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후지모토 켄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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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등 전세계 위성방송 자주 시청,‘야간연회’땐 한국가요도 불러” 외부기고자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1990년 3월 20일 결혼 뒤 부인과 함께 김정일을 만나고 있는 필자 북한에서 초밥집을 해 보지 않겠는가.” 1982년 6월 어느날 초밥집에서 일하고 있던 내게 판교조리사회사무소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북한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내면서 “일조무역상사로부터의 의뢰다. 초밥 요리사를 긴급히 구하고 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야단이다. 급료는 월 50만엔 정도 지불할 듯하다”고 덧붙였다 ‘월급 50만엔’이라는 말에 엉겁결에 마음이 동했는데, 당시 나는 일본과 국교가 없던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다. 회장은 “가족과 상의할 필요가 있을 테니 내일까지 답을 기다리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모두 크게 반대했다. 당시 여덟 살 난 둘째딸 등은 집안 분위기에 불안한 나머지 시종 울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그 때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1987년 8월, 다시 북한 땅에 서게 된 나는 곧 고려호텔의 지하식당 카운터에서 일을 개시했다. 사전에 ‘후지모토가 돌아온다’는 정보가 흘렀기 때문인지 90석인 가게 안은 순식간에 손님으로 가득 찼다. 안산관의 고객이었던 귀국자(북한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손님들도 들러 “잘 돌아오셨습니다”라며 인사를 건넸다. ■ 바카라 게임의 경품은 피아노·금화·벤츠 1987년말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해인 88년 1월 북한으로 돌아간 이후 김정일은 거의 월 3회 꼴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3월께부터는 초밥 출장이 아니라 바카라 게임의 상대로 부르는 일이 많았다. 당시 김정일은 한창 바카라 게임에 몰입해 있었다. 가진 돈을 칩으로 바꾸어 일정한 양이 쌓이면 경품을 준다는 규칙이었다. 경품은 호화로웠다. 일제 카메라나 CD 컴포넌트 등 전자제품, 피아노, 김일성 금화, 소니 핸디컴 등 나로서도 놀라운 것뿐이었다. 어느날이었다. 김정일이 갑자기 “후지모토, 운전면허증 있는가” 하고 물었다. “물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김정일은 수행원 20명과 함께 나를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벤츠 한 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운전해 보라”고 말했다. 차종은 V280이었는데, 모양은 V450을 쏙 빼닮았다. 나는 김용명이라는 귀국자 출신 통역과 함께 저택 안의 부지를 한 바퀴 돌았다. 김정일이 김용명에게 나의 운전 실력이 어떠냐고 묻자 김용명은 “잘 합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김정일은 나를 향해 “후지모토, 이 차를 타고 돌아가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 벤츠를 나에게 주겠다니! 김정일은 옆에 있던 간부에게 나의 북한 면허증도 다음날까지 구비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흥분된 상태로 가게로 돌아왔다. 내가 벤츠를 몰고 나타나자 가게 종업원들이나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귀국자들은 일제히 놀라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밤 김정일이 다시 나를 불렀다. 나를 데리러 온 간부는 내게 자신의 벤츠를 운전하고 뒤따라 오라고 말했다. 내 벤츠 번호판으로는 김정일의 처소를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조선노동당 간부의 차 번호는 216으로 시작한다. 김정일의 탄생일이 2월16일이기 때문). 앞에서 달리던 차가 수위에게 지시하자 철문이 열리고, 나는 차와 함께 안으로 들으갈 수 있었다. 나를 본 김정일이 “어제는 어땠는가. 모두 부러워 하던가” 하고 물었다. “물론 아주 부러워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정일은 “좋아,좋아” 하고 웃으면서 나에게 면허증을 넘겨주었다. ■ “10년간,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한다” 1988년 5월, 나의 일시 귀국날이 가까워 왔다. 출발 전야, 언제나처럼 오락실에 들어가자 김정일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3년 계약으로 왔으니 물론 곧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느닷없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후지모토, 내 곁에 10년 있어 주지 않겠나? 있어 준다면, 평양에 초밥집을 한 칸 내 주겠다. 그 외에 월 50만엔을 주겠다. 초밥집의 매상도 모두 후지모토가 가져라.” 이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북한에서는 회사 조직은 모두 국가와의 합작회사이고, 이익 배분은 국가와 회사가 7대 3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가게의 매상 전부를 내게 준다니…. 나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괜찮은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나는 즉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일본으로 돌아가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대답을 유보했다. 김정일은 “알았다”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내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벤츠는 그대로 고려호텔 차고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초밥은 1개월 정도만 참아 주십시오, 또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이 “이번에는 선물이 없어요”라고 해서 나는 “아닙니다. 이 같은 대단한 말씀을 들려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김정일이 왜 나에게 이렇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귀국의 아침을 맞았다. ■ 처 엄정녀와의 만남, 1988~89년 1988년, 북한에서 폭발적으로 히트한 노래가 있다. ‘첫동요,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로, 텔레비전에서도 연일 흘러 나왔다. 부른 사람은 엄정녀라는 여성 민요가수였다. 엄정녀도, 또 곡을 연주하는 그룹도 김정일을 ‘기쁘게 하는 조’(일본에서는 ‘기쁨조’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식으로 번역하면 ‘기쁘게 하는 조’가 된다)의 멤버였다. 어느 날 나는 항상 그래왔듯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에서 초밥을 다 만들고 조리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다른 요리사들이 내 앞을 가로질러 2층의 거울 사이로 몰려갔다. 웬일인가 하고 뒤를 따라 갔더니, 음악이 쾅쾅 들려온다. 살짝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놀란 나머지 숨을 죽였다. 놀랍게도 무대 위에서는 노래와 춤의 화려한 쇼가 연출되고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스피커에서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명장치도 상하좌우로부터 황홀하게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잠시 후 나도 연회석으로 불려 나갔다. 그리고 가수인 엄정녀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드물게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내 눈이 계속 그녀의 모습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모습을 예민하게 바라보던 김정일은, 내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엄정녀를 내 곁에 앉게 했다. ■ 결혼 결의, 여권을 넘기다 일본 처와의 이혼은 별 문제 없이 해결되었지만, 최대 문제는 엄정녀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때 겨우 22세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일본은 북한을 침략한 악의 나라라고 교육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그런 일본인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보다 20세나 연상이었다. 그녀의 부친도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아저씨와 결혼한다는 것을 그녀가 과연 바랄 것인가. 아무리 김정일의 권유라지만 그녀가 결혼을 승낙할 것인가. 이런 나의 불안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일은 엄정녀를 향해 “후지모토에 대한 생각이, 지금 몇 % 정도인가”라고 물었다. 엄정녀는 “아직은 50%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나 김정일이 엄정녀에게 또 같은 질문을 했는데 이번에는 70%라고 대답했다. 김정일은 이제 됐다고 판단했는지 나를 향해 당장 2월16일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말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2월16일은 지도자 동지의 탄생일입니다.” “그렇다면, 2월26일에 해.” 이렇게 해서 나는 엄정녀 본인의 승낙도 얻지 않은 가운데 결혼식 날짜를 택일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엄정녀가 나와의 결혼조건으로 내 여권을 당국에 맡겼으면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필시 김정일의 지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권을 맡긴다…. 그렇게 하면 나는 두 번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정일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날뛰어 나는 잠시 혼란 상태에 빠졌다. “어떤가. 후지모토.” 김정일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각오를 했다. “알겠습니다. 여권을 맡기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여권을 꺼내 엄정녀에게 건넸다. 엄정녀는 그것을 다시 김정일에게 직접 전했다. ■ 새 거처는 러시아 대사관 앞의 고급 아파트 김정일은 우리를 위해 평양의 러시아 대사관 바로 앞에 있는 고급 아파트를 준비해 주었다. 그곳에서는 김정일의 저택도 보였다. 이 아파트는 중앙당 부부장급 이상의 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거가 허용되는 곳이었다. 12층에는 김창선이 살고 있었다. 그 아래 11층에서 우리가 거주했다. 방은 모두 8개였고, 외제 가죽 소파를 위시해 전자제품류가 완비돼 있었다. 김정일은 아파트를 시찰하러 와서 “이만큼 갖추었으면 생활하는 데 불편은 없겠구먼” 하고는 만족해했다. 1월 말에는 김정일로부터 영국제 최고급 양복 원단도 받았다. 나는 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일사천리로 변해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제 이 흐름을 누구도 중지할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 결혼피로연 김정일 탄생일의 축전도 끝나고 마침내 2월26일, 나와 엄정녀의 결혼식 날이 돌아왔다. 임상종 통역의 영접으로 8번 연회장으로 들어가니 중앙 테이블에는 한가운데 김정일, 곁에 허 담 중앙당 서기, 김영남 외상, 장성택 제1부부장이라는 쟁쟁한 간부들이 얼굴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나와 엄정녀가 준비된 자리에 앉자 곧 식이 시작되었고, 김용순이 우리 앞으로 와서 축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순서대로 열석한 사람들이 와서 축하 인사를 하고는 차례차례 술을 따라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취해 버렸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코냑 ‘헤네시XO’를 한 병 반이나 비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놀랍게도 우리 집 침대 위에 있었다. 게다가 이마 오른쪽이 욱씬욱씬 아팠다. 엄정녀에게 까닭을 물으니, 함께 춤을 추다 내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밟아 머리부터 넘어졌다고 했다. 밤 11시께 이명제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회장으로 식사하러 오지 않겠는가 하는 권유였다. 피곤해 있던 나는 “집에 있는 냉장고의 것으로 적당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끊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김정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빨리 오라우.” 크게 당황하여 부랴부랴 연회장 철판구이 코너로 향하니, 김정일은 “후지모토는 대주가야. 그만한 술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마셨어요. 마음에 들었어” 하고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이상했다. “그런데, 후지모토, 그곳의 털은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곧장 화장실에 가서 보고 오라우.”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화장실로 가서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음모가 한 올도 없지 않은가! 놀라 돌아와 보고하는 나를 보고 모두 한바탕 웃었다. 김정일도 웃으면서 “지금부터는 연회장에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또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지하식당에는 안 가도 된다고 말해 두었다. 지금부터는 나와 함께 여행하면서 즐겁게 보내세.” ■ 처의 가족은 한 방에서 6명이 생활 김정일은 엄정녀의 양친이나 가족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뒤에 집안끼리 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엄정녀는 16세에 ‘기쁘게 하는 조’에 들어가 죽 격리생활을 강요당해 왔다. 그 때문에 양친이나 형제 자매와 벌써 6년 간이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나 가족을 만나고 싶었을까. 나는 결혼했으니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지만, 김정일의 명령이 있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과의 여행에는 엄정녀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몸이 안 좋아 평양의 아파트에서 혼자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를 이용해 그녀는 살짝 양친을 만나러 갔던 모양인데 놀랍게도 그것이 발각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때만은 김정일도 ‘그녀도 쓸쓸했겠지’ 하는 생각이었는지 문책은 없었다. 오히려 “1주일 후 양친을 아파트로 불러라”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실은 우리에게는 비밀로 한 것이 있었다. 결혼하고 1개월쯤 지난 무렵, 우리 두 사람은 몰래 엄정녀의 가족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처음 엄정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다. 방 하나에서 6명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 방 두 개로 바뀐 듯했지만, 우리 부부의 방 8개에 비한다면 너무도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북한의 실상이다. 풍요롭게 지내는 것은 일부 특권계급뿐이었다. 엄정녀의 가족을 통해 불공평이 끝없는 북한사회의 현실을 본 나는 참으로 복잡한 생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김정일의 허락도 나고 해서 처가 식구들이 1주일 후 우리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래서 가족만의 축하를 하고, 함께 식사하고, 목욕을 하고, 비디오를 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처의 양친은 항상 물이 나오고, 하고 싶을 때 언제나 목욕할 수 있는 우리의 생활에 아주 놀랐다. 일반 아파트에서는 물이 아침과 저녁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절경의 원산 초대소 img5L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김정일의 호화로운 별장이 각지에 점점이 널려 있다. 내가 김정일과 동행한 초대소는 주로 10개소였다. 백두산·함흥(별칭 ‘72호’)·영흥·원산·신천·창성·묘향산·평양·대동강·강동(별칭 ‘32호’) 등이다. 그 중에서도 인상에 남는 초대소에서의 생활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원산 초대소다. 원산 초대소는 멋지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산책을 하거나 사이클링 혹은 낚시 등을 하면서 즐겼다. 때로는 김정일 전용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가자미 등을 낚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 먹기도 했다. ■ 김정일의 골프장 시찰 안내 어느 날 위성 텔레비전 ‘WOWWOW’(BS5)에서 골프 중계를 본 김정일이(초대소에서는 대부분의 위성방송을 볼 수 있다) 갑자기 “우리나라의 골프장을 보러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앙당 간부들은 누구도 골프장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나는 가끔 플레이하러 잘 가는 골프장이 있었기에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더니 “후지모토는 내 앞에서 안내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는 언제나 맨 뒤에서 달렸는데, 그때는 김정일의 앞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백미러로 김정일의 벤츠를 살피면서 흙먼지가 일지 않도록 차간거리를 유지하려고 신경쓰면서 달렸다. 골프장에 도착하니 얼굴이 익은 캐디들이 손을 흔들어 영접해 주었다. 김정일은 지배인과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img6R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김정일은 “후지모토, 우리나라의 골프장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다지 좋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돌이 너무 많습니다. 잔디 밑에 모래와 흙을 더 깔지 않으면 잔디밭이 너무 단단해 클럽이 흠집투성이가 되어 버립니다” 하고 느끼고 있던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후일담이 있다. 그 골프장은 이후 우리가 방문했던 10월6일을 ‘김정일 장군 방문의 날’로 정해 휴업하기로 한 것이다. ■ 馬場은 평탄한데 좁아서 낙마 사고 빈번 원산 초대소에서는 그 외에도 풀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제트스키를 타기도 했다. 김정일과 단 둘이 승마를 즐긴 일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말을 탄 것은 창성초대소였다. 그곳에는 마장이 없기 때문에 산길에 흙을 두껍게 깐 450m 정도의 길을 몇 번이나 왕복했다. 혹은 초대소 중앙으로부터 풀까지의 약 2,500m 거리의 아스팔트길을 달리기도 했다. 마장이라면 1992년인가 93년께 22호 초대소에 3,000m의 마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역시 평탄한 코스로 협소했다. 한때 여기서 경마를 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거론되고, 내가 책임자가 된다고 농담을 주고받은 일도 있다. 또, 일본의 경마장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아 일본의 경마장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한때 정말로 경마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450m 지점에 있는 좁은 코너에서 말끼리 부딪치게 되었다. 당황하여 고삐를 당기자 오히려 스피드가 높아져 버렸다. 그 때의 말은 모두 헝가리에서 구입한 경주마였다. 그 결과 3명이 동시에 낙마해 버렸다. 다행히 누구도 상처는 없었지만, 그 일로 혼이 난 간부들은 그후 말은 타고 싶어하지 않았다. 32호 강동(江東)초대소에도 1,600m 정도의 깔끔한 마장이 있으나 그곳도 코너는 매우 협소하다. 원산 초대소에는 약 900m의 잔디 코스가 있고, 나는 그곳을 달리는 것이 제일 좋았다(그 외에 흙길과 콘크리트로 된 330m짜리 롤러스케이트장도 있었지만, 나는 후에 그곳에서 낙마하여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 광대한 32호 강동 초대소에서 왕자들에게 당구 강습 32호 초대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동 초대소는 광대한 부지의 초호화판 초대소다. 분수와 연못이 곳곳에 늘어서 있고 연못에는 교량과 폭포도 조성되어 있다. 또 마장·볼링장·당구장·롤러스케이트장·사격장 등의 오락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이 초대소에서 나는 아직 어린 두명의 ‘왕자’에게 당구를 가르친 적이 있다. 내가 왼손으로 큐를 지지하는 법이라든가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어린 왕자들은 그것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왕자들은 열심히 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고, 이후 죽 당구를 즐긴 듯하다. 그 초대소에서 나는 부수상과 그의 부하가 서로 치고 받는 싸움을 하는 것을 우연히 맞닥뜨린 일이 있다. 상세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현재 그 부수상은 지방인 묘향산 초대소의 책임자로 되어 있다. 1993년께는 1,600m의 깨끗한 마장(馬場)도 조성되었다. ■ 창성 초대소에서 수상 바이크로 김정일을 이기다 img7L 1991년 7월11일, 압록강에서 제트스키를 달리고 있는데 김정일이 옆으로 와서 시합을 제의했다. “후지모토, 승부를 걸자. 단, 진짜 승부야.” 김정일의 신호로 출발한 나는 마음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도중에 김정일쪽을 보니, 내가 조금 리드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한순간 생각했지만, 김정일이 “진짜 승부를 내자”고 한 말이 떠올라 그대로 골인해 버렸다. “후지모토의 승리구먼.” 김정일은 분한 듯이 말했다. 그 순간 이긴 것은 역시 재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바로 진짜 승부였으므로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김정일과 시합을 해서 이긴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김정일은 이러한 유희에서도 언제나 톱이었다. 이를 내가 타파함으로써 이후 김정일은 나를 한 수 높은 존재로 인정하게 되었다. 한 달 후 김정일이 또 “후지모토, 승부를 내자”고 말해 왔다. 그러나 출발하려고 할 때 나는 놀랐다. 김정일의 바이크가 놀라울 정도로 큰 것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배기량이 다르다면 얼마간 분발해도 이길 수 없다. 예상대로 그의 승리였다. 나는 김정일의 스피드를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그 무렵 북한 각지에는 홍수가 나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하였다. 이를 알았던 것일까, 몰랐던 것일까. 김정일은 수상 바이크 경주에 흥겨워하고 있었다. ■ 장군님은 혼다, 나는 야마하 바이크 1990년 9월, 김정일이 나에게 오토바이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이 가운데서 나와 후지모토가 탈 바이크를 선택하여 표시하라”고 말했다. 김정일도 나도 키가 작기 때문에 좌석이 낮고 핸들도 느긋하게 잡을 수 있는 250cc 정도의 오토바이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혼다 바이크를, 내것은 야마하 바이크를 선택해 표시했다. 2주일 후 평양으로 돌아와 다시 창성 초대소에 가 보니 오토바이가 도착해 있었다. 측근 가운데서 오토바이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나 외에는 없었다. 김정일과 나는 초대소 부지 내의 왕복 5km의 산길을 곧잘 함께 달렸다. 1990년 당시, 창성 초대소에는 광대한 부지 안을 이동하기 위해 일본제 마쓰다 RX7 자동차(약 300만엔)를 각 건물에 비치했다. 초대소 안에서만 사용하는 것인만큼 그 어느 것에도 번호판이 붙어 있지 않은았다. ■ 쏘가리 낚시 김정일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은 쏘가리(일본에서는 ‘고라이게쓰교’라고 하는데, 일본에는 서식하지 않는다)다. 거기서 우리는 매일같이 쏘가리 낚시를 다녔다. 김정일과 부인 고영희, 왕자 2명과 함께 전용선을 타고 낚시를 즐긴 적이 있다. 당시 아직 소학생이었던 둘째왕자 정운은 내가 고기를 낚아 올리면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에게 달라!”고 했다. 내가 낚싯대를 쥐어 주면 낚싯대를 들어 올리고 “내가 잡았어!” 하고 외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김정일이 “내일은 2개조로 나누어 쏘가리 낚시 시합을 하고, 잡은 쏘가리를 점심으로 먹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우리는 쏘가리 낚시 시합을 벌여 낚은 쏘가리를 각각 요리해 옥외에서 먹었다. 내가 쏘가리 초밥과 미소시루(일본간장)를 장만하자 다른 조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는 심술궂게 “여분이 없어요” 하고 거절했다. ■ 전 세계의 위성방송을 시청하는 김정일 초대소의 지붕에는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어 NHK·CNN·WOWOW·스타채널을 위시해 여러 나라의 위성방송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김정일이 “일본에는 위성방송이 몇 개나 있는가”하고 물어 수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채널’이 여기는 없다고 답했다. 그 소리를 듣고, 김정일은 당장 통신과에 전화해 “곧바로 일본의 스타채널을 잡으라”고 명했다. 10일 후 마침내 스타채널도 수신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성인영화가 많아 1년 후에는 다시 수신이 정지되어 버렸다. 이를 은밀히 즐기던 나로서는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 김정일의 낙마 김정일은 TV영화에도 백마를 타고 등장할 정도로 대단히 승마를 좋아한다. 멀리 타고 갈 때는 나도 자주 동행했다. 선두를 기마대가 달리고, 김정일과 고영희 그리고 나와 왕자가 뒤를 이었다. 1992년 어느 날,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김정일 뒤를 달려가는데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커브 지점에 김정일의 말만 서 있었다. 뜻밖에도 김정일이 낙마한 것이었다. 그 커브는 마침 아스팔트를 보수중이어서 콜타르 위에 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 때문에 말이 미끄러진 것 같았다. 김정일은 머리와 어깨를 크게 부딪쳐 의식불명인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곧바로 달려와 들것에 김정일을 태워 간신히 실내로 옮겼다. 밤이 되어도 김정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쇄골이 골절된 듯했다. 나는 부랴부랴 주먹밥을 만들어 부인에게로 갔다. 김정일의 의식이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었다. 김정일은 다음날 절대 안정을 취한 채 어용 열차로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흘 후, 9번 연회장 목련관에서 연회를 연다는 지시가 있어 대기하고 있자니 김정일이 선글라스를 쓰고 오른팔을 붕대로 감아 어깨에 고정시킨 상태로 들어왔다. 무심코 뛰어가 “괜찮습니까” 하고 인사하자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벗은 김정일의 오른쪽 눈 언저리는 새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김정일은 “이제는 매일 치료실에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했다. 곧바로 김정일 처소의 치료실을 방문하니 김정일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팩스가 산처럼 쌓여 있고, 김정일은 고영희와 그 비서와 함께, 팩스를 한장 한장 살펴보고 있었다(지금 김정일은 퍼스컴을 사용한다). 이 즈음 묘한 일이 있었다. 그날부터 매일 밤 10시, 나는 물론 비서실의 김창선과 박영남(동포사업부원) 등 5~6명의 측근들에게 김정일이 맞는 고통을 멈추는 주사를 놓는 것이었다. 고통을 멈추는 약에는 소량의 마약이 들어있는데, 김정일이 자기 혼자 마약에 중독되는 것이 싫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의사는 마약이 극히 소량이기 때문에 중독되지는 않는다고 우리에게 설명했다.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10분 간은 김정일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지만, 곧 수마에 휩싸이고 만다. 이를 보고 김정일이 “이제 괜찮다. 방으로 돌아가 자라”고 하면 그제서야 우리는 인사를 하고 김정일의 방에서 나와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우리 중 한 사람이 “잘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하는 사이에 잠들어 버린 듯 몸이 기우뚱 흔들리는가 싶었는데, 그대로 쿵하고 넘어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김정일도 회복되어 “초밥이 먹고 싶다”고 말해 나는 주 2회 정도 관저 옆에 있는 72호 연회장에서 초밥을 만들어 김정일에게 주었다. ■ 장군과 사우나에서 나체로 만나다. 김정일이 나를 전속 요리사로 고용해 특별대우를 한 것은 내가 김정일이 즐기는 오락의 모두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나는 일본인 요리사 한 사람을 두고 있다는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김정일과 발가벗고 마주한 적도 있었다. 몇 번인가 김정일과 그의 비서관 4명과 함께 스팀 사우나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김정일은 내 몸을 보고 “후지모토는 근육질이구나. 어떠한 스포츠도 잘 하니까”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몸은 근육질이 아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8번 연회장의 오른쪽에 김정일은 사용하지 않는 일반용 화장실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혼자 용변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김정일이 들어왔다. 내가 놀라 “여기는 일반 화장실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정일은 “일 없어(상관없다)” 하며 내 옆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소변을 볼 수 없었다. 잊지 못할 ‘동행 배뇨’ 기념일이다. ■ 처음으로 권총을 쏴 보다 내가 권총을 처음 잡아 본 것은 1990년께였다고 생각된다. 평양 근교에 있는 22호 초대소의 2호 연회장은 바로 옆에 식용 잉어가 많이 헤엄치고 있는 큰 연못이 있고 사격장도 있었다. 그날 김정일을 포함해 15명 정도의 멤버들이 사격 시합을 했다. 경호원들도 5~6명 있었다. 어쨌든 전원이 실탄이 들어 있는 권총을 소지한 것이다. 뭔가 일이 생기면 큰일이다. 그 때문에 특별 경계 태세를 취했을 것이다. 사격장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한 곳만 열린 작은 창에서 순번에 따라 사격을 했다. 제일 먼저 김정일이 쐈다. 25m 전방의 과녁을 겨눴는데 귀를 찢는 총성이 울려 퍼지기도 하고 화약 냄새가 자욱하여 처음 체험한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조금 지나 과녁이 레일을 타고 1m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한가운데 있는 흑점이 10점이다. 김정일은 그곳에 3발이나 명중시켰다. 상당한 기량이었다. 사격이 끝나면 전원이 박수로 맞이했다. 김정일 다음에 간부들이 쐈는데, 그들은 김정일만큼 잘 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통역인 김영명이 “일단 권총을 손에 잡으면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절대로 문을 열어서도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으나 나는 단 한 발도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이를 보고 있던 김정일이 “후지모토, 어떤가. 사격을 해 본 적이 없는가” 하고 물어 일본에서는 권총 소지가 위법이라고 답하자 김정일은 “더 연습해야 해”라고 말했다. 1993년 이 사격장은 대폭 개조되었다. 5명이 한꺼번에 쏠 수 있도록 작은 창도 늘리고, 방탄 유리문이라든가 견학용 창도 붙였다. 과녁도 5개로 늘리고, 결과를 알 수 있는 모니터도 사격장 내외부에 각각 설치되었다. 사격장은 22호 초대소 외에 32호(강동)·신천·원산·창성 초대소에도 있었다. 그 중 옥외 사격장에는 표적이 놀랍게도 미군 병사와 일본군 병사의 인형이고, 목제 인형은 수십 개가 아니었다. 이것을 쏠 때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김정일, ‘야간 연회’에 군 장성도 참석 일본 군가도 불러 1994년 무렵부터는 7명의 군 대장들도 연회에 동석하게 되었다. 오진우 원수, 박재경 대장, 김명국 대장, 조명록 차수, 김대식 상장 등이다. 몇 개월 후에는 그들의 부인들도 불렀다. 그때까지 나는 군 간부와 만나는 것을 피했는데, 연회에 동석하고부터는 그들로부터 해외여행 선물까지 받게 되었다. 장성의 부인들은 일본의 시고쿠(四國)라든가 홋카이도(北海島), 디즈니랜드 등으로 여행하였다. 하루는 그 중 한 사람인 김명국이 연회석에서 취해 군의 비밀을 발설해 버린 일이 있었다. 그는 “장군님,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가 절대로 장군님을 지키겠습니다. 지하실도 완성하겠습니다. 온도는 22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등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런 비밀을 누설해도 좋은가 하고 남의 일인데도 우려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연회에서는 놀랍게도 일본의 군가를 잘 불렀다. 그 중에는 내가 모르는 것까지 있었다. 보천보 전자악단의 연주자가 멜로디를 연주했다. ‘라바울의 소○(小○)’는 김정일이 특히 마음에 들어해 언제나 함께 불렀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무심결에 조국이 그리워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정일은 가끔 “엄정녀를 불러오라”며 처를 불러 함께 ‘뇌호의 화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또 한국의 노래도 불렀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기는 별세계라고 절실히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별천지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기쁨조의 ‘금단의 연회’ 지금은 일본의 TV나 잡지를 통해 유명해진 ‘기쁨조’이지만, 북한에서는 ‘기쁘게 해 주는 조’라고 불린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여성이 춤을 출 때는 본인이 즐겁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기쁨조’라는 이름에는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본식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기쁘게 해 주는 조’이고, 실태도 ‘김정일을 즐겁게 한다’는 그 자체였다. 평양의 제8연회장에서 벌어지는 연회에는 곧잘 ‘기쁘게 해 주는 조’의 여성들도 불려 왔으며, 이들은 화려한 무용을 했다.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무대에는 조명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책상도 화려한 전구장식으로 번쩍번쩍 빛나게 되어 있었다. 출연자들의 의상은 일본의 텔레비전에 곧잘 방송되는, 반라에 가까운 과민한 의상이었는데, 그 이상 화려한 것은 그다지 보지 못했다 무용을 보면서 김정일은 “지금의 무용은 귀엽구나”라고 하는 등 곧잘 감상을 말했다. 쇼가 끝나면 책임자가 김정일에게 가서 감상을 듣고 메모를 한다. 그에 따라 “다음은 이러한 곡으로 하도록” 하는 등이 결정된다고 한다. 여하튼 모든 것이 김정일의 뜻대로 움직였다. 신천초대소에서의 연회에서는 디스코 댄스가 장기인 기쁨을 주는 조 소속 5명의 무희가 공연하는 중에 그들에게 김정일이 갑자기 “양복을 벗어” 하고 말했다. 무희들이 양복을 벗자 이번에는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으라고 말했다. 무희들은 놀라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장군님의 ‘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무희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모두 벗고, 전라로 댄스를 계속했다. 이 때 김정일이 간부들을 향해 “당신들도 함께 춤을 추라”고 말했다. ■ 반드시 동행하는 고영희 김정일 부인인 고영희는 정말 미인이다. 김정일은 일본 영화를 곧잘 보고는 “일본에서 제일 예쁜 여배우는 요시나가 고요리(吉永小百合)”라고 말했다. 그 요시나가 고요리와 고영희는 아주 비슷하다. 언젠가 고영희가 김정일과 연애중에 일어난 일을 내게 말해 준 일이 있다. 김정일의 벤츠로 드라이브를 나간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한국 노래를 밤이 샐 때까지 계속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인은 그 노래를 내 앞에서 불러 주었다. ‘그때 그 사람’. 아주 로맨틱한 노래였다. 부인은 보통은 평양의 김정일 저택에서 산다. 김정일이 각지(各地)로 이동할 때는 꼭 동반하는 사실상의 정실이다. 부인은 북송 재일교포로, 만수대 예술단의 무용수였다. 부하들은 그를 ‘어머니’로 모셨다. 부인에게는 장남 정철(正哲), 차남 정운 외에 장녀 요정이 있다. 부인은 ‘마님’, 아들 딸들은 ‘왕자님’ ‘아가씨’로 불렸다. 김정일에게는 몇 사람의 처가 있다고 하는데, 아들을 낳은 처는 성혜림과 고영희 두 사람이다. 성혜림의 장남인 정남(正男)은 2001년 5월 일본 밀입국에 실패해 국외추방된 사건 이래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다. 그 때문에 후계자는 고영희의 장남인 정철이 유력하다는 설이 있지만, 나는 필시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김정일은 정철에 대하여 “그 놈은 안 된다. 계집애 같아서”라고 곧잘 말했다. 김정일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은 고영희와의 차남인 정운이다. 정운은 부친을 꼭 빼닮았다. 체형도 비슷하다. 다만, 차남의 존재는 밖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처음 왕자들과 만난 것은 신천초대소에서였다. 그때 그들은 아직 어렸는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왕자들은 우리 비서과 사람들과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었는데, 둘째왕자가 나와 악수를 나눌 때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이 자는 가증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듯하던 그때의 왕자의 날카로운 눈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김정일은 고영희를 아주 신뢰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부인에게는 제법 자유가 용인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나가기도 하고 도쿄(東京)의 디즈니랜드에도 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 부인의 특기는 메기 요리 창성 초대소에 있을 때 꼭 한 번 고영희 부인의 메기 요리가 식탁에 올랐다. 그것이 의외로 맛이 있었다. 야간 연회가 끝나면 우리는 2조로 나뉘어 메기 낚시를 하러 간다. 아침 6~7시까지 배 위에서 쭉 기다렸다. 많을 때는 5~6마리까지 잡았다. 메기는 한 이틀 동안 진흙을 토해내게 한 다음 부인이 직접 조리했다. 한번은 김정일이 부인의 메기 요리를 먹다 말고 “후지모토, 일본에도 메기 요리가 있겠지? 어떤 요리인지 가 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서 한 집밖에 없다는 신오쿠보(新大久保)의 메기 요리점에 가서 코스 요리를 8mm 비디오에 담아 왔다. 또 북한으로 돌아오기 전날 가게 주인에게 부탁하여 메기 20kg을 얼음에 재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 평양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에서 메기 샤브샤브를 해서 내놓았다. 김정일은 아주 흡족한 듯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많이 먹고는 “일본 메기는 껍질 색깔이 다르다. 새까만 색깔을 하고 있구나”라고 했다. 김정일의 메기 요리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내가 일본 메기 요리를 선뵌 후 김정일은 81과 요리사 4~5명을 신오쿠보에 연수보낼 정도였다. 메기 요리 외에 부인은 옥수수를 원료로 한 ‘강냉이국수’라는 냉면도 만들어 주었다. 더운 여름날 먹는 냉면은 정말 맛있었다. ■ 김정일 전용기 ‘216호’ 1993년, 나는 김창선과 요리사 3명, 웨이터 3명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었다. 김정일의 가족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에 들르는 사이 도시락을 만들어 기내로 가져가는 것이 맡은 일이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빌린 아파트의 부엌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북한 대사관의 넓은 주방을 빌리게 되었다. 도시락의 내용물은 주로 게살초밥과 은대구를 곁들이고, 새튀김·야채샐러드·참치튀김·삶은달걀·유부초밥 등을 모두 만들고 나니 밤 1시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모스크바공항으로 나갔더니 김정일 전용기인 216호(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과 연관)가 도착해 있었다. 내가 216호기를 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내는 널찍한 라운지와 같은 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개개의 방도 몇 개인가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평양까지는 약 9시간 걸린다. 왕자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드디어 도시락을 먹자는 말이 나왔다. 맛에는 자신 있던 터였지만, 실제로 가족들이 “맛있다”고 말해 주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평양공항에 도착하자 216호기는 일반 터미널이 아닌 반대편에 위치한 216호 전용 터미널로 향했다. 거기에는 김정일이 몸소 마중나와 있었다. 부인은 도시락이 무엇보다 맛있었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해 주었다. 다만 “도시락 통은 뼈를 담는 항아리였나봐” 하여 모두 웃었다. 나는 그날을 위해 일부러 일본에서 목제 3단짜리 최고급 도시락 통을 가져갔던 것인데, 그것이 뼈를 담는 항아리로 보였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 후 또 한번 216호기를 탄 일이 있다. 일본에서 여권을 신청하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번에는 스위스에서 신청하려고 제네바로 간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 영사관에서 여권을 신청하니 무려 4일이 걸렸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놀랍게도 216호기였다. 로비에는 마작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곧 함께 마작판을 둘러싼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작이라면 평양에서도 두 번 한 적이 있다. 멤버는 김정일과 부인과 김정명 그리고 나였다. 김정일은 옛날 일본식 마작을 배운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김정일은 ‘폰’이나 ‘찌’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식으로 했다. 그 때문에 곧 ‘폰’이나 ‘찌’를 했다. 때문에 ‘리치’도 ‘프리텐’도 거의 없다. 김정일은 그러한 중국식 마작을 “쓸 데 없다”고 말했다. ■ 김정일은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 김정일은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다. 그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992년,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에서 초밥을 빚고 있을 때 갑자기 김정일이 “후지모토, 오늘 초밥은 보통 때와는 맛이 다르구나”라고 말했다. 그날 밤 김정일이 초밥을 먹기 전에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가 말했더니, 김정일은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리장으로 돌아와 사용한 조미료의 양을 확인했더니 놀랍게도 설탕이 보통 때보다 10g 적었다. 그 일로 마음이 쓰인 것은 김정일 혼자였던 것이다. 그의 미각에는 나도 정말 놀랐다. 김정일은 중화요리를 좋아해서, 특히 상어 지느러미는 많을 때는 주 3회나 먹었다. ‘상어 지느러미와 전복죽’ ‘상어 지느러미와 유바(두부껍질) 스프’가 3일 연속으로 나온 적도 있다. 또 쌀에 대해서는 밥을 짓기 전에 요리사와 웨이터가 한 알 한 알 검사하는 것이었다. 모양이 완전한 것만 내놓았다. ■ 음식 재료 구입은 세계 각국에서 음식 재료를 구하기 위해 나는 몇 번인가 외국에도 나갔다. 김정일로부터 “○○를 사 오라”는 분부가 떨어지면 항공 티켓을 수배해 음식 재료를 구입하러 가는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과일을 사러, 러시아나 이란에는 캐비어를 사러 갔으며 중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에도 자주 갔다. 일본에서 구입하는 것은 주로 생선이었다. 질 좋은 참치라든가 고부인이 좋아하는 화살오징어 등도 많았다. 모두 1,200kg 분량을 구입한 일도 있다. 커다란 인도 참치를 통째로 한 마리를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체에 필요한 전기톱도 동시에 구입했다. 나는 축지(매립지)시장에서 반년 정도 참치 해체 작업을 한 경험이 있어 이를 김정일이나 가족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날 북한으로 돌아와 모두의 앞에서 참치를 해체해 보여주고 큰 박수를 받았다. 그때 말린 생선도 몇 종류인가 구입했다. 김정일은 그 중에서도 꽁치·전갱이·메기·바다빙어를 가장 마음에 드는 듯했다. 내가 “말린 생선은 무즙과 함께 잡수세요. 그래야 비린내가 없어집니다” 하고 말했더니 김정일은 “일본 사람의 식생활은 아주 섬세하구나” 하며 깊이 감탄했다. 그 때는 공수하기 위한 운송료만도 대단한 액수였다. 식료 운반료에 대해 나는 항공사와 흥정을 해서 꽤 요금을 할인받은 일이 있다. 북한에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했더니 김정일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차액은 모두 나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제가 노력한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김정일은 멋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음식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방문한 나라와 재료는 다음과 같다. ·우루무치(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 : 과일, 주로 구와멜론(哈密瓜)과 포도 ·태국 : 과일, 주로 두리안·파파야·망고 등 ·체코슬로바키아 : 생맥주 ·덴마크 : 돈육 ·이란 : 캐비어 ·우즈베키스탄 : 캐비어 ·일본 : 주로 어류 또 물품 구입 외에 신혼여행으로는 홍콩과 싱가포르, 바카라 도박을 하러 마카오, 여권 신청과 관광으로 스위스, 권총 부품 구입차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트랜싯(각도를 정확하게 재기 위한 기계)을 사러 독일에도 갔다. ■ 평양發 1박2일의 ‘쑥떡 구입하러 나가라는 지령’ 어느 날 식사중에 김정일이 갑자기 “후지모토, 일본에 쑥이 들어간 다이후쿠떡(大福)이 있다지? 내일 가서 사 오게”하고 말했다. 나는 곧 출발해 베이징(北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긴자미스코시에 전화를 걸어, ‘긴지로다이후쿠’(銀次郞大福)으로 다이후쿠 떡 100개와 쑥떡 100개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중에 그것을 받아 바로 베이징으로 돌아온다는 강행군이었다. 다이후쿠떡도 쑥떡(草餠)도 한 개에 100엔 정도 하지만, 그것을 사기 위하여 들인 교통비와 숙박비를 합쳐 다시 계산하면 놀랍게도 한 개에 1,500엔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평양과 도쿄를 서둘러 돌아온 나는 다이후쿠 떡과 쑥떡 그리고 담배를 가지고 김정일이 기다리는 신천 초대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일본 담배 전 종류를 바카라 게임용 책상에 펴 보였다. 김정일은 맨솔(박하)만 피운다. 당시 김정일은 ‘로스맨스 로열’이라는 영국 담배를 피웠는데, 일본의 맨솔도 한 번 피워 보았다고 했다. 그후에는 맨솔의 ‘카르디에’를 피웠는데 1999년 무렵 담배를 끊어 버렸다. 다이후쿠 떡과 쑥떡은 81과의 검사를 거쳐 합격 통지를 받은 다음 먹었다. 김정일은 “일본의 다이후쿠 떡은 정말 맛있다. 왜 우리 요리사들은 이렇게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쑥향도 아주 좋다”며 만족해 했다. ■ 꿩을 우려 국물 낸 ‘후지모토 우동’ 김정일은 나의 오리지널 메뉴인 ‘후지모토 우동’도 자주 주문했다. 국물에 꿩을 우려 국물을 낸(다시) 것인데, 이를 위해 우리는 오전중에 꿩사냥을 나갔다. 꿩은 스쿠프 총으로 사냥는데, 몸통에 탄환이 맞으면 요리하기가 힘들어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꿩의 머리가 작고 잘 움직이기 때문에 머리를 맞히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래서 잡은 꿩을 우려내 수프로 만들지만 맛은 정말 좋다. 김정일은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수프를 거의 바닥까지 마셨다. 그리고는 언제나 “이 맛은 후지모토만이 낼 수 있어”라고 칭찬해 주었다. 또 김정일은 소면도 아주 좋아해서 야식에는 곧잘 소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김정일의 술창고에는 ‘산토리임페리얼’만 없었다. 1989년부터 91년의 3년 간은 김정일의 관저에도 자주 초대받았다. 그곳에는 큰 술창고가 있었다. 그 곳에는 전 세계의 명주가 진열되어 있어 모두 1만병이나 있었던 것 같은데, 일본술과 소주도 있었다. 어느날 김정일이 “일본술로써, 여기에 없는 것을 찾으라”고 해서 한 병 한 병 점검해 보았는데 ‘산토리 임페리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산토리 임페리얼은 일본의 최고급 위스키다. 김정일은 금번 귀국할 때 사 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김정일은 위스키로는 ‘조니워커 스윙’을, 코냑으로는 ‘헤네시 XO’를 마셨다. 술창고에는 가라오케 세트라든가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15~16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뇌호의 화가’를 불렀다. ■ “후지모토의 초밥은 일본 최고이니 세계 최고다” 김정일은 초밥을 대단히 좋아했다. 내가 초밥을 빚고 있을라치면 “후지모토의 초밥은 맛있다”고 칭찬해 주고는 했다. 1996년 9월, 물품 조달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나는 입북관리법위반부조죄로 체포되어(이에 대해서는 후술함) 그 후 일본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어 다시 김정일의 앞에서 초밥을 만들게 된 것은 1998년 10월이었고, 2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불려간 장소는 묘향산 초대소였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참치가 없어 쏘가리·대합·성게·털게·알젖·붉은조개·캘리포니아 마끼 순으로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 더”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대합과 성게였다. 배가 꽉 찼을 때쯤 김정일이 “OK. 후지모토는 넘버 원”이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당치 않습니다. 일본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이번에는 부인이 “나도 몇 번인가 일본에 가서 초밥을 먹었습니다만, 후지모토 씨가 만들어 준 것처럼 맛있는 초밥은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장군님께 제 음식 맛이 꼭 맞았군요. 저는 정말 행복한 놈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김정일은 “후지모토 씨의 초밥은 일본에서 첫째이기에 세계 제일인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 대한항공기 사건, 김일성 사망, 핵 시설의 참상 1987년, 세상을 진동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항공기 사건이다. 이 뉴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평양의 철판구이 코너에 있던 김정일은 나에게 “후지모토, 이 사건을 우리나라가 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있다. 그때, 옆에 있던 부인이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언제나 우리나라 탓으로 돌려지지요” 하며 분개하던 것이 기억난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드디어 김정일이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김정일은 대단히 번민하는 모습이었다. 자기 방에 장시간 처박혀 있는 일이 많았다. 당시 김정일이 바로 옆에 권총을 두고 있는 것을 본 부인이 놀라 “당신, 무슨 생각하고 있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또 1989년쯤 김정일은 핵무기에 대하여 내게 이렇게도 물어본 적도 있다. “후지모토,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갖는 것에 반대인가.” “일본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피폭국입니다. 그 피폭국의 국민으로서 나는 반대합니다.” 그랬더니 김정일은 “핵무기를 갖지 않으면 타국으로부터 공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무기에 대해서는 특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1995년 12월30일, 김정일에게 중앙당 선전부장인 김기남이 “장군님께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하며 다가왔다. 김기남은 “현재 핵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나 머리가 빠지는 등 피폭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아주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에 대하여 김정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살아서 햇빛을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미국의 정찰위성 속이기 위해 야간이나 아침 일찍 대이동 1994년께부터 김정일의 초대소로부터 초대소로의 이동은 미국의 정찰위성에 발견되지 않도록 한다면서 한결같이 심야나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김정일이 탄 차를 은폐하기 위해 벤츠를 10대나 데리고 다니는 대이동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차는 꼭 선두를 달리고 누구 하나라도 장군의 앞을 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 차로 말하자면 언제나 제일 후미를 달렸다. 또 출발이 알려지는 것은 언제나 갑자기였다. 김정일로부터 “10분후 센터(棟)에 집합” 하는 신호가 떨어지면 우리는 일제히 방으로 돌아와 짐을 차에 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곧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항상 물건을 가지런히 정돈해 두었다. 행선지가 알려지는 것도 전원이 집합한 다음이었다. 김정일이 먼저 비서인 김창선에게 말하면 이를 김창선이 각 운전사에게 전하는 식이었다. ■ 역시 숙청이 일어났다! 1995년 12월30일, 그곳에는 7명의 대장이 집결했다. 김정일은 그들에게 “그 일당을 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대장 한 사람이 “예, 어제 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살해된 사람들은 아마도 반(反) 김정일파 같다. 그것도 이번에는 24~25명이나 한꺼번에 사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최용해 사회주의노동당청년동맹 제1비서는 1998년 1월 사망했을 당시 1주택 아파트의 뒤주 안에서 약 15만 달러의 현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평양에 떠돈 적도 있었다. 덧붙이자면, 그의 부인도 전 무용수로서 미인이었는데, 가족 모두 섬으로 보내졌다. ■ 김정일의 北京 방문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김정일에게 ‘니고미’(여러 가지를 넣어 푹 곤 국)나 전복술찜·마늘호일구이 등을 만들어 주었고, 김정일은 어느 것이나 “맛있다”고 기뻐했다. 2000년 5월26일 밤 김정일과 그 측근들은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나가더니 며칠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묘향산 초대소의 단장도 함께 나갔기 때문에 나는 단장대리를 맡게 되었다. 6월1일, 놀랍게도 NHK 텔레비전에 베이징에 있는 김정일이 방영되었다. 김정일은 중국으로 간 것이었다. 장군이 3일간 중국에서의 회담을 끝내고 다음날 돌아오는 것을 안 나는 초대소의 여성들에게 아름답게 화장하고 두 양동이분의 꽃다발을 준비시켰다. 김정일이 초대소로 돌아온 것은 실제로는 6월4일이었다. 김정일은 꽃다발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그것을 높이 흔들어 보였다. 여성 리더가 “그것들은 후지모토 씨가 준비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 성게 ‘돈부리’의 비디오를 보이며 “북해도에서 사오겠습니다” (후지모토는 이후 간첩 혐의로 조사받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북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2001년 3월, 누님이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 중 재미있을 듯한 것을 몇십 권 더빙해 가지고 돌아온 것이 생각났다. 그 중 한 권에 ‘고장의 요리쇼’라는 요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거기에 맛있어 보이는 성게 ‘돈부리’(큰 접시에 각종 재료를 얹어 만든 덮밥)가 나온 것이 생각나 그것을 김정일에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김정일은 성게를 대단히 좋아했다. 보게 되면 먹어보고 싶다는 말이 나올 것이 틀림없다. 그때가 찬스다. “내가 홋카이도에 가서 사올까요” 하고 타진하면 된다. 거기까지 순식간에 생각하고 곧 그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김정일을 방문했다. 예상대로 김정일은 성게 돈부리를 보자 “맛있겠구나”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그리고 TV와 같은 것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김정일은 “그거 좋겠구먼. 갔다 오라우”라고 허락했다. 나는 즉각 이를 위한 계산서를 작성해 김정일에게 보였더니 “OK. 4월이 되면 갔다 오라”고 승낙해 주었다. 2001년 3월24일이 왔다. 드디어 출발이다. 새빨간 눈을 한 채 영접나온 차에 탔다. 이번에는 김충일 부부장이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제1관문은 평양국제공항이었다. 우선은 그곳에서 뭔가 하물 검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나는 그때까지도 VIP 대우였기 때문에 특별히 공항에서의 검사는 받지 않았다. 다음은 김충일 부부장이 내 큰 트렁크를 보고 이상히 여기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잘 통과하고, 나는 드디어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만일 그때 평양공항에서 트렁크를 열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김정일의 요리사|작성자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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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뭥미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09-12-16 19:01:21
말에서 떨어졌을때 목뼈가 부러져서 뒤졌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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