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북송·탈북·북송… 다섯 번째 탈북에 성공 ‘돈’이면 다 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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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크면 삼키기가 어려워요. 한 번에 500위안 정도? 지폐를 돌돌 말아 최대한 작게 만든 다음에 비닐로 꽁꽁 묶어야 합니다. 그걸 갖고 있다가 중국 공안에게 잡히면 바로 삼켜버립니다. 그 돈은 내 생명줄이니까요. 그게 있어야 북송된 다음에도 다시 탈북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탈북과 북송을 네 차례나 겪으면서도 자유를 찾아 다시 국경을 넘었던 한송화(55)·조진혜(25)씨 모녀. 한씨 가족의 탈북 과정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한씨 가족은 지난 2008년 중국에서 제3국을 거치지 않고 곧장 미국으로 추방된 1호 탈북자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지난 4월 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고 언론과 첫 인터뷰를 가졌다. 탈북 5년 만이다. 지난 4월 29일 서울 광화문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조진혜씨는 “처음에 공항에 내려 한국 땅을 밟으니까 속이 막 울렁거렸다. 한국에 오다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 한씨와 두 딸은 베이징올림픽이 열린 지난 2008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당시는 세계의 이목이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을 때였고 한씨 가족의 추방을 요청한 미국과 유엔난민기구(UNHCR)의 요구를 중국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제3국을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간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탈북자 가족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미국 시민권자이면서 북·중 국경지역에서 탈북자들을 돕고 있던 윤요한(미국명 필립 벅) 목사와 한송화씨 가족이 처음 만난 건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10살과 6살 된 두 딸을 데리고 탈북한 한씨는 중국 연변, 다롄, 베이징, 칭다오 등 중국 각지를 돌며 숨어 살았다.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품고 브로커들과 접촉하던 때였다. 그러나 한씨 가족이 한국행을 감행하기 전 정보가 유출되면서 공안에 잡히고 말았다. 2002년경에는 주중 한국대사관으로 뛰어들다가 실패해 북송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기도 했다. 국내에 이 소식이 전해져 당시 언론에 크게 소개된 적도 있다. 네 차례나 반복된 탈북과 북송. 그때마다 한씨 가족은 임기응변식 기지를 발휘하거나 돈으로 보위부 직원을 매수해 목숨을 건졌다. 첫 번째 북송 때는 식량을 구하러 갔을 뿐 탈북이 아니라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에는 대량 탈북이 벌어지고 있던 때라 단속이 비교적 느슨했고 훈방조치 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 북송 때는 상황이 달랐다. “북한 보위부나 안전부 직원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포섭이 됩니다. 주중 한국대사관에 뛰어들다가 중국 공안에 잡혔을 때는 1000위안 정도 돈을 갖고 있었어요. 100위안을 종이 쪼가리처럼 접어서 별도로 숨기고 500위안, 400위안을 각각 나눠 비닐에 싼 걸 잡히자마자 삼켰습니다. 단둥에서 신의주로 북송되고 나서 우선 두 딸에게 우리는 이제 남남이라고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집 주소만 가르쳐 주고요. 아이들은 어려서 구호소로 들어갔고 나는 다시 안전부에 인계돼 기차를 타고 고향 무산으로 향했죠. 그런데 운 좋게도 괜찮은 지도원을 만났습니다. 신의주에서 무산까지 보름 동안 기차를 타야 하는데, 보위부나 안전부 요원들 먹을거리가 부족해요. 어차피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얼른 100위안을 꺼내 줬어요. 그랬더니 쌀과 김치를 사 오더군요. 그 덕분에 보름간 이동하며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씨는 정말 운이 좋았다. 고향인 함경북도 무산군에 도착했을 때 만난 보위부 직원은 한씨가 풀려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작성해줬다. 탈북자들은 보위부 지도원이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바뀔 수 있다.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펜대’(고위 지도원)를 잘 만나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음식을 조금씩 먹으며 버텼습니다. 그래야 내가 삼킨 돈을 뱃속에 계속 둘 수 있거든요. 화장실에 가면 비닐에 싼 돈이 나오고 그걸 들키면 빼앗길 게 뻔하잖아요. 무산에서 펜대 굴리는 요원을 잘 만났어요. 저를 좋게 봐줬거든요. 그들은 나를 풀어주는 대신 돈을 챙겼죠. 나중에 돈을 빼 일부를 건넸어요. 일부는 숨겼습니다. 그때 같이 끌려왔던 세 명 중 한 명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한씨는 “보위부 요원들도 인간”이라고 했다. “지도원들은 사실을 얘기하라면서 때리고 신문해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비밀을 지키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야 돈을 받아먹어도 나중에 탈이 없죠. 거짓말을 잘 섞어서 얘기하고 입을 무겁게 해야 살아납니다. 풀려나서 집에 가보니까 구호소로 갔던 딸들이 다행히도 집에 와 있더군요.” 한씨 가족은 세 번째 탈북을 감행했다. 2002년 이번에도 무산에서 두만강을 넘었다. 몇 차례 탈북을 하다 보면 북한에서는 공민증도 사라진다. 북한 내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해당자가 죽거나 탈북한 것으로 간주하고 관련 서류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한씨 가족이 네 차례나 북송됐음에도 기적처럼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전산화가 안 된 북한에서 인적 자료를 확인하기가 어렵고 거짓말을 가려내기 어려운 낡은 행정 체계 때문이다. 한씨는 평양 등 북한 내륙지역에서 탈북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이유에 대해 “북한 특유의 감시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산화된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감시하고 신고하는 체제를 말하는 것. “우리 구역 사람이 아니면 계속 미행을 하고 감시합니다. 그런 사람이 국경을 넘으려고 하면 반드시 꼬리가 잡히고 말죠. 외곽 지역 사람들이 평양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평양 사람들이 국경지역으로 나오기 어려운 이유예요. 평양 사람들은 금방 구별이 돼요.” 한씨 가족은 네 번째로 북송되기 직전 윤요한 목사를 도와 몽골 등지에 숨어 지내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윤 목사가 몽골에서 탈북자를 칭다오로 보내면 중국어에 능숙한 한씨 딸들이 중국인 흉내를 내며 이들을 한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씨 가족은 한국으로 입국하려고 할 때마다 정보가 새나가 브로커에게 돈을 뺏기고 북송되는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브로커들이 가진 문제점을 체험한 뒤부터 윤 목사와 직접 탈북자를 돕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8년 윤 목사와 함께 탈북자의 제3국행을 돕던 한씨 가족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 한씨 가족은 이때 1년5개월간 도문변방구류소에 수감돼 지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북송됐다. “중국으로 탈북하고 나서 나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교회 선교사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10살 전후였던 딸아이들을 윤 목사가 예쁘게 봐주셨어요. 네 번째 북송이 된 직후 윤 목사님은 우리 가족이 죽을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북·중 무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1만달러를 주고 곳곳에 사람들을 포섭해 우리 가족을 다시 데리고 나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큰돈을 썼기 때문에 한 달 만에 다시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씨는 “똑똑하고 거짓말을 잘하면 네 번이나 북송이 돼도 살아남을 수 있다. 약간의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요즘 북한 국경지역 보위부 지도원들은 1~2년 주기로 교체되고 있다. 돈을 받고 탈북자 처벌을 무마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북한 당국은 오래된 지도원을 젊은 지도원으로 교체하고 수시로 근무지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지도원들은 오히려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짐에 따라 탈북자에 대한 봐주기 수사가 더 빈번해지고 있다고 한다. 다섯 번째 탈북에서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한씨 가족의 탈북을 도운 보위부와 안전부 직원들이 모두 북한 당국에 잡혀갔고 한씨 가족에 대한 체포령까지 내려졌다. 중국 지역으로 한씨 가족의 사진이 뿌려졌고 이 가족을 잡으려고 북한 요원들이 중국을 헤집고 다녔다. 그때 한씨 가족은 다시 윤 목사의 도움으로 유엔난민기구를 알게 돼 그곳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1년간 보호를 받으며 탈북자를 돕는 일을 했다. 한씨 가족이 처음 탈북을 결심한 건 순전히 먹을 게 없어서였다. 배고픔을 겪지 않는 자유로운 땅으로의 탈출이었다. “중국에서 숨어 지낼 때 미국은 나이가 들어도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저는 예술을 좋아하는데, 그런 걸 할 수 있는 꿈을 꾸며 살다가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됐어요. 요즘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지만 두 딸은 이제 영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한씨는 지금도 중국 내에 8만명가량의 탈북자가 숨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조진혜씨는 “아는 친구만 6명이 중국에 있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북한을 떠나올 때 무산 지역 주민이 크게 줄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면서 “배급 열차의 차량 길이도 줄었다. 한 집에 자식이 다섯이라면 셋은 중국에 있고 그중 한 명은 한국이나 제3국에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등 외곽 지역은 2004년 이후 새 집을 짓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빈집이 워낙 많아 새 집을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 한씨는 “2002년에 우리가 무산에서 나올 때 4층 건물 중 3~4층은 다 비어 있었다. 외딴 곳에 있는 집은 거의 다 비어 있다. 집 지을 자리가 없어서 묘지를 밀어내던 과거와는 완전히 딴판”이라고 했다. 한씨 가족이 국경 지역 주민들과 통화를 해본 결과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북송된 탈북자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 지은 5개의 교화소(감옥)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지 오래됐다고 한다. 조진혜씨는 현재 재미탈북연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재미탈북연대는 탈북자들이 미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다. “미국에는 하나원 같은 게 없잖아요.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요. 우리 가족도 처음에 힘들었습니다. 새로 정착하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목사, 변호사, 의사 등이 힘을 모으기로 한 겁니다. 지금도 미국으로 오고 싶어하는 탈북자는 많아요.” 미국에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정착한 150여명을 포함해 총 500여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다. 한씨 가족은 조만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미국 영주권자인 이들은 영주권 서류에 ‘North Korea’라는 단어를 빨리 지우고 싶다고 했다. 한씨는 “내가 한국에서 생활해보지 않아서 여기 사정을 잘 모르지만 미국은 차별이 없다. 또 지원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돼 있다. 만약 다른 탈북자에게 한국과 미국 둘 중에 어느 곳을 추천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미국을 권하겠다”고 말했다. 한씨는 한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 등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2003년까지만 해도 중국에 나가 돈을 벌어오던 북한 주민의 지위가 높았어요. 국경을 넘다가 잡히거나 ‘007’ 영화 DVD를 보다가 잡혀도 풀려나기 쉬웠죠. 그런데 식량과 돈이 지원되면서 북한 체제가 더 공고해졌어요. 앞으로 10년간 지원을 끊는다면 (북한은) 망할 겁니다.” 한씨 모녀는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 북한자유주간(공동대회장 조명철 의원, 수잔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 박선영 전 의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올해로 10회를 맞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는 북한인권 보호와 납북자 송환 등 북한 문제를 다루는 행사다. 1~6회는 미국에서 열렸고 7회 때부터 한국에서 개최되고 있다. 한씨 모녀는 한국에서 북한자유주간 행사가 열린 이후 처음으로 참석한 미국 정착 탈북자다.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 촬영을 위해 광화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저기가 청와대란 말입니까? 한국 땅을 밟고 서 있는 것도 신기하고 서울을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두 사람은 2013년 4월 말 서울 한복판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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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워낙 다인종 다문화 사회이다보니 .우리처럼 이상한 눈의로 보는 시선은 적을지 몰라도 인종 차별은 여전히 존재함 사회적 직위도 ...백인/훅인/히스패닉/아시아인..순서 이고 (돈많고 잘살면 미국 주류에 편입해서 문제없이 살수는 있음 )
미국에 난민의로 가면 일단 8개월은 생활 보조금을 주ㅡ지만 그후로는 알아서 벌어 먹고 살면서 난민 심사 받고 영주권 얻어야함 .(한국 처럼 임대보증금이나..각종 자격 장려금이나 ..서울이아닌 지방에주거한다고 장려금 주거나 그런 혜택음 없음 ).....교교 까지는 무료 일지몰라도 대학 등록금은 세계에서 제일 비싼나라가 미국임(한국은 탈북자분들 대학 등록금이나 학비는 무료임 .물론 일정 학점이상 얻아야 계속 유지가 됨 )
의료비는 미국은 개인 보험 들지 않의면 사보험 들어야 하고 ..난민이나 불법 체류는 의료 보험이 불가능 하기에..맹장 수술이나 치과 치료하나 받아도 수백만원 수천 만원이 청구됨 ..그것도 우리 나라처럼 즉각 의사 만나고 즉시 치료 받을수 있는 시스템 아님 ..
사는곳이 돈많은 백인들 사는 중심가나 고급 주택에서는 치안 상황 좋지만 ..싼집이 몰려 있는 도시외곽이나 슬럼가 흑인 밀집 지역은 언제 총에 맞아죽거나 총든 강도 만나도 이상 하지 않는 동네임 .치안 불안함 ...
땅이 넓기에 공기좋고 집도크게 살수 있음 ..하지만 대중 교통은 우리나라처럼 조밀하거나 발달 하지않음 ..어디를 가든 (슈퍼를 가더라도 ) 땅큰 나라답게 자기차를 몰고 다녀야함
참,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반대 법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같은 실력을 가진 백인과 흑인이 있다면 흑인이 좋은 대학 갈 확률이 더 높습니다. 기준 점수 자체가 다릅니다. 물론 아시아인은 백인과 비슷한 스탠다드로 평가하죠.
그리고 주류사회 얘기를 하는데요. 한인들이 주류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정계나 학계에서 ....이전에 다트머스대학(아이비리그 중 하나) 총장하다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박사(아버님이 평남 남포출신)님라든가...어떤분은 주지사 출마했던 분도 있고...근데 정계 진출에서 약한 것은 한인의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투표수로 판가름 나는데 백인이 같은 백인을 찍지 않고 아시안을 찍어줄 확률이 적으니까요....근데 꼭 정계로 나가야 주류사회로 나가는 것인가요? 그리고 꼭 주류사회에 나가야 살만한 것은 아닙니다. 주류사회로 나가자면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많고 도네이션도 많이 해야하고 사는 것이 별로 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은 풀만먹다 가서 피둥피둥해지냐??? 또라이 무식한새키는 답이 없네.
미국은 밀(wheat) 농사를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먹는다.
중국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조선족이, 중국의 베이징대, 칭화대보다 더 좋은 한국의 명문대 졸업한 사람을 가르치려 들다니. 분수를 좀 알거라.
정말고생많았어요
탈북자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사시는 모습 보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