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따르지 말고 따르게 하라 |
---|
더 이상 욕심은 버려야 하였다. 그녀가 나에게 준 1500원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머리털이 나와 처음 만져본다. 그 돈을 가지고 빚도 청산하고 밑천이 생겨 국내에서 장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혜산에 가서 밀수로 넘어 오는 중고 중국산 티브이를 싸게 받아 산간 오지인 백암이나 대홍단에 배로 받는 장사를 하였다. 등짐에 티브이를 쥐고 사나운 겨울 바람을 이고 기차 지붕위에서 떨며 단속을 피하며 고생을 하여도 이득이 남는 돈을 손에 쥐는 재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소변을 볼 때 제일 힘이 들다. 기차 지붕위에서 티브이를 메고 내려와서 보아야 하겠는데 수많은 인파 땜에 쉽지가 않다. 티브이를 지붕위에 그냥 놓으면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야밤에 도난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 그러니 전기가 오지 않아 두 세 시간씩 외딴 골짜기에 기차가 서있는 때를 이용하여 작은 일을 보군 하였다. 내가 그 아줌마와의 두 번째 만남은 그 다음해인 4월 중순이었다. 내가 주위 환경을 정리하고 시간을 얻어 중국에 도강하였는데 그 여자는 아직도 한국에 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물론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그녀 아빠의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그녀는 대단히 반가워하며 대련에 오라고 하여 그곳에 가서 그녀가 주는 돈 400원을 가지고 다시 북한에 갔고 10월에는 그녀의 남동생과 함께 중국에 갔는데 한국에 배를 타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돈 100원을 받고 다시 나오던 중 중국 길림성 화룡시 로가진에서 변방대의 매복에 걸려 체포, 그리고 북한으로 북송, 청진집결소까지 가게 되었다. 그녀는 우릴 구원하려고 변방대에 연관이 있다는 조선족에게 중국의 돈 만원을 보냈으나 조선족은 그 돈을 자기가 다 가지고 우리에게 200원만 주었다. 나는 중국 변방대 군인들에게 맞아 얻어터진 이마에 실로 꿰매고 반찬고로 붙였는데 100원을 그 속에 넣고 그녀의 남동생은 나머지 100원을 입으로 삼켰다. 무산군 보위부에서 몸수색은 그렇게 넘겨 100원을 건사하게 되었는데 그 100원이 큰일을 할 줄이야... 며칠이 지나 예심을 하기에 반탐과 사무실로 갔더니 강마른 소좌계급이 50대 아저씨가 욕을 퍼붓는다. 상처에 감춘 100원 주어야겠는데 옆에 사람이 있어 시간을 갖고 기다리다가 두 명이 사람이 다 나가고 그와 1:1 상담이 되자 나는 재빠르게 돈을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더니 그는 오른손으로 쥐고 주머니에 넣는다. 그 동작이 나보다 더 빠르다. 돈을 받자 그의 인상이 확 달라졌고 억양도 부드럽고 인간답게 대해준다. 나의 요구는 옆방에 있는 아줌마 남동생과 나의 진술문건을 간단하게 중국에 건너갔다 몇 시간 안에 잡힌 걸로 꾸며주며 병보석으로 석방시킨다면 북한 돈을 2만원을 주겠다고 하자 그는 병보석은 어렵다고 한다. 어찌됐든 문건이 나는 국경을 넘어 중국 도로로 걸어가다가 한 시간만에 잡혔고 그녀의 남동생은 혼자 다른 곳에서 한족의 집에서 나무를 패다가 잡힌 것으로 만들어 그 것이 간단하여 우리는 쉽게 군안전부로 이송, 그리고 청진집결소로 갔으며 그곳에서 남동생이 삼킨 돈은 집결소 소장에게 주어 약 한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나는 북한군에서 1년간 감옥살이로 위가 좋지 않은데다 집결소에 갔다오다나니 6개월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줌마 남동생도 같은 처지여서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자 혼자 중국에 건너가 아줌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하물며 동생이 체포되어 갔는데 동생 말을 더 믿지 나의 말을 믿겠는가? 나는 나의 본명과 가족에 대하여 사실대로 말하기가 어쩐지 거북스러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나도 사내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어느 사기군이나 똑같은 인간 같다. 그때 빈손으로 눈 덮힌 국경을 도강하는 나의 심정은 참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컨디션도 좋지 않는 몸으로 10여 미터 가서 쉬고 또 쉬고 그러기를 수십 번 하면서 내가 찾은 진리는 사람은 한 점의 티도 없이 마음을 주었을 때 상대방도 자기의 마음을 연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2003년 11월 나는 그녀의 동생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도강. 그 녀가 믿지 않으니 동생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옳을 것 같아 데리고 갔는데 동생은 누나와 통화하더니 자기는 한국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이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로자 한 푼 없어 화룡시의 아는 조선 족 집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우리를 인질로 잡고 누나에게서 중국 돈 오천원을 갈취하려고 하였다. 참 어리석은 조선족들이다. 나나 그녀의 남동생은 그래도 강철 같은 사나이들은 아니어도 최소한 북한군에서 단련된 제대군인들이며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너무 강경하게 나오니 그 곳에서 탈출하고 어느 산골의 마음 고운 조선 족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우리는 도문에 있는 외 사촌형네 집에 갔으며 그 곳에서 아줌마가 선을 놓은 곳으로 움직여 북경한국영사관진입 다음해 6월에는 하나원 퇴소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내가 지방의 어느 한 도시로 자리를 잡았는데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브로커에게 나를 한국에 데려오려고 자기 돈을 500만원 주었는데 그 것부터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집에 와서 집도 꾸려주고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나라는 인간이 이제는 그 아줌마에게 500만원밖에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왜서인지 서글퍼진다. 하긴 내가 자책한 일이니 누굴 원망해서도 안 되는 일. 나는 아줌마에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말하고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계좌로 500만원을 송금해주었다. 이렇게 쉽지 않은 나의 한국행은 그녀와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막을 내렸다. 아마 아줌마는 나를 만나 기쁜 일 슬픈 일을 많이 겪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도 믿었던 내가 기본적인 것마저 사기를 쳤고 동생의 체포, 그리고 국정원조사에서 내가 그녀와의 관계를 사실대로 말한 것이 아마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모양이다. 처음에는 국정원조사를 북한 보위부조사처럼 우습게 여기고 그녀와의 관계를 진술하지 않았는데 거짓말 탐지기 앞에서 감출수가 없어 사실 그대로 말하게 되었다. 사내가 그만한 비밀도 감수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대상 할 수가 있겠는가? 어찌됐던 나는 나의 한국행을 돌아 볼 때 그녀와의 만남과 인연을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그녀의 심장 속에 남는 인간이 되지 못하였지만 앞으로는 내가 더 열심히 사는 것이 그녀 앞에 떳떳히 나서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억제하였다. 그러는 나의 입에서는 절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인생은 끝난다지만 내 사랑이 끝나는 곳 어딘지 묻지를 마라 인생은 짧아도 사랑은 길고 긴 것 그대여 받아다오 나의 사랑을 번개처럼 번개처럼 왔다가 간다 하여도 그대에게 바친 삶은 그 삶은 아름다워라 순간을 살았어도 한 점의 빛을 남겨 그대에게 남기리라 사랑의 빛을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늘 건강하시고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근데 전부 중국돈인가요..? 대략 한국돈 얼마를 같이 써주시면 좋겠습니다..중국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보니..잘이해가 되지않습니다..
그리고 왜 몽골 베트남.태국 이런나라로 가는건가요..?
그냥 중국에서 윗글처럼 한국영사관들어가면 안되는건가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