였다는 내용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
다음 나의 형사범죄와 관련하여 외국인 법률관례에 좇아, 중국돈 만원을 벌금시킨 후 조선에서 추방시킨다는 내용이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우린
돈도 없거니와 벌금 낼 수 없소!』 하고 강경히 항변했다.
그러자
그는 돈은 이미 당신의 아내가 중국에 넘어갔다가 가져왔으니 안심하라며, 서로 좋게 해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중국에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억울했지만 생각해보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도 아까웠지만, 치욕을 당할 일이 더러웠고, 이 북한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에 더
말하기 싫었다. 서명장 마지막에는 일체 보위부에서 당한 질문과 심문을, 목숨이 져도 누설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맹세문이었다.
순간
너희들이 뒤가 켕겨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중국 땅에 가면 야만적인 너 희들의 처사를 꼭 공개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나는 채 읽어보지도 않고 더러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인주에 열 손가락을 다 바른 후 지장을 콱콱 찍어댔다. 조금 있더니 아내가 들어왔다.
눈물을 가득 담은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보위부 청사를 나서니 보위부 인간들도 따라나왔다.
웬
화물 자동차가 청사 밖에 서있었는데, 자기네가 말해놓았으니 그걸 타고 고건원 탄광 마을까지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 중으로 무조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자동차에 앉은 우리는 떠났다. 저주만을 남긴 채 일 생의 상처로 될 한을 가득 안고, 원망의 부르짖음을 하늘에 날리며
떠났다. 자동차에 앉아오며 아내는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나와
같이 감옥에 갇힌 아내는 첫날 그들의 심문에 결사적으로 항의 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또 조OO이라는 할망구를 내가 상대했으니, 알리없었다.
보위부에서 연루자들을 이미 취조해 본 것 같았다. 그러니 나의 아내는 아무 근거도 없어 내보냈던 것이다.
감방
안에서 하룻밤 자고 나올 때 한 보위원이 슬며시 귀띔하더라는 것이다.
『거
중국에서 가지고 나온 돈이나 물건이 좀 없소? 쌀이래도 좋소, 보위부에 좀 찔러주면 당신의 남편도 곧 석방될 거요』 이 말을 귀가 항아리만해
들은 마누라는 즉시 고건원 탄광마을에 돌아와 사촌누이와 토의했다.
누이와
함께 쌀 두 포대와 밀가루 두 포대, 그리고 돈으로 장마당에서 술과 중국 담배를 한 상자 준비했다. 그걸 가지고 다음날 보위부 부장을 만나 내
놓으니, 그는 좋아서 입이 함박만큼 째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제
당신 남편 사건을 좋게 마무리하겠으니 기다리오, 그런데 벌금은 중국돈으로 만원을 꼭 해야 하오!』
마누라가
중국에서 음식장사가 별로 잘 안 되는 우리집 사정을 말하며 애원했으나 보 위부장은 딱 자르더라는 것이다.
국군
포로 아들이 고발
나의
이른바 「간첩혐의 사건」은 함경북도 보위부에도 통보되었으므로 만원 돈을 내 놓지 않으면 수습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마누라는 돈
가지러 중국에 넘어갔다 온다는 증명서를 떼달라고 하여 보위부 공인이 찍힌 국경통과증을 따로 만들어 가지고 연길에 갔다.
연길에서
내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형제들은 연변 공안국에 신고하는 한편 수습처리를 했다. 허나 연변 공안국에서는 북한 쪽과 연계해보니 남편이
북한법을 위반했으므로 벌금은 내야 한다는 답변을 주었다. 괜히 신고했다가 코만 뗀 우리 형제는 서로 돈을 모아 만원을 마련하는데 달라붙었다.
아내는
물론 연변 아주머니에게 찾아가 사실을 통보하고 보상을 요구했다. 하여 연변 아주머니도 돈 5천원을 내놓았다 한다. 돈과 술, 담배, 고급빵 같은
예물을 가지고 재차 은덕군 보위부에 도착하니 그들은 미 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박스 안의 담배를 꺼내 서로의 주머니에 넣더라는 것이다. 그 뒤
내가 풀려나왔다 한다.
내가
겪은 일이 꼭 무슨 어느 한 영화 줄거리 같았다. 시큰거려 제대로 말을 안 듣는 허리통증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큰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허황스러웠다. 살다 살다 별난 일을 다 겪어본다는 허무감과, 고문당할 때 같아서는 세상을 다시 살아볼 것 같지 못했는데, 이렇게
세상 밖에 나왔다 생각하니 안도감이 드는 것이 별났다.
고건원
탄광마을의 사촌누이네 집에 들어서니 모두 울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자기네 때문에 내가 일을 당했다는 자책감에서였다. 나는 일 없다고 위로하며
어찌된 사연인가 물었다. 사촌누이는 자기네가 그동안 알아보니, 그 조OO 할망구의 김OO이라는 아들이 보위부에 고발하여 일이 생긴 것이라 한다.
내가
잡히자 분개한 사촌누이의 딸은 즉시 은덕군으로 달려갔다. 그 할망구를 만나니 하는 말이 자기가 고건원 탄광마을에 와서 나를 만난 사연을 아들이라
믿고 이야기하였다 한다. 그러자 아들은 펄쩍 뛰며 만난 그 중국 사람이 분명 「이남간첩」일 수 있다고 신고하러 가자 하였다 한다.
조OO
할망구는 그런 것 같지 않다며, 이남에 고향을 두고 가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 은 네 애비를 봐서라도 그러면 안된다고 아들을 설복했다. 허나
북한의 처벌이 두려웠던 아들은, 제 에미 모르게 찾아가 화를 미연에 방지하느라고 고발하였다. 이 사실로 보위부에 불려가서, 귀뺨을 얻어 맞으며
심문당하고서야 할망구도 자기 아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어처구니없었다.
모두 미쳤다. 이래 가지고야 무슨 남북이 화해하며 이산가족을 찾겠는가, 하는 허무감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나는『이산가족을 찾으면 무슨
국가안전이 위태로우냐, 너희 형제들을 찾아주자고 하는데 고발하느냐』 하고 형제들에게 울분을 토했다.
너희들은
바로 그래서 못산다, 힘껏 일하고 힘껏 배워야 할 대신 사상이요, 뭐요, 말 방아만 찧으니 너네나 너네 나라 전망은 뻔하다고
외쳐댔다.
구역질
그러며
너무도 화가 나, 북한이 좋은 세상으로 바뀔 때까지 다시 발길을 안하겠다고 선언했다. 곁김에 개 배찬다는 식으로 아무리 사촌누이 형제들에게
밸풀이 해봤댔자 소용없는 노릇이고 그 시간이 지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아내와 같이 사촌 누이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 우리는 세관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섰다. 다시 북한 쪽을 뒤돌아보니 구역질이 났다 . 모두
목덜미를 쥐고 와, 번창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속에서 한번 살아보라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야지, 얼토당토않은 주장만 앞세우며 서로
물고 뜯기만 해서야 언제 잘 살겠느냐, 그러니 같은 땅 이라도 한국과는 하늘땅 차이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스피커를 매달고 북한에 해대고
싶었다.
외국동포들에게「간첩」죄나
뒤집어씌우고, 脫北者들에게는「민족 반역죄」나 뒤집 어씌우며 독재의 마지막 지탱점을 최후 발악으로 지켜나가는 북한 체제의 가련한 모 습도 밝히고
싶었다.
나는
중국 공민으로 북한의 사슬에서 풀려 나왔지만 아직도 북한 땅의 모든 주민들은 「강성대국」,「사상대국」을 부르짖는 무서운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 초보적인 인간의 자유와 권리란 무엇인지도 모른다.
쇠사슬에
얽매여 주는 걸 먹고, 집체적으로 내몰려 일을 하고, 집체적으로 잠을 자며, 묶여 어쩔 줄 모른다.
그
사슬을 풀 임자가 누군지도 한민족은 너무나 잘 안다. 북한이 빨리 이 사슬을 끊어 버리고 번영하는 세상의 무대에 나서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해외동포들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바람이다.●
출처:http://www.duri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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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루고 달래서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외국인도 두들겨 패서 죄를 만들어내는 나라니까요.
더 괘씸한 것은 중국정부가 그런 어이없는 북한놈들의 억지를 그대로 받아주고 그놈들 좋은대로 편들어준다는거죠.
사실 남과 북의 통일의 열쇠를 쥔것은 남한이 아닌거 같습니다 정말 열쇠는 북이 쥐고있고 남한이 그 열쇠를 사용하도록 잘 유도하는것뿐 주도적 역활은 어렵습니다 사상이 모든것을 무시하는 북한으로썬 그어떤 경제협력도 지원도 결국 사상이란것에 묻혀버릴테니깐요. 그래서 남한 단체들이 삐라 같은걸 살포하는것일테구요.
저 일을 당하신 분 고통 잘 참으시고 견뎌내셨네요.. 저같았으면.. 살아나오지 못했을꺼같아요...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보니 보위부에서 한달동안 계셨다는 분들도 여럿 있으시던데.. 일주일도 참 지옥같아 보입니다..
조선족 ㅅㄲ들 한국내 이미지 개선하려 생쑈하네
근데 6.25 전쟁때 북한쪽에 붙어서 한국사람들 죽이던놈들한테
과연 이미지 개선이 될까?
포기하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