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 / 2010년 12월 / 269쪽 / 13,500원
▣ 저자 윤종성
정치학 박사, 리더십 연구가. 강원 인제 출생. 육군사관학교를 37기로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2사단 헌병대장, 33경호 대장, 대통령 경호실장 보좌관, 5군단 헌병대장, 육군중앙수사단장, 육군헌병 병과장, 국방부
조사본부장을 역임했다. 저자는 일찍이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실행에 몰두했다. 그는 성품, 의지, 능력, 비전, 가치,
전략, 과제라는 7가지 리더십 실행 원리를 찾아 조직의 변화와 성장을 모색하고 구성원들에게 행복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그는
대한민국의 뉴 디자이너 <박정희 리더십 스토리>를 완성함으로써 리더십을 대중화하려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낸 대한민국 뉴 디자이너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이다. 저자는 "리더십이란? 사람의 마음(mind)을
움직이는 힘(power)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성원의 행복(happiness)이다"라는 측면에서 박정희의 리더십을 소개한다.
박정희는 엄격하고 결단력 있고 청렴한 성품과 불굴의 의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력과 상황을 구조화하는 조직력, 나아가 강력한
실천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 '먹고사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상황판단 아래 '잘
살아보세'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가치를 장려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립 등 국가적 과제를 선정하여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그 결과 박정희는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냈으며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가난을 숙명처럼 살아온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강국으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소개하는 박정희의 리더십 이야기는 일회성 테크닉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대국적인
상황판단을 통하여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가치를 장려함과 아울러 전략을 채택하고, 과제를 선정,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 한 철학과 사상의 이야기이다.
▣ 차례
Part 1. 역경의 인생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라
Part 2. 꿈꾸는 리더
성품, 의지, 그리고 능력을 갖춰라
리더십 실행원리 1. 성품 - 청렴한 성품으로 마음을 사로잡다
리더십 실행원리 2. 의지 -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리더십 실행원리 3. 능력 - 강한 지도력으로 차별화되다
Part 3. 시대를 읽는 눈
상황을 파악하고 진단하라
Part 4. 가난을 몰아낸 리더십
비전, 가치, 전략, 과제를 제시하라
리더십 실행원리 4. 비전 -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자
리더십 실행원리 5. 가치 - 부지런하고 스스로하고 서로서로 돕자
리더십 실행원리 6. 전략 -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하자
리더십 실행원리 7. 과제 - 경중완급을 가려서 하자
Part 5. 행동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라
Part 6. 한강의 미러클
성장의 그늘을 걷어내라
Part 1. 역경의 인생 - 위기를 기회를 만들어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박정희의 이 말은 가난의 굴레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온 삶의
의지였고 버팀목이었다. 이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잡고 18년 6개월을 통치하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정신이요 혼이며 그의 지도력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는 인생의 역경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알았다.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가난한 몰락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미에 있는 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새벽에 일어나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기에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보가 다 젖었고, 겨울에는 땅바닥이
얼어 빙판이 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한 달 수업료가 60전이었는데 이것을 납부하는 것은 가난한 농촌 살림에 큰 부담이었다.
정희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생기면 학비를 모아두었고, 때로는 쌀을 팔거나 계란을 팔아 학비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오히려 박정희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특히 어려운 여건에서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은 박정희가 성장하여 숱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의 원천 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사범시절 박정희는 말이 없고 사색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은 민족적 분노가 불타올라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이 시기 박정희는 학업은 바닥을 기고 행동평가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훈련과 체육에는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1937년 3월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젊고 패기만만했고 반골정신이 농후했던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들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으로 가르치는 박정희를 좋아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교사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그는 교사가 되어
그 꿈을 구체화시켰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육사 시험에 합격하여 만주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1기생인 선배기수에는 혁명동지인
이주일, 김동하 등이 있었다.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군관학교에서 박정희는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하였다. 국가건설과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군관학교 인맥은 좌, 우로 갈렸다. 당시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대로 이 시대를 호흡한 사람들을
과감한 행동파로 만들었다. 만군인맥의 공통점은 결속력, 친화력, 행동력, 정치 지향적이었다. 반면 일본 육사 출신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정치에 중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일본 육사에서도 2년을 보낸 박정희는 만군과 일군(日軍)인맥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생각의 씨앗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최초의 싹을 틔웠다. 군대를 단순히 전쟁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정치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한 여세를 몰아 동남아로 쾌속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여 1944년 7월 소위로
임관한다. 광복이 되기까지 만주군 보병 8단에서 근무하던 그는 해방이 되자 중국 청진함에서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하여 잠시 고향에 머물던 박정희는 1946년 9월 조선경비 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만군, 일군에 이은
세 번째의 군복이었다.
국방 경비 사관학교의 초기 입대자들의 성분에는 특색이 있었다. 광복군, 중국군 출신도 있었지만 주류는 만군, 일군 출신이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 집단을 피해 내려온 이북 출신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군대의 헤게모니를 반공의식이 강한 북한 출신이 잡게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엘리트 그룹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독립이라는 목표로 뭉쳐 있었으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5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4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3개월 등 장교 교육만 10년 가까이 받았다. 흐트러짐
없는 그의 단정한 자세는 이런 단련에서 우러나온 몸가짐이었다. 그는 이런 교육을 통해 한국, 일본, 중국 문화를 골고루
섭취하였다. 박정희란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동양 3국의 문화가 함께 빚어낸 공동작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Part 2. 꿈꾸는 리더 - 성품, 의지, 그리고 능력을 갖추어라
리더십 실행원리 1. 성품 - 청렴한 성품으로 마음을 사로잡다
성품은 탁월한 리더십의 요체이다. 리더십은 인격이다 할 정도로 지도자에 있어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다. 박정희의 인격은 크게 엄격,
결단, 청렴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그의 성품의 특징은 청렴함이었다. 이러한 청렴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1953년 박정희가 대령일 때 대구에서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방이 둘인 셋집에서 육영수는
아기였던 근혜를 기웠는데 당시 월급은 쌀 한 가마니 값에도 못 미치는 2만 환 정도였다. 나중에 박정희는 성북구 보문동의
언덕바지의 방 세 칸 집으로 이사를 갔다. 부관의 사촌누나 집이었다. 전세금을 낼 돈이 없어 월세를 냈다. 부관이 어느 날 박정희
집에 들렀더니 육영수가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내다 팔 옷을 고르는 것 같았다. 부관이 가면 육영수가 국수를 내
놓았는데 멸치를 넣지 못한 국물에 넣은 국수였다.
박정희는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전쟁을 막 벗어난 조국의 현실과 비교할 때
미국의 풍요함과 거대함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박정희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영내 숙소에서 주로
생활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외출을 나갔다가 점심값을 아끼려 굶고 들어오기도 했다. 유학을 떠난 후 전속부관에게 어느
날 육영수가 인편으로 "쌀이 떨어졌다"는 연락을 해와 부관이 26사단 김재춘 참모장에게 쌀을 받아 육 여사에게 갖다 주었을
정도로 박정희는 청렴했다. 하지만 이런 청렴함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리더십 실행원리 2. 의지 -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지도자가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으되,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없다면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에 있어
삶의 의지는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그 자체였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은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의 윤곽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군 내부의 인적청산 문제가 대두되었고 국군의 10%가 이 사건에 휘말려 제대를 했고 처형된 장교만도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반군 토벌사령부에 참여했던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국군장교였다. 그러나 과거 남로당에 가입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소령이던 박정희는 이 사건 직후 군 내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군 수사팀에 체포된 박정희는 수사 책임자인 백선엽 정보국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수사에 시달려 몹시 초췌하였으나 담담한
모습이었다. 자포자기도 하지 않았고 생에 대한 집착도 크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말투로 딱 한 마디 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게 전부였다.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식의 변명이 아니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으니 선처해달라는 인간적 호소였다.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백선엽의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상황에서 "네 도와드리지요"라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답이었다.
박정희는 소령이었지만 자산이 많았다. 일단 군 내 평판이 좋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릇이 크다'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나이와
연륜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선엽이 결심을 하자 구명운동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군 검찰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 군 통수권자와 군 수뇌부까지 동조한 구명 운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사상과 이념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박정희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교훈을 배웠고 삶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여 이를 가슴 깊이 새겼다. 또한 무슨 일을 하건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경험을 체득했다.
리더십 실행원리 3. 능력 - 강한 지도력으로 차별화되다
능력은 계획하고 말하고 행하는 힘이다. 지도자가 아무리 성품이 훌륭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능력이 없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가 보여준 지도력의 원천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상황을 구조화하는 조직력,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실천력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차별화된 지도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박정희는 학업 성적으로 본다면 탁월한 학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만주의 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 육사과정도 3등으로
졸업하는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박정희에게 군 생활은 또 하나의 훌륭한 학습기회였다. 당시 군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정부의 안보정책
중시의 결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능률적인 조직체였다. 당시 혁명동지인 박태준은 박정희의 지도력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육사에서 생도교육을 받을 때 그 분은 중대장으로서 포병술을 강의했습니다. 무언가 꽉 차고 무거운 분이란 느낌이 왔습니다." 이처럼
박태준을 비롯한 우수한 엘리트 장교들이 박정희를 존경하고 따를 만큼 그만의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그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박정희는 당시 군 내에서 청렴성과 지도력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박정희는 예술적 감각도 탁월했다. 특히 미술과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그는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의 가사를 직접 썼고
작곡도 했다. 시적 감각도 풍부하여 그의 일기에 모인 시만 모아도 작은 시집이 하나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독서였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 이순신이나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관심과 독서 경향은 그의 인격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정희의 우수한 학업성적과 만주, 일본, 미국에서의 체험, 그리고 근대화된 한국군에서의 경험, 나아가
예술적인 감각과 내면화된 독서와 사색을 통하여 체득된 지식, 판단력, 감수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신념은 융합되어 통찰력,
조직력, 실천력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그만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주었다.
Part 3 시대를 읽는 눈 - 상황을 판단하고 진단하라
변화의 시대에 리더가 현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상황판단이란
당면한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단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하면 세상을 판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상황판단은 구성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행동으로 옮기는 출발점이 된다. 리더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상황판단을 잘못하면 나라 전체가 쇠락의 길로 추락한다.
그러면 박정희는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단하였을까?
1961년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뒤를 이은 장면 정부는 출발은
의욕적이었으나 민주당 내부의 신파와 구파 대립으로 표류하였다. 경제상황은 더 심각했다. 당시 한국은 100만이 넘는 농촌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상에게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이 와중에도 진보세력의 성장, 국가 재건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
군부 내의 정군 운동 등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몸부림은 계속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박정희는 민간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도 아닌 군인이지만 정치적 문제의 근본이 경제라는 점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제발전, 민주주의, 조국통일이라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과제 중에서 무엇보다 경제발전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1961년 4월 7일 당시 대구 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은 서울 명동 강상욱 중령의 집에서 젊은 장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다. 여기서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혁명지휘부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김종필에게 맡겼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날짜를 5월 16일로 변경하였다. 5월 14일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와 김종필이 가져온 혁명공약과 포고령 등의 문안을
검토하고, 부하들과 함께 주요 시설 점거 계획과 정부요인 체포 계획을 논의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들은 제 1한강교를 건너 서울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제 1 한강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혁명군의 도강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박정희는 총알이 날아오는 데도 고개를 들고 혁명군의 제 일선에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갔다.
박정희는 당시의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드러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실의와 좌절, 굶주림과 허탈,
원망을 가득 찬 저 군상들을 어찌한다 말인가! 우리도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신부터 뜯어고치고 사회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를 확 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개혁! 정치 개혁!" 강을 건넌 혁명군은
중앙청, 시청, 의회 등 정부 주요 시설을 접수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연금되거나 체포되었다. 혁명군은 남산 KBS를 점령하고
혁명공약을 방송했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내용의 혁명공약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세상은 5.16 혁명군의 편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의 목표는 잘 사는 국가의
건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굶지 않고 하루에 밥 세끼 먹을 수 있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Part 4. 가난을 몰아낸 리더십 - 비전, 가치, 전략, 과제를 제시하라
리더십 실행원리 4. 비전 -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자
비전이란 조직이 미래에 가고자 하는 모습이다. 달리 표현하면 목적지라 할 수 있다. 이는 지도자의 몫이다. 리더가 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선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정희가 '나라님도 가난 구제는 못 한다'는 우리 민족의 오랜 체념을 씻어
내기 위해 국민에게 제시한 비전은 조국 근대화였다. 이 비전은 대한민국의 미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 속에서 역사적이고 체험적인 통찰력으로 당대의 민족적, 민중적 집합의지를 꿰뚫어 보았고 가난의
근절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았다. 5.16혁명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1백 달러가 안 되는 전형적인 후진 농업 국가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집권 직후 조국 근대화를 국가 최고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국가 미래와 연결시키는 정치적 비전으로
삼았다. 그의 조국 근대화에 대한 집념은 정치 이념을 넘어선 하나의 종교요 희망이었다. 그는 지도층에게는 민족중흥이라는 비전으로
가난을 일상으로 삼았던 서민에게는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으로 격려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배고픔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이러한 미전은 미래의 모습을 그리기 충분했고 매력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모델을 어디서 찾았을까? 그것은 일본이었다. 그는 일본 육사라는 엘리트 코스 교육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단기간에 강력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 것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꾸준히 실천하면서 '하면 된다.' '잘 살아보자.'고 호소하고 국민의 단결을 고무시켰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에 조국이 반드시 근대화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대화의 신앙에 의해 우리의 조국은 통일될
것이고 기필코 복지국가의 건설은 이룩되고 말 것이다."
리더십 실행원리 5. 가치 - 부지런하고 스스로하고 서로 서로 돕자
가치(Value)란 구성원의 마음가짐이다. 때로는 윤리, 도덕으로 표현된다. 가치는 영혼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없는
조직은 영속할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가치를 장려하고 신장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치는 조직이 가고자 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인 버팀목이다. 지도자는 조직이 보다 도덕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가 지도자는
국민이 간직해야 할 가치를 시대에 맞게 장려할 책임이 있다. 박정희는 정권 초기부터 이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장려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제시한 가치는 근면, 자조, 협동이었다. 즉 부지런하고 스스로 하고 서로 서로 돕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는 조국 근대화, 즉 잘 살아보세 라는 비전을 중심으로 국민들을 결집시켰고, 한데 어우러져 성공을 위한 행동의 기초가
되었다.
박정희는 국민적 합의와 참여 속에서 국민적 에너지가 불타지 않는 한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민
의식 속에 잠재된 패배의식을 타파하고 자신감으로 개조하는 정신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국민적 합의와 참여, 그리고 자신감을 일깨워 준 일대 정신개조 운동이었다.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조국 근대화의
행동철학이자 조국 근대화의 통일을 지향하는 범국민적 일대 약진운동이라고 밝혔다. 새마을 운동이 박정희 시대의 확고한 가치로서
자리매김하면서 '빨리 빨리', '끝없는 도전',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민족' 등 이렇게 한국 국민성을 대표하는 언어들이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새마을 운동은 행동철학이다. 여기에는 실천과 행동이 따라야 한다.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다."라며 근면을 강조했다.
또한 "자기 능력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찾고 생산에 기여하는 창조적인 활동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인간사회"라고 강조하였다. 박정희는 한민족이 항상 강대국에 의존하여 살아왔다며 '스스로'를 강조했고, "한 민족이
개인적으로는 우수하지만 단결심이 부족하다"며 '서로서로 돕자'고 강조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근면, 자조, 협동 이라는 국민적
가치를 제시하고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를 확산, 전파하는데 뛰어난 자질을 발휘한 지도자였다.
리더십 실행원리 6. 전략 -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하자
전략은 비전을 이루는 술(術)이다. 비전과 가치 그리고 과제를 연결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사명이 '무엇' 에,
비전이 '어디' 에, 가치가 '왜'라는 질문이라면 전략은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전략은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경영전략, 인생 전략 등 이제 전략이 아닌 것이 없다. 지도자는 전략을 채택하여
구성원들에게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많은 정신적 헌신을 쏟아 부어야 한다.
박정희는 전략의 중요성을 아는 지도자였다. 그는 조국 근대화라는 비전 달성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장기 전략을 수립하여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했다. 또한 1960년대 수출주도전략, 1970년대 중화학 공업화 전략이라는 중기 전략을 채택하여 강력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핵심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 활용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내어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냈다.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 장하준은 그의 저서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박정희가 이룬 성공 요인을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시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수출을 확대해야 외화를 벌 수 있고, 그 외화로 고급
기술을 도입해야 경제를 고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철저히 시장을 이용했다."
1960~19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끌어간 경제총수를 보면 박정희는 총사령관 역할을 하고, 부총리 겸 경제장관이 실무를 담당했다.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태완선, 남덕우, 신현확 등이다. 이들이 개발 시대에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힘은 박정희가 부여한 신임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발탁된 경제부총리에게 전권을 주었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이
중에서도 장기영과 김학렬 부총리는 이 전권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었다.
장기영이 부총리로 취임한 1964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9.6%로 살인적이었다. 그는 취임 즉시 불도저처럼 달려들어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경제부처부터 장악한 뒤 국회, 은행, 민간 기업은 물론 식당과 다방까지 쥐고 흔들어 물가 상승에 제동을
걸었다. 치솟던 물가는 그의 위세 앞에 눌려 떨어졌다. 물가를 안정시킨 그는 다양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환율 현실화와 금리 현실화를
적극 옹호했다. 그는 일단 소신대로 밀어 붙이고 후에 생겨나는 후유증은 그것대로 치유해 나가는 방식을 채택했다. 박정희는 그의
열정을 높이 평가해 그를 모함하고 견제하는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했다.
김학렬 부총리는 제1회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였다. 1960년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의 건설 추진이었고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경제 최고 책임자로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그 유명한 '수출 100억 달러, 국민소득 1000 달러' 캐치 프레이즈를 담았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 경제를 이끌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다 49세의 나이에 암으로 쓰러진 박정희의 1급 경제 참모였다. 그의 사후에 빈소를 찾은 박정희는 "내가 김
부총리를 너무 혹사시켰어"라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리더십 실행원리 7. 과제 - 경중완급을 가려서 하자
과제란 비전과 가치 그리고 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지도자는 경중완급과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과제를 선정, 추진해야
한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근면, 자조, 협동 이라는 가치를 장려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수출
제일주의, 중공업화라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한일협정, 월남파병, 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립 등 수 많은
과제를 식별하여 추진하였다. 그는 자원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외로 뛰었고 인재를 구하기 위해 삼고초려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가장 절실한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가 정치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에 군을 파병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한일협정은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자유당, 민주당 정권으로 이어지는 10년 동안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당시 상황에서는 식민지 피해 청산의 부채를 갖고 있던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일본과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하면서
한일회담의 최대 분수령이었던 청구권 문제를 타결 지었다. 과거 청산 없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데 대해 정치적 저항이 많았지만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박정희는 나라가 유엔의 원조로 근근히 연명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1965년 젊은이들을 월남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전투수당, 경제원조,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에 충당하였으며, 대미수출
증가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으로 인한 이익도 상당액에 달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 대미 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 수입은 9억 달러에 달했다.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에서 받아낸 돈이 6억 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 전략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이었다. 한국은 파병으로 인해
5400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고,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Part 5. 행동 - 과감하게 실행에 옮겨라
행동의 시작은 패러다임에서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지 못한다면 리더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고,
조직 역시 성장과 발전을 모색할 수 없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와 교사생활에서 보인 그의 우울한 삶, 전 근대적인 삶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살게 한 패러다임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박정희가 안정된 교사직을 포기하고 만주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흔치 않은 행로였다. 당시 일본군은 엘리트주의를 넘어 독립적
성격을 갖는 독자조직이라 자부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잇단 승리로 위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때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핵심조직으로 군대를 바라보았다. 만주 군관학교 2년과 일본 육사 2년의 경험은 박정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 주었다. 국가를 디자인할 수 있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군대에 대한 신념과 군 조직의 효율적인 메커니즘, 만주에서의
일본군대와 일본 재벌의 군산복합 시스템을 경험한 박정희는 삶의 목표를 분명히 했고, 과거의 방황과 고독을 완전히 씻어내었다.
5·16 이후 경제개발계획과 중화학공업 프로젝트의 실행은 만주에서의 체험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박정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군인이요, 군인이기 이전에 교육자였다. 사회의 첫출발을 교사로 시작했던 그는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렇다 할 부존자원 없이 뒤늦게 근대화를 표방했던 박정희는 다른 나라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 인적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또한 박정희는 스스로 24시간 학습하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신속하게 받아들이고 능숙하게 활용했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고속도로에 관한 기술을 익혔고, 김완희 박사에게 반도체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1965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 월남 파병의 대가로 뭔가 선물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박정희는 인재를
키우는 연구기관 설립을 제시했다. 그 결과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는 KIST 연구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고 한 달에 한 번 연구소를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KIST는 그
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전자통신 연구원 등 20개 가까운 전문 연구소를 배출하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맏형 역할을 했다.
KIST는 설립 초기에는 국가적 연구 과제를 입안하는 브레인의 역할도 하였다. 이어 포항제철 설립, 통신 현대화, 자동차 공업 등
굵직한 프로젝트 및 각종 첨단 기술 개발의 해결사로 나서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Part 6. 한강의 미러클 - 성장의 그늘을 걷어내라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박정희에게도 한계는 존재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한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가
이룩한 고도성장의 문제점도 나타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업부문과 농업부문 등 불균형을 가져왔으며 부와 권력이 편중되고 소득격차가
심하여 계층 간의 거리감이 커지는 등의 부작용과 함께 비민주화, 비인간화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박정희가 간직했던 꿈과 최고 지도자로서의 고뇌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재야인사인 백기완이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식민지 생활의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고자 절치부심했던 박정희의 가슴을 한 번쯤 생각해 봤더냐?"라는 울림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박경리 여사가 "생명과 생존이 가장 중요한 명제이고 정치와 예술은 두 번째"라며 생명과 생존이 없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공허할 뿐이라고 한 말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박정희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마지막 페이지를
보자.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일부 상류층의 사치나 특권층의 권력 남용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의
청렴성은 그 자신과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또한 그는 국가적인 빈곤과 가난을 타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속성장을
추구하면서도 서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살피려고 한 대통령이었다.
나라 만들기는 장기적인 과정이다. 서구의 산업화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불과 20년 만에 이를 해 내었다. 그러니 부작용도
있을 수밖에 없다. 각 시대는 각각 담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박정희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박정희는 국정
우선순위를 경제발전, 민주주의, 조국통일에 두고 몸부림쳤다.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에 열정과 헌신을 포함하여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역량의 한계이든 대한민국의 운명이든 그에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세 가지 모두를 요구하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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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만주에서 무정 장군과 김두봉, 김일성 등이 민족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일왕의 신하가 되어 민족을 배신하는 민족반역자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박정희는 남로당 빨갱이로 변신했습니다...그러나 여순 반란 사건에 뒤이은 숙군 사업으로 발각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비겁하게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심지어 동지들의 이름까지 다 팔았습니다...동지들은 다 죽었고 자신만 살았습니다.
4.19가 일어나 비로소 민주 정권이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미국의 지시대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미국이 내다버리는 오염산업, 사양산업을 비싼 외화를 주고 도입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 마자 철도부터 개설한 것처럼 미국은 일본을 대신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게 되자 고속도로부터 만들어 한국 국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이 몰락했고, 농촌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서울과 부산의 대도시에는 수많은 판자촌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강산은 오염되었고,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살아가던 상부상조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운동을 탄압하여 노동자들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했습니다..
국민들 다수가 공돌이, 공순이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학생들은 학문의 자유가 발탁당했기 때문에 좌파와 관련된 서적은 일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당시에 공부했던 대학생들은 대부분 지적인 불구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의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 생겨나자 긴급조치법을 만들어 수많은 대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고, 수많은 간첩사건들을 조작하여 무고한 대학생들과 어민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독재와 잔인함에 있어서는 김정일과 박정희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박정희는 김일성에 대한 북한인민들의 엄청난 지지에 비해 남한 국민들로부터 너무나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김정일처럼 잔인하게 독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있었을 뿐입니다.
http://blog.daum.net/lwk0219/2268
님의 부모님들은 대대로 남의집 일이나 해주고,,아니면 소작쟁이...아니면 빌어먹는 천민이었죠?
님의 두뇌수준 ,,,정신연령을 보면 님의 조상들이 어찌 살아왔다는 그 티가 팍팍 나요.
그런사람들은 일생동안 뒤에서 남의 시비만하며...똑똑한척하고 살아가는게 매우 특징적이거든요.
꼭 님이 그런 유형의 인간의 전형적 스타일이시거든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상은 그들이 바라는대로 전혀 안굴러 가거든요.
왠지 알어요?
님같은분들 뜻대로라면 아직도 남한땅에 포장도로 없이 광화문 앞 도로에고 소달구지가ㅣ 굴러 다녀야... 민족의 정이 흐르고... 국왕에게 충성스런 백성들이 살고... 그런시대를 의미하거든요....
이보세요.
친일분자 뒤 캐려면 이나라를 당신같은사람들이 바라는 미개한 나라로 만들고 쇄국정책으로 거지의 나라로 만들었던 조선왕조들부터 비난해야 옳지 않을가요?
어디서 농촌버러지같은 천한 가문의 자식을 먹고 입고 살걱정 없이 만들어주니까..이제와서는 친일파 잡아죽이자구요?
님...이보세요.
자기부모를 일본놈들에게 죄다 잃은 김일성이도 북한 국가건설만은 일본사람들에게서 공부하고 충성스레 일하던 그 친일파들을 데리고 실현시켰다는걸 명심하세요.
그리고 무식한주제에 주절거려서 몸값떨구지 마시고 탈북자님들에게서 좀 배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