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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온 큰 아버지
Korea, Republic o 강호 2 626 2010-01-11 15:35:14
1983년 중국이 전국적인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2년여, 농민들의 생활형편이 하루가 다르게 펴이고 있던 그해 봄날, 북에 계시는 큰 아버지께서 우리 집으로 친척 방문을 오셨다.
큰 아버지는 몇 년 만에 만나는 동생과 { 아버지는 몇 번 북으로 다녀왔음. } 처음으로 만나는 제수씨와 {우리 어머니} 어린 조카들한테 빈손으로 올수가 없었다며 준비해온 문어, 명태, 해삼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해산물과 당시 북에서 생산 되였던 껌을 비롯한 사탕과자들을 수북이 내 놓으셨다. 당시만 하여도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나는 문어를 처음으로 보았고, 큰아버지가 가져다준 사탕이나 과자는 그 맛에서 독특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큰 아버지의 방문으로 하여 우리 집은 매일같이 명절 분위기였다. 몇 년 만에 만나신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회포를 나누셨고, 어머니는 혹여 라도 북에서 오신 아주버님 공대에 소홀한 면이라도 있을세라 매일같이 새로운 반찬들을 만들어 상에 올리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불러 앉히시더니 한마디 하신다. " 제수씨, 제수씨가 끼니마다 햇밥을 지어주고 고기반찬이나 두부 같은 여러 가지 반찬들을 만들어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매일같이 공대를 받으려니 참으로 송구 하구만요. 그리고 , 어른들은 아무렇게나 먹으면 뭐랍니까? 나라에서 외국손님이 왔다고 이렇게 식량이나 부식품 같은 것들을 지원해주면 잘 아꼈다가 나중에 아이 들한테나 먹여요." 큰 아버지는 이곳도 북한처럼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나라 체면을 살리라고 식량이나 부식품들을 지원해 주는 줄로만 생각하셨고, 우리 집 밥상이 풍성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신게 분명하였다. " 그리고 제수씨, 묵은 밥 같은 것은 잘 씻어서 신문 같은데 편 후 음지에서 잘 말렸다가 다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데, 왜 그 아까운 것들을 그냥 개먹이로 한단 말입니까? 옛 말에 쌀을 천대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 그런 큰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그냥 웃음으로 받아 넘기셨고, 옆에서 큰 아버지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만 계시던 아버지가 한마디 왈, " 허 허, 형님, 중국 오신지 며칠이 안 되니 내 말을 믿기가 어렵겠지만요. 이곳은 외국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중국이 농민 도급제를 실시하여 이젠 다들 살림 수준이 이 정도는 피였지요. " 아버지의 말에도 큰아버지는 반신반의 하는 눈치였다. 다음날 점심식사 시간 때, 도무지 중국의 변화를 믿으실 수 없었던 큰 아버지는 나의 맏형님의 배동 하에 마을의 여러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밥상 형편들을 직접 확인을 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큰 아버지는 중국에는 읽어야할 책이 세권이 있다고 들었다 면서 을 빌려다 달란다. 북한에 계시면서 어떻게 당시 중국의 서적 명들을 알수 있을까하는 의욕을 품은채 나는 학교 교장 선생님의 댁에가 책들을 빌려다 드렸고 그 후 큰아버지는 짬만 나시면 그 책들을 읽으셨다.
큰 아버지가 북으로 돌아가시기 전날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면서 부모님들은 친척들과 마을사람들을 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식사가 끝나고 오락회가 열렸다. 거나하게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데 한참을 살펴봐도 유독 큰 아버지만 윗방에 서 나오시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잡아끌어도 소용이 없다. 이때 오락회 사회를 맡은 분이 {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정말 놀라웠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잡아끌어도 안 나오시던 나의 큰 아버지가 { 김일성 장군의 노래 } 소리에 뛰쳐나오셔서 유격대 춤을 추시는 게 아닌가? 그것도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그날 우리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시는 큰 아버지께 또 한 번 놀랬다.
우리 가족에게 잊지 못할 많은 추억들을 주셨던 큰 아버지께서는 "진정 백성이 행복한 좋은 시대를 만났으니 열심히들 노력하여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으라 "고 신신당부를 하시며 다음날 북으로 돌아가셨다.
이글을 마치며,
지금은 고인이 되신, { 묵은 밥도 씻은 후 말려서 다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며, } 그토록 쌀에 대한 애착심이 남다르셨던 큰 아버지, 결국은 그토록 긍지를 느끼며 사랑한다 하시던 조선에서 식량난이라는 고비를 맞았을 불쌍하신 우리 큰 아버지, 부디, 저승에서라도 먹고 입는 것에 걱정 없는 좋은 곳에서 행복하시길 이 조카는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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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모모 이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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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국의모모 2010-01-11 17:52:04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하고 또 다음글줄기에 궁금함을 느끼였습니다.
    저의 아버지 같네요.
    저의 아버지고향도 중국이시여서 중국에 80년대에 여권떼어가지고 들어가셨지요.
    그때 고모들과 할아버지와 자주 싸우셨습니다.
    김일성을 김일성 원수님이라고 안하고 김일성이라고 하였다고...ㅎㅎ
    지금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그때 저의 아버지는 매일과 같이 그러시더군요.
    글 잘 보고 갑니다.
    큰 아버지의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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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10-01-11 23:43:33
    세뇌란 참 무서운 것이지요.
    개혁된 모습을 보면서도 장백산줄기줄기하며
    북으로 돌아가 진짜 돌아가셧으니-
    아마도 죽음임박에는 깨달으셨으리라 믿기는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
    북한주민을 그래서 하루빨리 구출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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