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김정일 살인착취강도만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기독인은 懲戒(징계) 받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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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의 경계를 듣는 자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북한이 '개성공단 폐쇄' 카드를 대놓고 흔들며 대남 압박에 나섰다. 그동안 "개성공단에서 나가라"는 표현은 한번도 안 썼지만 15일에는 자신들이 제시할 공단 운영 조건을 무조건 받지 않으면 "개성공단에서 나가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라고 조선 닷컴은 보도했다. 이에 대해 세평은 두 가지로 보는 듯하다. 그 중에 하나가 이명박 정부 흔들어 길들이기라고 하는데 있다. 이명박 정부를 흔드는 것은 길들이기라고 하는 것에서 우리는 깊은 우려를 공감한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의 優柔不斷(우유부단)한 대북대응이 결국은 저들의 눈에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나님의 눈을 가진 자들이 그 안에 없는 것은 아닌가 한다. 개성공단을 폐쇄하면 약 1조 4천 또는 몇 조의 손해가 발생한다느니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를 예수 이름으로 기름부어 주시면서 그 과정상으로 훈련을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길들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이것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를 이기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적들의 손에서, 2.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의 손에서 생명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우리 후손을 지키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reproof of life~"(생명의 경계)는 하나님의 책망 하나님의 질책 하나님의 꾸지람 하나님의 간섭의 의미가 들어 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예수님처럼 희생적으로 공급하고, 하나님 앞에 흠과 티가 없이 드러나도록 준비시키는 사랑에 의해 비롯되는 생명의 경계 곧 사랑을 따라 사는 것에 길들이는 훈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충동에 의해 북한인권의 저 처절함을 방치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일부 교회들의 북한인권 방치는 저들이 김대중과 김정일과 관계를 한 변절에 기인한다. 그게 아니라면 저들이 아가페가 아닌 모조적이고 기복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자들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직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는 훈련을 통과한 자들이어야 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는 것,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 부족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3.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일의 완숙도를 높이는 능숙함 skilful (in technical work)을 갖게 되기에 수혜자 입장에서 만족함이 극대화된다. 이는 이웃사랑의 기본이다. 김정일과 김대중에게 길들임을 받는 대한민국이 된다면 살인착취의 밥으로 숙성되는 것이고, 또는 김정일의 살인착취의 의도를 달성하는 도구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그것을 거부하려면 하나님의 지혜에 길들임을 받는 은혜를 예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길들임 받은 자들은 사람을 섬기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만족도를 높일 때 만족한 성과를 얻게 된다. 自畵自讚(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아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일에 하나님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을 공유하도록 예수의 기름부음을 통해 은총을 내려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완전함을 공유하도록 초대를 받아 그 안으로 들어간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실천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神의 훈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의 reproof(警戒)적인 것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割禮(할례)의 내용 중에 하나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란 우리 몸을 통해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데 능숙하게 훈련하는 것과 하나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데 익숙한 몸으로 만드심에 있다. 문제는 인간의 理性이 하나님의 모든 본질을 인지할 수 없기에 그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몸에 지시하여 행동할 수가 없는 무능에 빠져 있기에 그것에 순종이 가능하도록 능력을 갖는 것이 필요하고, 아울러 인간은 하나님께 통제받기를 싫어하는 반역적인 불순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치료해야 한다. 그런 무지 무능 불순종을 다 제거해주시는 은총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서 직선으로 나오도록 길을 여신다는 의미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나와서 인간을 섬기는 일에 능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힘에 의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꾸며지는 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reproof적인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익숙하도록 훈련되게 한다는 취지 안에서 존재한다. 물론 그런 취지는 하나님과 함께 사랑 또는 짝 또는 동역하는 동업자 친구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천국의 안주인의 자리로서의 조건부(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계약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가장 이상적 동거를 위한 훈련을 의미한다. 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짝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만드신 인간을 예수님처럼 사랑을 하는 인간으로 만드신다. 진정한 기독인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곧 생명을 지키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영생이 되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생명이 된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기독인은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된다.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며 북한인권의 그 참혹한 유린을 보고도 침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전력투구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주고 성령을 주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보시고도 그냥 버려두는 그들은 때문에 사생자라고 한다. [히브리서 11:5-11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6.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이다. bastard라고 영역된 의미는 사생자, 서자, 잡종, 모조품 또는 혼혈아까지 포함하는데, 헬라原語로『nothos (noth'-os)』인데, 이 안에는 기름부음을 벗어난 違法의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을 무시하는 非合法의 私生兒 庶子(서자)라고 하고 또는 예수의 지배를 거부하는 불법화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랑으로 교체하는 불합리적인 것을 私生兒(사생아)로 宣告(선고)하는 것을 담아내는 illegitimate와 혼합된 기독교의 토착화된 기독교를 말하는 잡종(hybrid) 혼혈을 담아낸 bastard과 겉은 기독교와 유사하난 근본적으로 다른 선천적인 개별적 하나인 one born(유사기독교)과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것,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를 따라가는 not in lawful wedlock에서 나온 자식과, 하갈과 이스마엘의 율법의 자식들 곧 인간의 妾(첩)이나 內緣(내연)의 but of a concubine or 또는 인간의 힘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을 고집하는 것 곧 여종을 통해 낳은 자식 female slave을 담고 있다. 특히 모조품은 기름부음이 아닌 바리새적인 것에 있다. 7.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인간 안에 들어와서 기름부음의 관계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 나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 그런 관계가 아닌 것은 모조품, 곧 다른 태생이 하나님의 아들을 빙자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생자이다. 때문에 사생자에게는 하나님의 reproof가 없다. 그런 사생자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북한인권의 저 참혹함을 외면하는 것이고 오히려 김정일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안에 예수가 사람 안에 거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런 아들들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신다. 그 아들들을 통해 아가페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영광을 위해, 부족한 흠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친히 징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런 사랑을 입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신다. 세상에서도 인물이 되려면 맹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영광을 받침하려면 얼마나 많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함이 reproof이다. 8. 히브리어원어로『towkechah (to-kay-khaw') and towkachath (to-kakh'-ath)』이고 그 속에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 하나가 rebuke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다른 것에 대한 책망, 질책, 비난, 징계 rebuke를 의미하는 징계란 하나님의 본질의 비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비침은 하나님의 본질과 비본질의 의미로,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나 서리게 되는 비본질의 것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게 한다. 함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불순종이 있다. 여기서 인간은 타협을 좋아한다. 그 타협을 막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질에 온전한 마음과 아들로서 순종하는 마음을 다해 참여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과 그것을 늘 유지시키는 생명의 경계의 훈련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이 그것을 가능케 하신다. 그다음에는 사랑을 행동하는 것에 矯正을 의미하는 correction이 있다. 이런 교정은 결국 연단이라는 감옥에 가두시고 생활과 환경으로 벌을 주시므로 얻어지는 교훈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의 선악과의 의미, 불순종의 결과를 통해 받아야 하는 고통과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의 貸借對照(대차대조)를 통해서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를 발견하게 하고, 거기서부터 순종으로 나가게 하는 것과 그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불필요한 것들을 단순교정과 정밀교정을 가능케 하신다. 9. 이런 것은 생활의 광야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간다는 시각의 교정도 포함된다. 그 다음은 reproof, 이는 하나님의 원칙이 제시되고 그것으로 경계선을 삼아 그 선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경외심을 갖게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모두다 결과적인 것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자기행동에 대한 미래를 예지하는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에서 警戒(경계)를 삼는 것과 警戒(경계)를 듣는 것과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警戒(경계)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자기행동에 대한 인과를 미리 내다보고, 그런 정보들이 마치도 분수처럼 솟구쳐서, 스스로 놀라 警戒(경계)를 삼게 하는 것이다. 그런 지혜를 받은 자들이 아니고는 결국 하나님이 警戒(경계)를 내려주셔야 한다는 것에 마치도 잠을 깨운다는 의미가 거기에 들어 있다. 잠을 깨운다는 것은 곧 그가 한 행동이나 영적인 상태가 결국은 어떤 결과로 귀결될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알게 되었다는 것, 곧 30촉의 전기 불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을 1000촉에서는 비교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함축한다. 때문에 전진의 의미로 퇴보를 막아내려는 의도가 거기에 있게 된다. 그 다음은 punishment인데 이는 형벌로 압축하는 것이 좋다. 10.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여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결과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장래의 소망을 만들어 가고 찾아가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경계이다. 앞의 연단이나 형벌의 차이는 대동소이한 면은 있으나 앞의 것은 훈련적인 측면이고, 뒤에 것은 형벌적인 측면을 부각해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훈련적인 측면이란, 하나님의 손으로 훈련을 시킨다는 것에서 연단과 인생의 각기 행한 일에 따라 고통을 받게 하려고 피조물에게 넘겨 형벌을 받게 함으로 교훈을 얻게 한다는 측면에서 차이를 말함이다. 그다음은 chastisement 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할 것이 없이 형벌아래 가두시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고려에 따라 연단을 통해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으로 채워갈 것인가? 아니면 형벌을 줄 것인가에 있고 그 형벌에는 모든 피조물이나 또는 특정 피조물과 그 환경인 인생막대기와 사람의 채찍으로 때리는 것( punishment)과 당사자의 몸에 체벌을 하는 것이 고려될 수 있다. 따라서 chastisement는 體罰로 함의된다 하겠다. 몸을 치는 것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거기에 있는데. 결국 이웃사랑을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나도록 하나님과 한 본질 한마음과 한뜻 한행동을 위한 시각 가치관 속성 개념 목적 행동통일을, 11. 이루고자 주시는 징계로 보는 argument, reproof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등급이나 직분의 위치나 서열의 위치변경을 하는 argument, impeachment적인 징계 reproof와. 일반적인 일상적인 간섭인 chiding을 담고 있다. 거듭 되새기는 말이지만 이런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이 히브리 원어『towkechah (to-kay-khaw') and towkachath (to-kakh'-ath) 』징계의 영역이다. 이런 것들은 저주로 망하는 것과는 절대 비교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여러 경계는 결국 회개를 전제로 한다면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국 망하는 것으로 나가게 된다. 때문에 생명의 경계라는 말씀으로 계시한다. 생명을 얻게 만드는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비록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도 자기 욕심에 끌려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사망으로 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듣는 자들은 지혜에 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람이 사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말씀이다. 지혜가 무엇을 목적하는지를 알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씀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 얻게 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늘 감사한 마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12.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지혜가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게 하는 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행하게 하는 지혜라고 하는 공간에 있다고 하는 의미로 번역된 abide는 머무르다, 체류하다, 살다[in, at]. 지속하다, 계속되다; 남다[in] .…을 감수하다의 히브리 원어는 『luwn (loon) or i liyn (leen) 』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게 하는 지혜의 공간에 조건적으로 하숙을 하다는 to lodge와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방해로부터 오는 모든 난관을 하나님의 힘으로 넘어서 오로지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게 하는 지혜에 머무르기 위한 정지를 하다. stop over와 모든 무지의 어둠은 하나님과 반대된 미움의 본질이다. 그 미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사랑을 통과한 pass the night와 아예 거기로 이사 가서 법적인 영주권 및 체류자격과 주소를 확보하고 체류하는 abide와 사랑을 완성하거나 또는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혜가 거하는 곳에 함께 살려는 체류연장이나 영주권과 주소를 법적으로 정착하려고 거기 체류하는 to abide와 사탄의 수많은 시험에서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기고 살아남아 거기에 남아있는 권리를 확보한 remain과 지혜의 공간에 휴식하는 이유를 삼고 하숙하는 이유를 삼는 것으로, 13. 하나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서 받는 경계를 달게 받고 그것으로 지혜의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을 인정받으려는 to cause to rest or lodge과 오로지 거주를 위해 집착하는 것인 to dwell인데 비록 하숙이라도 abide적인 기회라도 거기에 거하고자 하는 안타까움의 갈망,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징계를 불평과 넋두리를 통해 알아가려고 지혜와 속삭이는 것을 위해 그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to grumble(불평)과 complain(넋두리), murmur(속삭임)와 to grumble to complain을 통해 그 원인을 알고자 하는 이유들로 그곳에 거하고자 하는 집착적인 cause to(원인에) 담고 있다 그런 곳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다 다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듣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한다고 한다. 본문의 wise는 헬라어『chakam (khaw-kawm')』이고,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름부음을 받은 누구든지 머무는 사랑하기에 능하게 하는 wise와 또는 하나님의 지혜의 기름부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아 사는 이웃사랑에 능한 하나님의 사람들 wise(man)과 하나님의 재능과 모략의 신에 훈련되어 모든 선한 기술의 능숙함과 사랑의 기술이 능숙함인 skilful(in technical work)과 이웃사랑의 섬김의 행정에 능숙함 wise(in administration)와 빈틈없는, 약삭빠른 통찰력 있는, 예민한, 기민한 shrewd의 치밀한 사랑의 섬김과 솜씨가 뛰어난, 솜씨 있는, 교묘한(skillful). crafty인 14. 맛깔스럽고 하나님이 받음직한 이웃사랑의 섬김과 능력, 솜씨, 기량, 교묘함 cunning을 담고 있다. 특히 뱀의 새끼들의 교활한 것을 역이용하는 지혜로움 wily와 미묘한, 포착하기 어려운 것을 섬겨내는 사랑의 subtle과 博學多識(박학다식)한 learned인 이웃사랑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神의 훈련을 통해 받은 남자의 기민함의 레벨적인 등급적인 이웃사랑의 섬김의 shrewd class of men과 사려 깊은, 분별 있는, 현명한; 신중한, 조심성 있는 이웃 사랑의 지혜의 prudent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지혜의 사랑인 곧 하나님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는 wise(ethically and religiously)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혜는 인간을 살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곧 생명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고 김정일의 살인착취의 흐름을 이길 수가 없다. 대한민국을 살리려면 아가페적인 사랑의 행동들이 모두 일어나 북한주민의 인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이웃사랑적인 행동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와야 하고, 그 징계를 통해 이웃 사랑하는 길로 가게 된다. 악마의 자식 김정일의 살인착취를 침묵하는 교회는 변절자이거나 사생자이거나 기복신앙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의 눈을 뜬 자만이 아는 비밀의 場所(장소)로 우리 모두 같이 가는 길에 우선 북한주민을 구출하자고 강조한다. http://onlyjesusnara.com http://korea318.com 부제목: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사생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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