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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장 할머니와 보위부원들
Korea, Republic o 자유민 2 382 2009-10-07 14:05:57
※ 참고
보안원(경찰), 보안서(경찰서), 파출소(분주소),20여년전에는 안전원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보안원이라 함.
보위부원(국가정보원)

청진 역전에서 인곡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낙타봉이 있다.여기에는 6.25전쟁때 죽은 쏘련(러시아)군 묘지가 있다.그 산 아래에 보위부 건물이 길게 크게 들어서 있어 길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다.

1. 새벽에 떼거지로 몰려와 잡아가는 날강도 보위부원들

나는 함북도 리원군 학사대리에서 살았는데 바닷가를 끼고 있는 시골마을이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쪽 바로 옆의 산에는 군사기지여서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민간인이 엄격히 출입하는 지역이다.

어느날 새벽 나는 00부대에서 근무를 마치고 마김치가 되어 느적느적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화물 트럭 1대와 지프 여러대가 빵빵 거리며 전 속력으로 달려가다 화가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마을 주민들 고작 세워봐야 10댓집이나 되어 어느 집인지 대뜸 알 수 있었다.

그 집은 화가의 집이었다.평양미대를 졸업하고 요양소에서 일하는 화가였는데,그는 대단히 학식도 높고 그림도 아주 잘 그리는 유명한 사람이었다.만나보지 못했지만 아주 착실하고 그의 자녀들도 아주 똑똑하다고 들었다.잠시 몸이 아파 몇 년간 여기에서 살다가 평양으로 올라간다고 들었다.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부모가 늦어 집에 늦게 들어오면 그 사람은 그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밥도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대해주자 마을사람들은 그를 아주 좋아하고 스스럼 없이 대했다.

또 손재주가 좋아 무엇이든 잘 고쳐 주었다.전기가 나가 그 사람만 부르면 불이 잘 들어왔고,수도가 막혀 물이 나오지 않아 또 그 사람을 부르면 바로 물이 콸콸 흘러 나왔다.집도 잘 고치고 아이들도 잘 봐주고 하여튼 마을에서는 그 사람을 가리켜 교수 또는 박사로 통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화가가 사는 옆 집 아이가 너무 배가 고파 밤마다 울어대자 자기 부인을 시켜 사정을 알아보게 한후 자신도 어려운 속에서도 어디서 구했는지 강냉이 쌀 25되를 구해 그 집에 주었다.그 집은 화가 때문에 겨우 배고품을 면했고 덕분에 1년동안 풀죽을 쑤어 먹으며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참으로 고마운 사람이고 너무나 착하고 순진했다.
이 외에 화가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일일이 쓰자면 책 3m터도 넘을 것이다.아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화가와 그 가족들을 미워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를 “오빠시”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마을의 평화는 모두 깨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한마디로 마을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었다.그는 바로 도 보위부에 다니는 반탐과 보위부원이었는데,얼마나 처먹었는지 살에 기름끼가 붙어 늘 반질 거렸고 그 네편네 또한 거들먹 거리는 꼴은 꼭 만화영화에 나오는 악독한 지주와 네편네 같이 보였다.

오빠시는 마을에서 늘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착한 일 하는 화가에게 늘 인상을 쓰면서 어떻게 하든지 시비를 걸어 마을에서 쫗아 내려고 하였지만 워낙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아 마을 사람들 눈치 때문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나도 이 오빠시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집집마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어느날 불쑥 이 오빠시와 그 네편네가 우리집에 들이 닥쳐서는 위생검열임네 하고 하얀 손수건으로 초상화 윗 부분을 쓱 문질러대고는 조금이라도 먼지가 나면 생 트집을 잡고 소리 지르고 난리 법석을 떠들기도 한다.그럴때면 우리는 간이 콩알만 해져서 혹시 아오지 탄광으로 잡혀가지나 않을까 가슴이 쿵쾅 거릴때가 한두번 아니었다.마을 사람들은 모여앉아 웃고 떠들며 이야기 하다가도,오빠시와 네편네 그 자식들이 나타나면 이야기 하다가도 모두 흩어져 소리없이 숨어 버리곤 했다.

아마 나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 생각 또한 나와 같았을 것이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화가를 어떻게 하면 트집을 잡아 마을에서 쫓아 버릴까 오빠시는 계속 머리를 굴렸을 것으로 보이는데,역시 나의 생각은 100퍼센트 들어 맞았다.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화가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어느날 술을 마시다가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경제 사정으로 인해 입쌀 한알 구경하기 힘들고 배고품과 헐벗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지못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때라 화가는 친구에게 “지금 너무 살기 힘드니 깊은 산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가족들 배불리 먹여야 하겠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하는데 술에 잔뜩 취한 화가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것을 친구가 오빠시라는 보위부원에게 다른 말로 고발했다 한다.“지금 북조선이 너무 살이 힘드니까 배를 타고 남조선으로 넘어가서 가족들 배불리 먹이며 살고싶다.”라고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내어 화가를 정치 범죄자,반역자로 몰아 부쳤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날 새벽녘에 이런 난리를 쳤던 것이다.
자동보총으로 무장한 보위부원 10여명이 트럭에서 내리더니 화가의 집을 포위하고 짚차에서 내린 오빠시를 비롯한 또 한무리의 보위부원들이 우르르 내렸다.그리고는 화가의 집 문을 구둣발로 부수고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화가를 양팔로 묶어 밖으로 끌어 내었다.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각구목과 구둣발로 사정없이 내리패기 시작했다.화가는 찍소리 못하고 맞기만 했는데 자세히 보니 입에 검은 천으로 막아 놓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나무가 부러지도록 맞던 화가는 그대로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화가의 부인은 보위부원들을 붙잡고 울며불며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고 물었고, 자식들도 너무 놀라 엄마를 따라 울기 시작했다.조용하던 마을이 갑자기 시끄러워지자 마을 사람들 하나둘 화가의 집으로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빠시는 화가의 집에서 천연색 텔레비죤과 녹음기 등 휘귀한 물건들을 총을 들고 서 있는 보위원들에게 들게 하고는 바로 위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다.그것은 화가가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에게 받은 선물들이었다.오빠시는 화가의 집에서 값지고 휘귀한 좋은것들만 골라 큰 보자기에 쌓아 놓았다.

오빠시는 인민반장을 부르더니 지금 빨리 강냉이 주먹밥을 만들라 하고는 가재도구 등 물건들을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마사지던(깨지다) 말던 아랑곳 없이 있는대로 집어들더니 마구 트럭에 던지는 것이었다.여기저기서 쨍그렁 쨍그렁 하며 그릇이 깨지는 소리,부딪히는 소리가 한참동안 울렸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볔이 다가왔다.인민반장이 해온 강냉이 주먹밥 세 덩이를 들고는 보위부원들에게 빨리 차에 타고 가자고 재촉했다.보위부원들은 쓰러진 화가를 두명이서 질질 끌다시피 짚차에 싣고는 먼저 떠났다.곧이어 트럭에 실려진 아내와 자녀들이 실려 어디론가 떠나갔다.

훗날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화가는 함흥역 근처에서 화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아오지 탄광으로 영원히 추방당했다고 한다

그날 밤 화가의 집에 도적이 들어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가져가 적막만이 감돌았다.며칠이 지난 후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오빠시와 유독 친하게 지냈다는 것만 알뿐 누구인지 왜 그 집에 들어와 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와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후 오빠시를 만나면 슬슬 피하기 일쑤이고 아이들도 무서워 감히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그로부터 1년후 나도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집을 팔고 학사대리를 떠나야 했다.집 판 돈으로 청진에 들어가 살려고 밤에 몰래 마을을 떠났다.며칠 몇밤을 걷고 또 걸어서 겨우 함흥역전에 도착했다.객차를 모는 철도 기관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청진까지 빵통을 타고 가기로 했다.함흥에서 청진까지 20일이 걸렸다.얼마나 느릿느릿 가는지 기차는 가다가 멈추고 하는데 한번 멈추면 2일이고 3일이고 앞날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역전마다 다행히 음식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어 돈으로 음식이나 물을 구해 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겨우 청진역에 도착했으나 청진역전의 풍경을 보고 까무라치는줄 알았다.여기저기에는 꽃제비들이 모여 있고 쓰러져 죽은 사람들과 뒤엉켜 장사하는 사람 등 마치 피난가는 행렬 같아 보였다.그런가 하면 보위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패거나 잡아서 트럭에 싣고는 가 버리고,정말 살려고 왔는데 내가 살던 동네보다 더 못하였다.

역전동에 있는 어느 집 창고를 얻어 림시로 우리는 살았다.나는 산이나 들로 다니며 풀을 뜯었고 바다에 가서는 미역과 섭(홍합)을 뜯어 겨우 하루하루 풀칠을 하면서 죽지못해 살았다.어느날 인민반장이 수상한 사람이 살고 있다고 신소를 하여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화가와 똑같이 보위부원에게 끌려나가 구타를 당하며 보위부로 끌려가게 되었다.

2. 새벽에 떼거지로 몰려와 잡아가는 화가와 똑같이 당하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보위부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다.그런데 그날 새볔에 무지막지한 보위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보위부에 끌려가게 되었다.겨우 정신을 차린 나에게 보위부원들은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이었다.머뭇 거리는 나에게 옆에 서 있던 보위부원들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이어졌다.“왜 칩니까?(때린다).” “이 새끼가 어디다 대고 주둥이를 놀려? 응--” 하더니 말도 하기도 전에 또다시 여기저기서 몽둥이와 발길질이 이어졌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옷을 벗었다.보위부원들은 내 옷에서 금속물들을 모조리 뜯어내기 시작했다.무엇인가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그들이 시키는대로 말을 다 들었다.순식간에 다 뜯어지고 찢어진 옷을 다시 입자 나를 지하에 있는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야,간수 이 새끼 잘 지켜.남조선 사람하고 만난 반동놈의 새끼니까?” 순간 나는 머리가 뗑해지기 시작했다.“내가 언제 남조선 사람 만났지...” 인민반장이 떠올랐다.며칠 살지 않았지만 인민반장은 마을에서 소문만 악질중의 악질 할머니였다.자기에게 조금만 마음이 거슬리면 반동으로 몰아 툭하면 신소하고,뇌물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온갖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으로 보낸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누구하나 할머니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나도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하여 할머니의 눈 밖에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이별아닌 이별을 해야 했다.아내는 당시 심한 위장병을 앓고 있어 내가 없으면 당장 가족들이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7개월간의 예심 기간 내내 감방 생활은 짐승보다 못한 심한 하루하루였다.차라리 죽는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간수(계호원)는 툭하면 시비를 걸어 철창 문 밖으로 불러내고는 몽둥이와 쇠 꼬챙이로 사정없이 나를 내리치기도 했다.나는 얼굴을 땅 바닥에 대고 몸이 땅에 닿을 때가지 죽도록 맞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매일 고문실로 불려나가 죄없는 자백을 해야 했다.내가 어디서 왔으며 공민증이 왜 없는가,간첩이 아니냐며 없는 죄를 계속 묻기까지 했다.보위부원들은 큰 간첩이나 잡은 것처럼 들떠 있었다.매일같이 비행기 날기,물 먹이기 등 상상도 하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불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고문이 이어졌는데 보위부원들의 악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3. 있지도 않는 죄목을 만들어 고문하는 보위부원들

1. 남조선 특무기관의 사주를 받아 북조선에 들어와 간첩 활동을 하였다는 것.
2. 기독교를 전파 하였다는 것.
3. 탈북을 도와 주었다는 것.
4. 기타 알 수 없는 죄들...

인민반장 할머니가 나의 죄를 만들어 신소한 것들이다.나도 어렸을 때 할머니를 좋아하고 잘 따랐지만 이때만큼은 모든 할머니를 죽이고 싶었고 죽도록 싫었다.나는 길을 가다가도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들 보면 집까지 짐을 들어주고 하면서 얼마나 할머니들 잘 보살폈는지 모른다.하지만 이렇게 당하고 보니 북조선의 모든 할머니들이 나쁜 할머니,악하고 더러운 할머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다시는 도와주지 않으리라...
※ 지금까지도 할머니 생각하면 몸서리 친다.

나의 아내는 내가 잡혀간 후 아픈 몸을 이끌고 인민반 회의에 참석하여 있지도 않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보안원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또 받았다고 한다.인민반장 할머니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나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함 했다고 한다.그리고 살던 창고에서 쫓겨나 돈 한푼 없이 청진시내와 장마당을 오가며 꽃제비 생활로 연명하고 있었다.약 몇 개월간은 그래도 같이 다니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지만 나중엔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내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아내도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방에 있는 동안 나는 배가 고팠고,더욱 괴로운 것은 이와 빈대,벼룩의 공격에 그냥 참아야 했다.옷을 벗어 손으로 잡으려 하면 어느새 옷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과 벽의 틈새로 숨어 버린다.얼마나 빠른지 잡기가 만만치 않았다.물론 밤이 되면 다시 나의 몸 위로 기어 올랐다.

고문이 없는 날 취침 시간 외에는 무조건 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천장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으며 내가 갇혀 있는 곳은 변소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너무 오래 생활해 보니 변소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그리고 잡혀 있는 동안 옷을 그대로 입고 자고 하여 몸에서도 냄새가 풍겨 보위부원들이 인상을 쓰기도 했다.

보위부원들은 나의 신원 파악을 위해 함북도 리원군 학사대 오빠시를 만났으며 동네 사람들과 군부대 군인들과 면담까지 하여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에 아무 죄도 없는 생사람을 잡아 간첩으로 몰았다는 자기들의 실수 때문에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보위부원들은 상부에 나에 대한 거짓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그냥 간첩으로 몰아 죽일까 하지만 간첩일 경우 무조건 계급이 높은 보위부원들이 평양에서 내려와 데려가기 때문에 자신들의 거짓이 들통날 것이며,또 간첩이 아닌 생 사람을 잡아 그동안 고문하고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으니 사회에 나가면 이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 등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보위부원들은 나를 다른 감방으로 옮긴후 그날부터 농장일을 시키기 시작했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였지만 나는 살기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그러나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외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짐승 사료죽에 아기 손가락만한 배추 떡잎이 둥둥 떠다니는 소금국으로 일을 하자니 몸이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졌다.

나는 살기 위해서,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었다.직하협동농장에 동원되어 김매기를 할때도 이제 파릇파릇하게 자란 풀잎들을 보위부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입에 가져갔고,밥조개,민들레 등 식물이란 식물을 뜯어 먹었다.아무 풀이나 닥치는대로 먹다보니 나도 모르게 독풀까지 먹어 쓰러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면 나와 죄수들은 근처 임시로 마련된 창고에 들어가 잠을 자야 했다.밖은 죄수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보위부원들이 총을 들고 3교대로 보초를 서곤 했다.보위부원들은 AK-68소총과 실탄을 가득 채운 탄창 2개를 허리에 차고 있다가 도망치는 죄수가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쏴 죽이거나 잡아서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죽인다.

어느날 새벽에 창고에 들이닥친 보위부원 2명이 나를 총으로 위협하며 밖으로 끌어내더니 짚차에 짐짝처럼 무지막지하게 밀어넣고는 머리를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깨어난 곳은 칙칙한 썩은 물이 고여있는 감방 안이었다.며칠동안 보위부 사무실로 불려가 그동안 보위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사회에 나가 발설하지 않겠다는 손도장을 수없이 많이 찍어야 했다.그러면서 보위부원들은 나에게 그동안 일들에 대해 잘못했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사회에 나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발할(발설하다) 경우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준다고 협박을 하였다.

보위부 건물을 빠져나온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림시 거주하던 창고로 갔다.그런데 가족들은 보이지 않고 창고에는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돈을 내고 한참동안 살았다고 한다.나의 가족들에 대해 물어보니 모르겠다는 말분 전혀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친하진 않았지만 살 때 나에게 신세를 진 사람의 집에 찾아 갔더니 다행히 사람이 있었다.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행방조차 알 수 없는 내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서였다.내가 잡혀간 새벽부터 인민반장 할머니는 간첩의 자식이라고 핍박하고 온 동네방네 떠늘고 다녔으며 그 때문에 나의 자녀들은 다니던 학교도 쫓겨나야 했으며,치료를 받지 못한 아내는 병이 더 깊어져 나날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 누구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괜히 도와 주었다간 간첩의 누명을 쓰기 때문에 죽던 말던 상관을 할 수가 없었으며 인민반장 할머니가 나서서 다른 곳으로 추방해야 한다며 가재도구 하나 없이 나의 아내와 자식들을 멀리 역전으로 쫓아냈다는 것이다.그동안 당한 수모를 생각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나는 이야기를 듣다말고 부엌에 있던 도끼를 들고 인민반장 집으로 달려갔다.

인민반장 할머니는 내가 출소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문만 굳게 잠겨져 있었다.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인민반장 집 문을 부수고 신발을 신은채로 들어가니 방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넘쳐났다.천연색 텔레비죤 2대,라디오,일제 록음기,선풍기,일제 세탁기,일제 냉장고 등등 내가 처음 본 물건들이 있었느며 웃방에는 큰 독이 세 개 있었는데 열어보니 하얀 입쌀이 가득했다.방금전까지 할머니가 있었는지 뜨개질 하던 옷들과 사탕 물을 담은 사발 그릇들이 어지러히 널려 있었다.할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내가 무서워 도망친 것이다.나는 도끼로 천연색 텔레비죤부터 부시기 시작했다.그다음 냉장고,선풍기 쌀독 등 눈에 보이는 대로 부시고 또 때려 부셨다.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찬장과 가마솥 부실수 있는 것 모두 부시고 그 집을 뛰쳐 나와 산에 올라갔다.산에서 때를 기다리며 인민반장 할머니를 죽이고 그 아들과 며느리,손자,손녀들도 모두 죽인 후 나는 벼랑에 떨어져 죽으려고 결심했다.

인민반장 할머니 집에서 땡그랑,쨍그랑 하며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하나 신고하는 사람 없었다.오히려 깨 고소하다고 여겼던 동네 사람들은 내가 시원히 복수해 주었다고 다들 기뻐하였다.얼마나 악한 할머니였는지 그 할머니가 지나가기만 해도 모두 숨어 버리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일동안 밤과 낮을 물과 풀,아는 사람에게 얻은 강냉이로 연명하며 산에서 숨어서 인민반장 할머니를 기다렸지만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내 아내와 자녀들이 걱정되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나는 할수없이 복수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밤중에 청진 역전으로 나가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다.청진역전,반죽동에 있는 장마당 등 찾을 수 있는 모든 곳에 가서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훗날 꽃제비들로부터 나의 아내와 자녀들은 내가 출소하기만을 기다리며 같이 이리저리 다니며 살다가 뿔뿔히 흩어졌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또다시 울컥하여 인곡동에 있는 어느 한 집 창고에 들어가 도끼를 들고 인민반장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마침 집에 사람이 있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인민반장 할머니는 어디로 이사갔는지 자기 집은 다른 사람에게 팔고 더 좋고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알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혹시 인민반장 할머니와 친척이 아닌가 하고 따져 물어 보았지만 전혀 모른다고만 하였다.한눈에 봐도 할머니와 똑같이 닮은 아들 같은데 아니라고 우기니 별수없이 그 집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의 꽃제비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아내와 가족들을 찾기 위해 역전이란 역전,장마당이란 장마당을 모두 찾아 돌아 다녔다.청진 역전,반죽 역전,무산,온성,회령 심지어 신성천,함흥까지 가서 미친듯이 찾아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인민반장 할머니로 인해 나의 가족들은 생사를 알 수 없었다.나를 잡아간 보위부원부터 그 가족들 모두 복수하고 할머니 가족들까지 모두 복수하고 이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끼와 칼,밧줄을 구했다.먼저 할머니와 나를 체포한 보위부원을 잡아 밧줄로 묶은 후 죽이기 전 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잡았는지 그것을 따지기 위해서였다.할머니와 보위부원을 서로 대면시켜 말하게 한다면 어떻게 되어 내가 잡혀 갔는지 알 수 있지 않는가였다.지금까지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인민반장 할머니에게 뢰물을 주지 않아 그것이 발단이 되어 간첩으로 몰려 보위부에 신소를 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생각 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보위부원이 살고 있는 집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 옆에 있어 잡기가 쉽지 않았고 인민반장 할머니는 어디에 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밤에도 기회를 노려 보았지만 보위부원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것도 되지 않았다.이렇게 내가 허송세월을 보낸지 벌써 여러해가 흘러갔다.

4. 탈 출

“그래 이젠 떠나자.북조선에는 내가 살아가는 희망도,미래도 없다.가다가 죽더라도 북조선을 도망쳐야 한다.내가 잘되면 다시 와서 보위부 놈들과 인민반장 할머니와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말테다...”

나는 장마당에 가서 책과 원주필(볼펜)을 구해 보위부와 인민반장 할머니 앞으로 여러장 협박 편지를 썼다.그리고 그 편지를 그날밤 몰래 보위부원이 사는 집 웃방 문틈으로 집어 넣었다.인민반장 할머니 앞으로 보내는 편지는 동네 아는 사람에게 주면서 꼭 만나면 주라고 신신당부했다.

보위부원과 인민반장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협박 문구와 시퍼런 날이 선 도끼날과 칼,그리고 교수대가 그려진 그림도 그련 넣어 한층 공포를 더하였고 날자를 적은 후 나의 이름을 크게 적어 넣었다.아마 그 편지를 본 보위부원은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통쾌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그 길로 나는 청진역전에서 객차(화물차)를 타고 온성으로 갔다.그곳에서 나는 두달간 기회를 엿보다가 새벽에 강을 건너 중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중국에 오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중국 떼놈들은 말도 통하지 않았고 악질적인 조선족들이 많았지만,음식이 길거리에 넘쳐나고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그렇지만 중국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중국 도처에는 보위부의 연락원들이 숨어서 나와 같은 북조선 도망자들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지금도 나는 중국에서 도망자 신세로 숨어서 살고 있다.

내가 겪은 이 내용은 나에게 동정을 베푼 중국에 관광차 온 한국 사람에게 전해준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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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너구리 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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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진 2009-10-09 23:02:51
    참으로 기가막히는일이군요 빨리 한국으로 오세요 눈물이저절로 나오는군요 나도 탈북하여 중국거쳐 한국왓는데 도와주고 싶구만-- 아무쪼록몸건강하고 성공하길 빌겟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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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들이 얼마나 웃긴줄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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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 위 67%가 전공노에 가입한 것은 김정일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