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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김필재] 붉은 용, 中공산당 대학살 연대기
Korea, Republic o lovekorea 0 318 2008-08-24 20:48:11
붉은 용, 中공산당 대학살 연대기
中공산당,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 탱크로 밀어버려
프리존(金泌材)


"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이며 무참한 결말이다"(스튜어트 슈람·Stuart R. Schram, 하버드 대학 교수)

12명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여 년 만에 거대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국가처럼 이들도 분열되거나 와해될 것이라는 예측을 벗어나 12억 중국인들을 억압하며 50년 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통치 기반을 다진 인물이 바로 모택동이다.

1949년 봄 모택동은 지금까지의 중국혁명은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비(非)정통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도시가 지방을 이끌어가는 정통노선을 걷게 되리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성립을 선언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는 新 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新 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모택동 “경제 뒤떨어지고 가난할수록 혁명 한다” 주장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공사’결과 도시와 농촌에 식량부족 사태 발생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약진운동’으로 굶어죽은 사람만 3,000~4,300만 명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黨 지도부 파괴 위해 ‘문화대혁명’ 일으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 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홍위병,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 집에 난입 폭행과 살인 저질러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 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일례로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金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 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 외교부 점거 후 해외 중국 대사관에 혁명 선전·공산주의 선동

중국 문제에 정통한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 커다란 침대 위에서 10대 소녀들과 섹스 즐겨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 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당원만 300만 명 숙청)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모택동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정리/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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