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① [kon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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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www.konas.com 에 있는 것임. [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① written by. 김필재 월 평균 4만명 학살한 舊 소련 독재자 스탈린 舊 소련의 작가 솔제니친(Aleksandr I. Solzhenitsyn)은 하버드 대학에서 연설 중 "공산주의는 치료할 수 없는 미치광이 병(mad disease)"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지난 20세기는 공산주의의 광기가 지배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역사상 공산주의만큼 불과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각광받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엄청난 희생을 낳고, 마침내 열병처럼 극적으로 사라진 사상은 없었다. 공산주의, 무신론사상-종교말살론 ▲ 알렉산더 I. 솔제니친 공산주의는 왜 단명했는가? 그것은 공산주의의 출발이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는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진화된 반면, 공산주의는 공포와 테러를 통해 퇴화해 버렸다.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 사상이며 따라서 종교말살론이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으며,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현대 종교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경우 집권 첫 시기부터 “종교는 제국주의 자들의 침략의도구” 이고 “원수가 왼뺨을 때리면 우리는 왼뺨 오른뺨을 다 때려야 한다”며 타인에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교리에 악담을 퍼부었다. 마르크스, 공산혁명을 위한 전쟁 정당화 마르크스는 "전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강화하며 확대하기 위해 행해지는 사회집단 상호간의 무력 투쟁이다."라고 정의했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를 위한 수단과 방법 및 행위가 전쟁이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그의 주장은 계급투쟁에서 "역사에는 유일하게 항구적인 투쟁만이 존재하는데, 그 투쟁이란 바로 가난한 자가 있는 자에 대한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를 성실히 수행하면 사회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반대하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해방전쟁에는 찬성한다"며 전쟁에 대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같은 공산주의의 폭력혁명 이론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해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를 이념 전쟁의 회오리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공산화, 6.25 전쟁, 베트남전쟁, 캄보디아 내전에 따른 폴 포트의 대학살(The Killing Field)등이다. 舊 소련, 10월 혁명 이전 공산당 가입자의 90% 처형 솔제니친은 1975년 6월30일, 미국 최대의 노조 연합체인 'AFL-CIO' 제1차 초청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이전 80년 동안 연간 약 17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혁명운동의 시대로서 짜르(Czar)를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았던 시기다.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던 스페인의 종교재판도 그 절정기에는 매달 10명 정도 밖에는 처형하지 않았다. '수용소 군도'에서 나는 '체홉'이 1920년 출판했던 저서를 인용한 바 있다. 체홉은 이 책에서 1918~1919년 동안 매달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되었다는 '혁명활동'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체홉이 지적한 이 수치가 완벽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아 유감스럽다. 그러나 체홉이 이러한 내용에 관해 역사가 조명하기 이전에 스스로 집필한 것은 사실이다. 스탈인의 테러가 절정에 달했던 1937년과 1938년에 처형된 사람들은 월별로 따져보면 1개월 동안 약 4만 명 이상이나 된다." ▲ 舊 소련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인데 모두 4,5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사진은 러시아 공산혁명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다. 후버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박사는 그의 저서인 'TheGreat Terror'(엄청난 폭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폭로하기를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의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사람은 50%를, 군 장성급의60%를 처형했다." 공산당, 혁명 방해세력은 무조건 처형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소련은 귀족 및 군인,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서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에 의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오히려 스탈린으로 하여금 공산혁명의 완성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격이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혁명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별하여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이들을 징집하여 전선(戰線)으로 몰아넣어 이들 전부를 죽게 만들었다.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시기인 1941년 6월22일에서11월 말까지 단일 전투에서 400~500만 명의 사상자를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총알받이가 되어 죽은 사람이 바로 혁명의 방해가 되는 모스크바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전체적으로 2차대전 기간동안 군인 750만 명이 전사했고, 군인부상자 1,400만 명, 민간인 사망자가1,500만 명이발생했다.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했다. 그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에조프를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1936~1939년 기간동안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했다. 1937년 6월 2일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영웅이며 소련군 건설의 1등 공신인 참모총장 두하체프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꽤했다는 죄로 처형했다. 스탈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건립 개인 숭배 강요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5,000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됐다. 이 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 195명의사단장 중에서 110명,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이 처형됐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 실제로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인데 모두 4,5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스탈린은 곳곳에 자신의 흉상·동상·초상을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했다. 이처럼 무자비한 조직가였던 스탈린의 일대기는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소비에트식의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왔다. 그 '전설'은 영웅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모의자이자 소련의 건국자인 레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그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있다. 전성기에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많이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광신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화 이후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국가 한편 러시아는 공산화 이후 2,7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교회를 다 파괴시키고 기독교인들은 시베리아로 끌어가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동북쪽 마가단으로 보내 죽게했다. 겨울에는 얼어붙은 모스크바 강가에 구멍을 파고 벌거벗겨서 산채로 마구 밟아 집어넣었고, 여름에는 배 스크류에 사람들을 묶어서 찢어 죽였다. 모든 교회의 종탑과 십자가들을 꺾어버렸고, 교회들을 불지르거나 부수거나 장기 두는 곳 혹은 극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1910년부터 1960년대까지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해서 공산화 과정에서 2,700만명의 기독교인과 그 외에 반동분자들 4,000~4,500만 명을 합해 모두 7,000만 명이 학살됐다. 공산주의 경제체제, 非능률과 非생산의 전형 한편 경제에 있어 소련의 공산주의는 경쟁상대인 자본주의 경제와 비교하여 기술·경제면에서만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많은 낭비 요인들이 있었다. 경쟁력·합리화·기술혁신을 이룩할 내부적 동기가 없었던 탓으로 소련의 산업 부문뿐만 아니라 동구의 소련식 복제판 경제도 관료적 비능률과 비생산적인 자원낭비의 전형이 되어 버렸다. 이념적으로 고립된 채 중앙 집중적 관료체제를 이룩한 소련의 모습은 외부 세계에 대해 경제적·사회적 역동성의 실례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한 가지 품질의 소비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글자 그대로 당의 정치국 선에서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거쳐야 했으며, 소련 통치 70여 년간의 기간 동안에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한가지도 생산된 적이 없었다. 舊 소련 관료, 불필요한 업무량으로 곤혹치러 그러한 경제체제에서는 국가 관료가 수백만 종의 물품의 쿼터를 배정하고 가격을 매겼으며, 관리자들은 혁신을 위한 아무런 유인(誘引)도 없이 생산을 감독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거나 품질을 향상시킬 아무런 동기도 없이 생산에 종사했다. 경작이 허용되었던 사유경작지는 전체 경지면적의 4%에 지나지 않았으나, 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소련 전체 식료품 공급량의 25%를 생산하였다. 공산주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기능에 맡겨 두어도 잘 운영될 수 있는 불필요한 업무량으로 관료들이 일에 파묻힐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2,400만 종이나 되는 생산 품목에 대한 연간 목표량을 산정하는 임무 같은 것들이다. 1987년 11월 2일자 ‘이즈베스티야’(Izvestia)지는 “우리의 관리기구는 실로 방대하여 1,800만 명이 관여하고 있다. 이는 전국 노동력의 15%에 해당하며 인구 6∼7명당 1명의 경영관리자가 있는 셈이다.”라고 보도했다. (konas) 김필재(코나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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