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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1
Korea, Republic o 산노루 1 259 2009-09-29 14:07:24




초등학생 시절과 중학생 시절 교가의 가사 중에 각각 "소가야"와 "고자미동국"이란 단어가 있어 그것들이 어느 옛날 고성지역에 존재했었던 나라이름들임은 알 수 있었었다.

하지만 고교시절부터 국사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여태껏 "고자미동국"의 실체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았던 것은 본인의 노력부족 외에도 우리나라의 상고사 중 변한과 소가야에 대한 역사자료의 절대적 부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변명하고 싶다.

최근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여 변한사와 소가야사에 대한 몇가지 사료들을 접한 지금에도 일부의 의문점들만 해소되었을 뿐 새로운 궁금증들은 오히려 더욱 늘어나고 있어 안타까움은 없지 않으나 그 한편으로 고성의 역사를 내 손으로 파헤쳐 보고픈 도전의식 또한 북돋아 짐은 어쩌면 고성이 고향인 내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는 대표적으로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믿는 바 그 하나는 역사서들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통한 접근이 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유적과 유물 등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두가지 모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정통 역사서들로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와 그리고 조선시대의 사관(史官)들에 의해 의해 작성된 정사(正史)들을 들 수 있을 것이나 그 내용상 자기중심주의적 사고에 입각한 기록들이 적지 않은 듯 하다.

또한 등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들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기록들은 당시의 미비했던 정보유통체계와 중화중심주의를 고려할 때 그 내용의 사실성은 부분적으로 의심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물며 작위적 색채가 강한 등의 일본계 역사서들의 사실성은 덧붙여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본다.

또한 고고학의 경우에도 문제점이 적지 않으니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전문기관들에 의해 현재까지 이뤄진 대부분의 발굴작업들이 자금과 인력 등의 한계에 기인하여 극히 피동적이었으며 발굴된 유물들에 대한 연구 또한 소극적으로 이뤄졌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특정 지역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그 유물들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굴을 행한 대학 등의 기관들에 의해 제한적으로 보유되고 있는 현재의 매카니즘도 다소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유적지에 대한 정보가 극히 소수의 전문인력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 또한 점차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사안으로도 믿어진다.

더우기 근세에 들어 일제 치하에서 일본식 사관(史觀)에 입각한 역사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사학계를 지배해 온 실태는 실로 안타깝기까지 하다.
한 예로 한반도의 경우에는 구석기는 물론 신석기시대도 없었으며 청동기와 석기가 함께 사용된 금석병용기가 인류사적 시원(始源)이라고 주장한 일본식 역사관이었으니 굳이 임나일본부 등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본다.

또한 일제 당시 그들의 역사적 조작에 불리한 출토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백제계와 가야계 고분들에 대해서는 그 발굴작업을 끝내고도 해당 유적지와 유물들에 대한 연구조사의 결과발표도 생략한 채 그 엄청난 양의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한편 일방으로는 언론보도와 부실한 관리 등을 통해 도굴을 의도적으로 충동한 감도 없지 않았으니 그것은 일본의 역사적 만행이요 그 무렵 자신의 역사를 경시한 우리 민족의 비애임이 분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들 그리고 고고학적 연구성과들, 인류학, 언어역사학 등을 통해 엿보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편린들을 참작하여 고성의 인간사를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고성지역에 처음으로 인간의 발자국이 찍혀진 것은 언제였을까?


현재까지 그 역사적 사실이 소상히 규명된 바는 아직 없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할 경우 본인은 인류가 최초로 한반도 남단에 정착한 것은 쿠로시오해류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필리핀 부근 해역에서 발원하여 북상한 후 본류는 일본 아래를 지나며 태평양으로 흐르는 이 난류의 지류를 통해 일단의 폴리네시아계 남방인들이 뗏목 등을 이용하여 욕지도 등에 닿은 후 점차 고성지역으로 그 정착범위를 넓혀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석기를 사용하였을 그들은 그 후 만주방면에서 남하한 일단의 북방계 청동기세력에게 굴복한 후 점차 동화돼 갔을 것이며, 그 이후에는 삼한 중 변한의 하층민들로서 그 명맥을 이어갔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경남의 남서부에 위치했었던 변진 12-3개국들 중 상대적으로 그 세력이 강했던 김해의 구야국(가락국)과 고령의 대가야 그리고 함안의 안라국(아라가야) 등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사료들과 문헌적 기록들이 남아 있으나 현재까지도 고자미동국과 소가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3-4편의 학술적 논문만이 남겨져 있는 실정이며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자미동국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엇갈리고 있는 실정인 듯 하다.

특히 가야국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금관가야나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과 같은 이름들조차 를 저술한 고려시대의 일연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 지었던 이름에 불과하며 정작 당시의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은 몰랐으며 오히려 흔히 변한 12개국으로 지칭되는 각 소국 고유의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일부 사학자들의 지적에 대해서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의 실체에 보다 근접하기 위해서는 역사서들에 남겨진 기록들보다는 고성지역 일원에 남겨진 유적들과 출토된 유물들을 통한 이해가 보다 합리적일 것이란 생각도 가져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의 세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시(구 삼천포) 늑도의 고분군들과 조개무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 등이 최근에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점과 그곳이 기원전부터 중국과 왜, 한사군들 중 낙랑군, 대방군 등과 해로를 통해 국제적으로 교류하던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었다는 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지고 있는 점일 것인 바 향후에는 '고자미동국'에 대한 사학자들의 연구도 보다 활발해 질 것으로 기대해 보며 현재까지 파악된 자료들만을 활용해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의 실체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먼저 역사서들에 나타나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에 관련된 기록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에 대해 극히 간략하게나마 기술하고 있는 역사서들로는 3세기경에 쓰여진 중국의 동이전 변진조와 고려시대에 일연이 저술한 의 , 등이 있으며 김부식이 저술한 의 를 통해서도 가야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삼한시대의 개시 연대나 부족국들의 이름과 같은 것은 중국의 옛 역사서적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한무제(漢武帝 : BC 140∼87)때에 저술된 사기(史紀)와 후한 건초(後漢建初 : 76∼83)에 저술된 한서(漢書), 진(晋)나라의 진수(陣壽 : 233∼297)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에 편찬된 후한서(後漢書) 등의 고대 중국 정사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중국의 사서들에는 마한이 54개,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개의 부족국가들로 구성된 점과 그들 부족국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변한(弁韓)이라는 이름은 그곳 사람들이 머리에 끝이 뾰족한 고깔을 썼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일설도 전해진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서들에 언급되고 있는 변한 12개국은 후에 가야로 발전하는 여러 세력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성지역에 있었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외에 나머지 국가들로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밀양)과 접도국(接塗國, 칠원) ·고순시국(古淳是國, 창원) ·반로국(半路國, 하동군 악양면) ·군미국(軍彌國, 하동군 곤명면과 곤양면 일대)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고령군) ·감로국(甘路國, 개령) ·구야국(狗邪國, 김해) ·안야국(安邪國, 함안) ·독로국(瀆盧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악노국(樂奴國)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독로국은 동래(東萊)에 위치하였다는 설과 거제에 위치하였다는 설로 양분되고 있으며 주조마국(走漕馬國)과 악노국(樂奴國)의 위치에 대하여는 현재까지도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변진조(三國志 魏志 弁辰條)에는 상기 12개 소국을 열거하면서 ‘又有諸小別邑(그 외에도 다수의 작은 별읍들이 있음) ’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변한 당시 경남의 서남부지역에는 상기에 언급된 변한 12개국 이외에도 많은 부족국가나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국명이 언급된 소국들의 경우 큰 나라는 사오천호로 구성되고 작은 것은 육백호 내지 칠백호 정도였다고 하니 1호(가구)의 구성원이 평균 5인의 가족으로 구성된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당시 소국들의 국세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성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사항들을 감안할 경우 상기의 가구수는 변한 초기의 것으로 짐작되며 사학자들 중의 일부는 그 가구수가 변한이 한반도의 남단지역이 아닌 중국대륙에 위치할 당시의 수효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점도 참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삼한시대에 현재의 고성읍 기월리지역을 중심으로 고성군과 통영, 사천 등 그 일대에 존재하였던 소국의 명칭에 대해 중국의 위지 동이전에서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으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는 변진 즉, 변한에 속하는 고자미동국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소국에 대한 명칭으로 에서는 "고자국(古自國)" 또는 "고사포국(古史浦國)"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에서는 "구차(久嗟)", "고차(古嵯)"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이름들 모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에 대한 국가별, 시대별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참고로 '고사포국(古史浦國)'의 존재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고사포국을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과 동일시하는 분들과 당시 고성 주변지역에 있었던 별도의 소국으로 보는 분들 그리고 진해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 해석하는 분들 등으로 사학자들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규명된 바 없으나 의 일부 기록을 참작하여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기록에서는 B.C 194년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유민(遺民)들 중 일부가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하여 세운 나라가 변한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진조에 그 소국에 대한 기록이 남은 점과 한반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참작할 경우에도 그 건국시기가 기원 전일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또한 에 기록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에 대한 탄생설화를 확대하여 해석할 경우 기원 전에 건국된 이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은 가락국의 건국시기인 서기 42년경에 새로운 이주민세력에 의해 지배체제가 변화되거나 아예 국호가 '소가야'나 '고자국' 등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비교적 쉽게 추정할 수 있기도 하다.

참고로 소가야 건국시기의 추정적 근거가 되는 에 기록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에 대한 탄생설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서기 42년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반나절 만에 이 알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금관가야국의 왕이 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사학자들이 소가야 혹은 고자국의 건국시기를 서기 42년 무렵으로 보는 것은 상기 구전설화의 내용 중 "이 알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구전설화에 대해 역사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점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심한 거부감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나 본인의 생각으로는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구전설화들 속에 역사적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암시들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먼저 단군신화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곰의 이야기들을 대하며 그 비과학성에 쉽게들 웃고 있지만 과연 그 웅녀의 존재가 허구이기만 한 것일까?

단언하건데 토테미즘을 감안할 경우 그것은 어느 역사적 기록보다도 더 사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옛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과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살고 있던 고조선의 배경이 된 지역(그 지역은 한반도보다 북쪽일 수도 있을 것이다.)에 선진문화를 가진 단군세력이 도래하였고 그 지배를 두고 호랑이 숭배부족은 반발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곰 숭배부족은 순종하였는 바 그 곰 숭배부족의 존재가 웅녀로 묘사된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여기에서 그럼 당시의 그 지배권전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이는 호랑이 숭배부족은 어디로 갔는가고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여부는 언어학자들과 사학자들의 몫이 될 것이나 현재 그들의 흔적들로 추정되는 것들은 세계 각 대륙에서 발견되고 있다.

먼저 에스키모인들의 언어와 풍습에는 우리와의 유사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어 그 부족의 후예들이 그곳으로 이주해 갔으며 또 그 일파는 좀 더 남하하여 인디안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됨은 거의 통설에 가까운 듯 하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 숭배부족이나 곰 숭배부족 중 일파가 캄차카반도를 지나 베링해를 건넜었고 에스키모인이 되어 그곳에 정착한 그들의 일부는 다시 어느 훗날 남하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호랑이 숭배부족이나 곰 숭배부족 중 일파가 베링해쪽으로만 이동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적지 않다.

수년전 독일의 텔레비젼에서는 기원 후 3세기 경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가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 간 훈족이 바로 우리네 한민족의 일파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바라보았던 신라의 기마인물형 토기를 보면 그 말의 잔등 뒤에 우리에겐 역사적으로 낯설기만 한 솥단지 하나가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그것은 바로 세계적으로 훈족과 우리 신라의 유물에서만 발견되는 공통된 유물특징이기도 하며 그것은 병력의 장거리 이동시 보급에 필수적인 도구였을 것으로도 믿어진다.

더불어 우리네 여인들의 장신구에 사용된 일부 고유 문양 또한 그 훈족과만 일치하고 있다.

한편 현재 세계적 역사학자들은 고타마 싯다르타를 배출한 인도의 석가족 또한 우리네 한민족 일파임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본인은 수삼년 전 알타이 공화국에서 발견된 수천년 전 여성 미이라 사진을 보곤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비록 그 여성의 피부는 백인에 가까웠으나 그 용모와 복색은 바로 우리네 고유 여성복색과 흡사했으며 그 용모 또한 다름 없었던 연유이다.

우리 역사규명에 있어 오류를 조장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단일 민족이며 역사적으로 단일 언어만 사용해 왔다는 점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인종과 언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따로 기회를 갖기로 하고 여기선 고자미동국 자체의 역사에 대해서만 조망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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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샌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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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샌드맨 2009-09-30 13:24:21
    산노루님/

    정말 귀한 글을 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고자미동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글을 올려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고되고 신경쓰이는 일인지를 아는지라 차마 부탁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런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고향이 고성이십니까?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기쁨과 뿌듯함이 얼마나 클 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저는 서울태생이라 '고향'이란 단어에 대한 감흥이 그리 크지 않고, 그 점이 참 아쉽습니다.

    대단히 고생스러운 작업인 줄 알지만, 이어지는 내용도 볼 수 있으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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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노루 2009-09-30 19:17:58
    ^^*변한과 가야가 우리의 역사 중 일부이긴 하지만 고자미동국과 소가야라면 한 지역의 역사이기에 이런 곳에 올리기엔 좀 부적당하게 여겨졌습니다만 예전에 써둔 것들여서 그 일부분을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지 역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아닌 정리 정도인 글에 관심 주신 샌드맨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고자미동국에 관한 뒷부분의 글도 제 블로그와 다음의 일부 카페에 소개된 바가 있었으나 이곳에는 추후 적절한 시기를 보아 게재함이 좋을 성 싶으니 그 점을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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