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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북은 이렇게 시작 되였다.5
Korea, Republic o 도망강 0 462 2010-03-05 21:15:17
또, 정전이란다.
열차가 멈춰 서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차표, 공민증{주민등록증}, 여행증들을 준비하시오. 검열합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팔에 완장을 두른 승무원, 열차 안전원 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 칸에 들어서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일명 열차단속이 시작된 것이다. 안전원, 승무원으로 이루어진 단속 조는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다니며 단속을 단행하고 있었다.
"증명서!"
나한테 까지 온 안전원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제대한 나에게 출장 증명서가 있을리 만무했다, 현역 군인처럼 보이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군복에다 견장을 달았고, 모자까지 착용했는데 생각대로 먹히지 않는다.
잠깐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제대증을 꺼내어 주었더니
"이런 간~ 나이 ~새끼, 누굴 사기치나?"
어느새 어깨위에 손이 오더니 견장을 와락와락 뜯어서는 차창 밖으로 내던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한테로 집중되는 순간이다.
물론 나도 열차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군 생활 이였지만 그래도 6년이라는 긴 세월을 나라를 지킨다는 자호 감을 가지고 열심히 군 생활을 했건만, 제대 되고나서 열차표 살 돈도 없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해야만 하는 이신세가 처량했다.
나는 졸지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새 빨개 졌다.
{에이, 제대 때 평양 이모네 집에만 들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안당할걸,}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자의 별까지 뜯어 버리고난 안전원이 이번에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소대원 네 집에 소식전해주려고 북청에 가는 길임다."
다행이 안전원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듯 목적지를 물어보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양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북청 역이다. 식량해결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사투를 벌이며 기차에 오르고, 내리느라 홈은 한동안이나 북적 거렸다. 여기저기서 질서를 잡겠다고 안전원들이 호르래기를 부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역을 빠져나온 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찾아간 곳은 산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북청 사과 농장 이였다.
사과나무들에는 알알이 영글은 먹음직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탐스러운 사과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배안에서는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허기를 느낄 만도 했다. 일찍 떠나느라 아침을 대충 먹은데 다 가 점심까지 굶었으니,
생각 같아서는 냉큼 하나를 따들고 먹고 싶었지만 누군가가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주위를 살펴보니 누구도 없다.
{몰래 한 배낭 따가지고 그냥 갈까?}
술 한 병 없이 빈손으로 찾아와서 소대원의 아버지한테 신세를 지기가 미안했던 내가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거~누구요? "하는 거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사과 나무사이로 사십대 초반의 아저씨가 나한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군인이 사과밭에서 뭐 하는거요?"
"여기 3반 반장을 찾아서 왔는데요." 생각과 상관없이 내 입에서는 어느새 한별의 아버지를 찾아왔다는 말이 뱉어지고 있었다.
"어, 영옥 이랑, 같은 부대인가 보지?" 다행이 그 아저씨도 영옥 이를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오, 내가 반장을 데리고 오겠소."
한참 후, 나이 지숙한분이 아저씨를 따라 왔다. 영옥의 아버지였다.
"안녕하십니까?"내가 인사를 드리자 영옥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만난 듯 반가워하신다.
부모마음이 다 그러하듯, 영옥이의 부대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도 물으시는 영옥이 아버지는 {딸이 잘 적응을 하니 걱정 안하셔도 된다}는 내 말에 다소 안심을 하는 눈치시다.
영옥의 아버지는 내가 무산 먼 곳에서 굳이 북청에까지 온 이유를 짐작하고 계셨다.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던 영옥의 아버지가 무산 쪽의 식량사정이 많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면서 나를 데리고 사람들 눈길이 잘 띄지 않는 골짜기 쪽으로 가서는 크고 잘 영근 사과를 따서는 군대배낭에 넣어주신다.
그날 나는 영옥이 아버지 덕분에 저녁식사까지 대접받고 다음날 기차로 무산에 돌아왔다.
한 배낭 가득 사과를 가지고 집에 들어간 나를 본 식구들은 기뻐하신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깐, 오후에 사과 팔러 나갔던 어머니가 한 시간도 안 되여 단속을 도는 안전원한테 들고나간 사과를 몽땅 빼앗긴 채 빈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막힌 세월이다. 어떻게 구해온 사과인데,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며 북청 그 먼 곳까지 가서 구해온 사과가 아닌가?
풋 돈이라도 만들어보겠다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버지 입에도 못 넣어드린 것인데.
단속, 단속, 또 단속, 도대체 내가 사는 이 나라는 이러저런 단속이 왜 이리도 많은지?
먹고 살기가 정말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뒤, 나는 큰 오빠의 말대로 농장에 적을 올리기로 결심 하였다.
그것은 나라에서 잠시적인 고난이라고 말하는 이 사태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요즘 들어 아버지의 병세도 많이 위중해 지고 있다. 드셨던 음식물을 토해 내시는가 하면, 가끔가다 자식들도 못 알아보고 헛소리까지 하신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만도 거의 하루가 멀다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들린다.
굶어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는 말이 소문이 아닌 현실로 내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꿈같은 것은 버려야만 하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군 노동과에 등록하러 가기 전, 농장지원을 등록하면 100kg의 통 강냉이를 준다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동네에서 손수레를 빌려 오시더니 몇 개나 되는 자루를 실으신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아직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꼭 농장을 탈퇴하고, 내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리란 마음에 6년 이라는 힘든 세월들을 이겨낼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나라에서 말하는{고난의 행군} 때문에 끝내 포기해야만 하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기 때문 이였다.
군노동과 배치 실,
수년 동안 열차원이 되리라 가슴에 품었던 꿈을 접는 순간이다.
농장 지원서를 작성하는 내 손은 많이도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는 어머니가 가지고 온 자루를 터시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그만큼, 어머니한테는 식량이 절박하신 것 이였다.
수속을 마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읍 농장 식량창고에 강냉이 타러갔다.
창고 장은 몇 개나 되는 자루를 가지고간 우리를 보고는 {픽} 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농장에 적을 올렸는데 뭔 큰일을 했다고 자루를 이렇게 많이 가져 오셨소? 어이쿠 거기다 손수레까지?"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아니, 사람들이 농장에 적을 올리면 통 강냉이 100kg를 준다고 해서요."어머니가 다른 사람들한테서 들었다며 말하자,
"옛날 소리하고 있구만 원, 생산계획도 완수 못해 가을에 분배도 못주는 형편인데,"
"아, 얼런 자루나 하나 주슈," 어머니 손에서 빼앗다시피 자루를 채간 창고장이 곡간에서 강냉이를 퍼담는다.
창고장이 자루에 담은 강냉이를 저울에 달아보니 정확히 15kg이였다.
결국, 나는 6년 동안이나 품어왔던 열차원이 되려던 소중한 꿈을 15kg의 통 강냉이와 맞 바꾸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그 후, 나는 6개월 동안을 농장에 일하러 다녔다. 농장에 일을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같이 머고 살기가 힘들어 하였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장인데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자기들이 지정해준 생산계획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농장 원들의 분배 몫을 잘라서라도 거두어갔다. 백성들은 굶어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가끔 가다.
"왜정 때도 식량난이 이토록 심해본적은 없는데"했고, 정부에서 장사를 못하게 하거나 소토지에서 수확한 곡물을 무차별 빼앗아 갈 때면
"왜놈들도 이렇게까지는 안했다." 는 말들을 하기에 이르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에 눈길을 돌렸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밤이면 몰래 중국에 가지고 가서는 식량과 바꾸어 왔고, 아예 중국에 들어가 몇 달씩 농사일을 도와주고는 돈을 벌어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가을 분배 때 나는 농장에 적을 올릴 때 받았던 통 강냉이15kg을 제하고 받은 분배가 10kg이였다. 9월부터 일했다고 쳐도 3개월은 되는데 한달에 강냉이 3kg을 번 셈이다. 도저히 이제 이대로 농장 일을 하면서는 살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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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현자유 2010-03-05 22:11:52
    그 귀한 사과를 빼앗기고도 어디 하소연도 못하고...석달 일하고 강냉이 10키로라니....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이네요...지금이야 그때보다 나아졌겟지만, 체제가 바뀌지 않았으니 크게 달라진거야 없겠지요....북한의 현실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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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프 2010-03-05 22:27:50
    도망강님의 소중한 글 꼼꼼하게 읽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빨래줄에 매달린 심정으로 감상하고 있습니다. 다음편도 손꼽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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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미남1 2010-03-06 16:57:53
    참나 진짜 조선시대 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있구나..

    이게 말이되나 진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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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손02 2010-03-07 01:02:51
    북한동포분들이 겪고 있는 참상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도망강님의 수기들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간간히 발휘되는 따사로운 가족애와 인정들이 더욱 돋보이기도 하고요.

    도망강님께서 가족분을 모셔오고자 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만 모쪼록 님과 님가족분 모두의 건강과 평안을 진심 담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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