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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우리나라 전자 ... 그런데 댓글이 수십개가 넘는데 욕하는 댓글없더라 펌
Korea Republic of 증평리 0 255 2009-06-03 14:12:30
“박근혜 전 대표가 전자공학 전공한 건 아버지 뜻” [중앙일보] 박정희 전 대통령과 13년간 서신 주고받은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 논쟁중인 댓글 (49)
전자공업 열정 담은 박정희의 ‘현대판 어찰’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재미 과학자 김완희 전 컬럼비아대 교수가 나눴던 서신이 처음 공개됐다. 서울과 뉴욕을 오간 현대판 ‘어찰’이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신 103통의 주제는 ‘전자공업’이었다. 서신에 담긴 대통령의 전자공업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전자강국 코리아 도약의 원동력이 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맏딸 근혜양(앉은 두 사람)이 1976년 8월 11일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사이에 두고 김완희 박사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신. [김완희 박사 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과 13년간에 걸쳐 서신왕래를 한 김완희 박사는 " 이번 서신공개가 한국의 전자공업육성을 이끈 박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1967년 8월30일 대통령 요청으로 귀국해, 한국의 '전기기계공업'(당시엔 전자산업이란 말을 쓰지 않음) 현장을 나흘 간 둘러봤다. 이어 청와대에서 전자산업의 정의부터 선진 기술, 제품 동향, 각국의 육성책 등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2시간 동안 놀라운 집중력으로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게 전자산업 육성책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며 당시로선 거금인 20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막 태동하던 당시 한국 전자산업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시골 벌판에 벽돌로 대충 만든 공장에서 일제 라디오를 카피한 제품 등속을 만들고 있었다. 시멘트도 아닌 흙바닥에서 작업을 하는데, 부품이 바닥에 떨어지면 여공이 이를 집어 입으로 훅 한번 분 다음 옷자락에 닦아 끼워넣는 식이었다. 공장 가는 길도 좁은 농로가 대부분이어서 차를 타고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청와대에서 굳이 김 박사를 찾아 초청한 이유는 뭔가.

"청와대 브리핑 뒤 대통령이 일본 모토롤라 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하나가 20~30달러를 한답니다.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란 소리인데 우린 아직 면직물밖에 수출 못하니! 그건 철도 화물차로 날라도 몇 십만 달러밖에 안되는데!' 그것이 한국인으로서 세계 전자공학계에 이름이 제법 알려진 나를 찾은 계기였던 듯 하다."

-박 전 대통령의 첫 인상은.

"솔직히 별로였다. 작고 깡마르고 새까만 사람이 꽤나 무뚝뚝해 보였다. 헌데 막상 대화를 트고 나니 의외로 섬세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은 분이었다. 첫 식사를 같이 할 때 대통령은 내 밥숟가락 위에 손수 깻잎을 올려줬다. 작별인사를 하면서는 여비에 보태라며 2000달러가 든 봉투를 주었다. 상공부로부터 항공료만 겨우 지원받아 온 처지라 매우 고마웠다. 이듬해 3월 보고서 중간 보고차 서울에 갔는데 9일 머무는 동안 3번을 만났고 그 중 2번은 독대였다. 그러면서 그의 예리한 두뇌, 행동력, 사려 깊음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첫 편지를 받은 때는.

"1968년 4월27일이었다. 봉투며 누런색 편지지가 너무도 초라해 이것이 대통령의 친서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후 10여년 간 대통령의 편지를 몇 차례 더 받았다. 대사관이나 관료들을 통해 메모를 전달받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와 내 아내 사이에도 몇 차례 서신이 오갔다. 한국을 찾아 청와대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친필 사인을 한 누런 봉투에 얼마 간의 여비를 넣어 직접 건네주었다. 어쩌다 집무실에 달러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윗층 비서실까지 직접 뛰어올라가 돈을 구해오기도 했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로 통하는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가 1967년부터 79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서한을 보여주고 있다. 김 박사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한 103점을 2일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김성룡 기자]



-'인의 장막'에 둘러쌓여있던 대통령과 어떻게 그리 자주 독대할 수 있었나.

"정부와 기업들의 요청으로 잠시 서울에 나오면 청와대에서 '좀 들어오라'는 전갈이 불쑥 오곤 했다. 대통령은 오전 9시에 날 부르면 오후가 되도록 집무실에 그대로 앉혀두고 대화를 나누는 간간이 국정을 처리했다. 전자산업 얘기, 미국 정치 동향 등 이런저런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저녁 무렵 가보면 대통령은 불도 켜지 않은 집무실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한여름에도 좀체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전기가 아까워서였다. 구멍 난 양말도 아무렇지 않게 신을만큼 소탈했다. 한번은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에게 '왜 나는 (청와대에서) 무조건 통과냐'고 물었다. '김 박사님은 (정치적 의도로) '나쁜 짓'을 안하잖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전자산업 발전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에게 수많은 서신을 보냈다. 이것이 한국의 전자산업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보나.

"대통령에게 전자산업이란 무엇인가, 왜 중요한 가를 알려주는 구실을 얼마간 했다고 믿는다. 일종의 '세뇌'랄까."

-가까이서 본 박 전 대통령의 최고통치권자로서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나.

"그는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거기서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덕단지가 처음 만들어질 즈음 함께 시찰을 갔는데, 근처 언덕에 올라가선 아래를 내려보며 '난 여기를 세계적 전자단지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꿈, 원대한 희망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끌린 걸 게다."

-박 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해결했다. 뭐가 문제다 얘기하면 바로 벨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한번은 '미국에서 들어올 때면 국군의장대가 큰 칼로 아치를 만드는 환영식을 하는데 그게 외려 국가 이미지에 안 좋은 것 같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시정을 명했다. 그 다음 들어올 때 보니 정말 없어졌더라. 대통령은 관료들이, 이건 법 땜에 안 된다, 저건 관행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 법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며 속전속결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관료 손에 들어가면 도무지 안되는 일도 대통령 한마디면 일사천리였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대통령과 '직거래' 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물론 대통령이 그만큼 나를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자전람회 같은 데서 날 발견하면 대통령은 성큼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다정한 인삿말을 건네곤 했다. 내가 구두로건 서신으로건 뭔가 건의하면 즉시 상공부 관료들을 불러 실천을 지시했다. 관료들로선 몹시 불만스러운 일이었을 게다."

-1970년대 정부의 산업 진흥책에서 전자산업이 빠진채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짜여지게 된 원인이 뭔가.

"상공부로선 전자 얘기만 나오면 대통령이 '김 박사에겐 물어봤냐'고 하니 그 주제를 다루기가 귀찮고 싫었을 게다. 나로서도 전자산업을 명칭도 이상한 '중화학공업'의 하나로 끼워넣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요즘 생각엔, 당시 중화학공업 범주에 전자산업이 들어갔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전자산업 발전책에 대한 조언을 하며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관료들이 이 산업을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체신부 장관에게 그 중요성을 설명하면 '전화랑 전자산업이 무슨 상관이냐'는 답이 돌아올 정도였다. 전자산업은 건설·자동차처럼 눈에 금방 띄고 생색도 나는 업종이 아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높은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의 특성 자체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구인회 금성사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 수많은 기업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후락·김종필·김형욱·김종필 등 권력 실세들과도 만남이 잦았다. 누가 특히 기억에 남나.

"당시 대통령 중심의 청와대 인사들과 기업인들에겐 놀라운 열정과 애국심이 있었다. 재일 기업인들의 역할도 컸다. 구인회 회장은 결기가 대단했다. 이병철 회장은 매우 실질적이고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질문이 예리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없이 묻고 배웠다. 그런 자세에서 오히려 강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김 박사로 인해 서강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됐다는데.

"육영수 여사가 그리 전해줬다. 본인은 가사과에 보내고 싶었는데 박 전 대통령이 내 얘기를 하며 전자공학 전공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근혜 양은 훗날 퍼스트레이디로 일할 때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74년 육여사가 돌아가시자 박 전 대통령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청와대에 칩거하는 일이 잦았기에 나도 이전처럼 연락을 취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해서 대통령에 꼭 전할 말이나 서신이 있으면 의전실이 아닌 (근혜 양 쪽의) 부속실을 주로 통하게 됐다. 부속실 직원에 편지를 주면 30분도 안 돼 '근혜 양에게 전달했다'는 답이 오곤 했다. 근혜 양이 나(를 포함한 전자산업 분야)와 대통령 간의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전자공학을 공부한 근혜 양인 만큼 모르긴 몰라도 박 전 대통령이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조언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전람회 등에도 대통령 대신 참석해 기업인들을 격려해주곤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거듭된 권유에 따라 79년 콜롬비아대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귀국했다. 전자공업진흥회 상근회장으로서 의욕적으로 일했는데, 1년도 채 안돼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해 상심이 컸겠다.

"물론이다. 나는 미국 아이비리그 최초의 한국인 종신교수였다. 그런 자리를 박차고 귀국한 건 대통령을 도와 한국 전자산업을 발전시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서거하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진흥회 상근회장 자리부터 없어졌다. 그래도 뭔가 하고 싶어 전자시보(지금의 전자신문)를 어렵게 창간했다. 이 역시 대주주 간의 의견 차이로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84년 미국에 돌아가선 어떤 일을 했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정보기술(IT) 관련 조사와 기술 용역을 하는 TACI란 회사를 차려 2005년까지 운영했다. IBM·휴렛팩커드 등의 고문을 겸하며, 미국·일본의 첨단 기술업체를 한국 기업과 연결해주는 일종의 '기술 복덕방' 역할을 자임했다."

-70~80년대의 전자산업 진흥책이 밑거름이 돼 지금 한국은 세계적 IT강국이 됐다. 미래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무엇보다 정책 입안자들이 IT의 가치와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또 대체에너지 산업처럼 당장은 돈이 안되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지금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큰 힘도 오바마 정부의 강력한 그린IT 지원 정책이다."


대담=곽재원 본사 중앙종합연구원장
정리=이나리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김완희 박사는

▶ 1926년 경기도 화성군 출생, 경기중·서울대 공대 졸업

▶ 55년 미국 유타대 공학박사. ‘브루니 정리’의 예외 발견해 국제적 명성

▶ 57~79년 미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 67~79년 한국 정부 요청으로 전자공업 육성 진흥책 보고서 작성, 제 3·4차 전자공업 육성 5개년 계획 작성 보좌. KAIST·KIST 설립 지원

▶ 79~84년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직 내놓고 귀국, 전자공업진흥회 상근회장·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 등 역임

▶ 84년 전자시보(현 전자신문) 창간

▶ 84~2005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정보기술 시장조사, 컨설팅업체 TACI 설립·운영


재계도 관심 없던 전자, 여러 채널 통해 일찍 눈 떠
박정희와 전자산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 요체는 외화(달러) 부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수출=외화획득=경제발전’이란 도식은 정권의 경제헌법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당시 청와대에서 만든 ‘1980년대를 위한 공업입국 장기계획’에 잘 나타나 있다. 제1차 5개년 계획(62~66년) 기간 중에는 수입대체와 수출개시를 목표로 삼아 섬유·경공업화학에 힘을 실었다.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당시 전자공업은 라디오·전화기·수동교환기 생산이 고작이었다. 부품에선 저항기와 콘덴서 정도.

제2차 5개년 계획(67~71년) 중에는 수출기반 확충을 목표로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다지며 전자공업도 수출전략산업으로 위치시킨다. 흑백TV·자동교환기·녹음기·탁상용 전자계산기 및 이와 관련된 부품산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포항제철(종합제철)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종합연구소)의 탄생도 이때 모색된 것이다.

그러나 제3차 5개년 계획(72~76년)에 들어가면서 한·미 관계 악화와 미군 철수론이 나오자 박 대통령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경제는 취약한데 미국의 안보우산까지 사라진다면…. 이때 나온 정책이 오늘날까지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고 있는 중화학공업정책이다. 방위산업과 수출산업 육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것이었다.

73년 1월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 선언’을 한다. 금속공업을 중심으로 조선·기계·석유화학 등을 통해 경제강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였다. 전자공업 육성정책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부품 국산화와 구미공단 확장 등 일부 사업은 추진됐으나 결국 제4차 5개년 계획(77~81년)의 초기에 겨우 컴퓨터와 VTR·반도체에 손을 대게 된다.

박 대통령은 이 기간 중인 80년 ‘산업합리화와 에너지 및 자원절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산업구조개편을 할 참이었다. 79년 갑작스러운 서거로 이 계획은 무산된다. 김완희 박사의 서신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는 대통령이 60~70년대 정부부처나 경제계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던 전자공업에 일찍 눈을 떴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연구를 깊이 했다는 평가도 있고 학계와 연구계의 의견을 극히 개인적 채널로 다양하게 듣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김 박사는 가장 가까운 채널이면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 같다.

둘째는 전문가와 기업인들의 자문과 조언을 듣고 바로 실천했다는 점이다. 중화학공업정책이 기승을 떨치던 가운데서도 대통령은 전자공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79년 박 대통령의 서거는 전자공업 발전을 4~5년 더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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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과해(瞞天過海) 무중생유(無中生有) 암도진창(暗渡陳倉)이라. 딴청 海戰(해전) 눈가림 미사일 불꽃쇼에 속지 말라. 땅굴로 서해오島(도)를 공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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