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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살해실행조 토막살해 위해 배낭 등 준비
Korea, Republic o 타는목마름 0 227 2010-03-20 04:04:10
김강수의 전화를 받고 호텔로 달려온 조활준과 김부근은 김경인을 만나 김대중이 2210호실로 끌려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수면제 같은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3인이 회담을 한 2212호에는 양일동이 멍하니 쇼파에 앉아 있었고, 곧 이어 양일동의 연락을 받고 왔다는 김재권 주일 공사가 나타났다. 그 시각에 김재권이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는 의문이었다. 상황판단을 한 조활준은 2시 40분 경 경찰의 범죄신고 110번에 납치사실을 신고했다.

범행현장인 2210호에는 약품냄새가 가시지 않고, 큰 배낭 두 개와 이보다 작은 배낭 1개, 13미터쯤 되는 로프가 남아 있었다. 모두 새것이었다. 범인들이 김대중을 죽여서 사체를 잘라 넣고 나가려고 준비한 물품들이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실탄 7발이 들어 있는 독일제 권총 탄창 1개, 마취제 같은 뿌연 액체가 3분의 1정도 남아 있는 작은 영양제용 약병 1개, 대형 갈색 봉투, 북한제 담배 2개피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티슈와 김대중이 애용하던 파이프 1개도 떨어져 있었다.

이들 배낭 등 장비는 윤진원과 김기완이 8월 6일 등산용구점 지요다구 간다 진뽀쪼오 소재 사카이야에서 8월 6일 구입한 것으로 일본 경시청 조사결과 드러났다.

오래된 탄환은 당시 일본 폭력배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들은 북한제 담배나 일본 폭력배들이 사용하는 권총 탄환을 놓아두는 등 수사진의 혼란을 노리는 철저한 유류품을 준비한 것이다. 방안 테이블에는 또 세 사람이 식사했던 음식과 그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대중의 납치과정에서 가장 의혹을 받은 인물이 양일동이었다.
9대 총선에서 떨어진 양일동은 7월 16일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가 순천당병원에 입원했다. 7월 25일 김대중과 양일동은 도쿄 힐튼호텔에서 회담을 갖고 차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외교관 여권을 전달받고 출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석 7)

양일동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평소 왕래가 있던 김대중 납치 현지 책임자 김기완 공사가 양일동에게 끈질기게 접근했다. 양일동이 김대중에 비판적인 입장인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달라붙었다. 양일동이 퇴원하여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실에 투숙한 것은 김기완이 방 세 개를 얻어 그 중에 2212호실을 양일동에게 주고, 나머지 방에는 납치범들의 ‘거사용’으로 사용하였다. 김기완이 양일동과 만나 얻은 가장 큰 소득은 김대중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정보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대중은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극도로 신변 노출을 조심하여 납치범들이 행방을 쫓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숙소도 거의 매일 옮기다시피하고 사람을 만날 때는 시간과 장소를 이쪽에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보부 암살요원들에게 양일동이 김대중을 만난다는 정보는 ‘월척’이었다. 양일동의 뒤만 쫓으면 되는 일이었다. 김기완은 호텔에 방 3개를 계약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방문을 나서자 김대중을 덮치게 되었다.

한 가지 의문은 양일동이 납치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엄청난 사건을 목격하고도 40분 내지 1시간 후에야 그것도 일본 경시청이 아닌 김기완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양일동이 납치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입증자료는 없다. 미국에 망명한 전 중정부장 김형욱도 증언자료에서 이를 부인했다. 다만 양일동이 자신을 지극히 ‘모셔주는’ 김기완의 계략에 빠져 면담 사실을 알려준 것이 엄청난 결과를 빚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양일동은 호텔에서 같은 당 소속 김경인에게 서점에 가서 책을 사오라고 일렀는데, 김경인이 예정보다 일찍 호텔에 도착하여 함께 점심을 먹고, 김대중을 배웅하면서 납치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이로써 현장의 ‘토막살해’ 계획이 ‘납치’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김대중의 목숨을 살린 이는 1차적으로 김경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납치사건의 진행과정을 본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다음에 손발을 묶은 뒤 옆 다다미방으로 옮겨졌다. 일으켜 세우더니 끌고나가 또 다시 자동차에 태웠다. 나를 깔고 앉은 채 약 1시간 이상 가더니 바닷가에 이르렀다. 납치범들은 여기서 인계하고 돌아 나온 것 같았다.
나는 예상했던 대로 “바다에 던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모터보트로 옮겨 보자기를 씌운 후 1시간쯤 가더니 큰 배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배는 속력을 내어 한없이 달렸다. 전에 해운업에 손댄 일이 있는 내 경험으로는 아마 북태평양 근방이나 사모나 같은 남양까지 끌고 간 것으로 짐작되었다. 얼마를 가더니 그들은 나를 배에 눕혀 놓고 처음으로 결박을 풀은 뒤에 다시 온몸을 단단히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바다에 던져질 각오로 십자가를 그었더니 그들은 나를 때렸다. 조금 전 그들끼리 12시 50분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어 어림짐작으로 1시쯤 되는 줄 알았다.

그들은 어떻게나 훈련이 잘돼 있는지 다음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식사를 주는 사람은 친절했으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장소가 어디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위에서 끌어내려져 선내 밑바닥으로 옮겨졌다. 묶은 것을 풀고 본격적으로 다시 묶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희끼리 “그렇게 하면 빠진다”, “후가(일어로 상어)…” 하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전부 한국어로 말했으며 경상ㆍ충청ㆍ전라ㆍ경기도의 액센트도 있었다. (주석 8)

납치범들이 도쿄에서 오사카간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오사카 인근의 중정 안가(安家)로 추정되는 곳에는 4명의 납치범 외에 중정요원 박승민ㆍ김기도ㆍ김명기ㆍ박성일과 젊은 여자의 목소리 주인공은 타자수 김봉실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이날 오후 2시 40분경 조활준이 경찰 110번에 납치사고를 신고하면서 일본경찰과 언론에 알려졌다. 곧 일본 기자들이 그랜드팔레스호텔 현장에 찾아와 취재를 벌였다. 그런데 양일동과 김경인은 1시 50분 경에, 양일동은 주일대사관에 납치사실을 신고하고, 김경인은 김대중과 절친한 우찌노미아 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구원을 요청했다고 각각 김대중사건 특별수사본부에서 진술하였다.
미국에는 마침 한민통 일본 본부 창립대회를 앞두고 초정되어 머무르던 임창영이 미국 하버드대학 코헨 교수에게 연락하고, 코헨이 미 국가안보담당보좌관 헨리 키신저에게 전하면서 곧 미국 정부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중 납치 도쿄 본부와 서울의 중정본부 사이의 무전연락이 미군 정보망에 포착되어 미 국무성이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어 행동에 나섰다는 설도 유력하다.

수장의 위기는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와 도널드 그레그 한국 정보 책임자의 공조가 이뤄낸 구출작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대중 신변의 위험을 우려해온 하비브 대사는 3시쯤 납치 보고를 받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 청와대의 박 대통령에게 직접 강력히 항의했다고 한다.

너무 긴박한 나머지 본국의 훈령으 기다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수장 직전 나타난 비행기를 미국헬리콥터라고 믿었는데, 후에 한국주재 대사를 역임한 그레그는 일본 영해이므로 미국 비행기는 아니라고 정정해 주었다. (주석 9)


주석
7) 김경재, '김대중 납치사건과 중앙정보부', , 291쪽.
8) '김대중씨가 말하는 피랍 닷새', , 1973년 8월 14일.
9) 이희호, 앞의 책,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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