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각, 평양생각] 찜질 방에서 만난 탈북 여성의 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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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애 2008-06-02 며칠전 저는 저녁을 먹고, 한동네에 사는 친구와 찜질방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큰 불가마 안에 들어가 한참 땀을 흘리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원래 호기심이 많고 사교성이 좋은 저는 슬쩍 옆으로 다가가 우리와 같은 처지인 탈북자가 아닌가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습니다. 찜질방에서 만난 고향 사람이라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 친구의 고향은 회령이었고, 나이는 우리보다 어렸기 때문에 쉽게 ‘언니’ ‘동생’ 하며 산전수전 겪은 이야기를 서로서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생은 가정에서 세 오빠를 두고, 막내 외동딸로 태어나 오빠들 짬에 끼어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시기에 두 오빠가 굶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병으로 죽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죽은 오빠의 배는 텅 비어 말라 붙어있었다고 했습니다. 두 아들이 굶어서 결국엔 죽기까지 한 것을 목격한 그의 아버지는 한창 필 나이에 피지 못하고 시들어져 가는 어린 딸마저 죽을까 두려워 딸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두만강을 건넜답니다. 원래 아버지 고향이 중국이라 아버지는 심양에 있는 사촌 누이 집으로 갔었답니다. 아버지는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면서 사촌 누이에게 딸을 팔아 달라고 했지만, 사촌 누이는 중국 돈 1000 위안을 아버지에게 조카를 가정 보모로 두고 자기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했었답니다. 거의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는데 내용이 이러했다고 했습니다. “당에서는 인순이 네가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오면 관대히 용서를 해 주겠다고 하니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고모는 조카를 자기 집에 그냥 두면 해가 미친다고 생각해서 조카 인순이를 멀리 산동성으로 시집을 보냈답니다. 이렇게 해서 인순이는 산동성 한족 신랑에게 다시 팔려가게 되었답니다. 비록 남은 가족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딸자식을 자기 사촌 누이 집에 팔았지만, 세월이 흘러 딸에 대한 그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였기에 당 조직에 제 발로 찾아가 그동안의 사정이야기를 하고 북한 당국에서 무조건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습니다. 인순이는 3년 전에 이곳 남한에 온 뒤 열심히 돈을 모아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작년에는 심양 고모님 댁을 방문한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나이 70살이 다 돼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 때문에 그립고 그리운 딸을 뒤에 둔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 갑자기 심양에 있는 고모님한테서 어머님이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은 뒤, 어머님에 대한 애통한 마음 때문에 울고 또 울다가, 무거운 몸을 조금 풀어볼까 해서 찜질방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인순이의 사연은 우리 탈북자들에게 그리 특별할 게 없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누구나 다 가슴 속에 말 못할 원한과 아픈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분단된 조국이 하나가 되고 조국 통일이 되기 전에는 마음의 아픈 상처들이 결코 아물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귀하게 키워주신 사랑하는 부모님이 사망했어도, 가고 싶어도 고향에 갈 수가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우리 탈북자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오늘도 수 많은 탈북자들이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이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등 제 3국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따스한 보금자리와 자유의 빛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그들도 이곳 자유로운 남한으로 오게 될 그날을 기원하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출처: 자유아시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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