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탈출(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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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숨 가쁜 7월이 지나고 8월 중순으로 가면서 막바지를 향해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열기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했다. 정말 불가마가 따로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하던 1993년 8월 12일 11시 50분, 이 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단 체육 조 선수들 모두가 훈련으로 더 들 끊게 한 날이었다. 이제 며칠 몇 시간만 지나면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는 날이고 매 선수마다 중간 테스트를 하는 날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테스트에서 밀려나면 군단에서 진행되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다. 그러니 승부수에 도전장을 내민 선수들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 만큼 사단 체육 조의 선수층은 두터웠다.
정오로 하여 뙤약볕은 정면에서 우리들의 피부를 더욱 괴롭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과 여름의 마른 빛은 서로 교접하여 자연 속 존재의 마지막 빛깔을 자연스레 드러냈다.
입었던 옷은 언젠가 벗어야 하듯, 매혹적인 자태는 타의에 의한 결핍이 아니라 스스로 껍질을 벗어던진 존재의 솔직함이다. 참나무 잎은 새삼 물이 든 것이 아니다. 본래의 색채를 뙤약볕에 태울 수 없어 잠시 잠재웠을 뿐이다. 여름이면 풍성한 숲속에서 완숙의 열매들이 속속 알알이도 실하게 영글어 가듯 우리들의 노출된 피부 역시 시간과 함께 자기 모양을 상실한 채 퍼그 나 많이도 태워졌다. 마치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부처럼 서서히 익혀들어 자리를 잡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계절과 시간에 의해 언젠가는 뙤약볕이 수그러들어 본래의 색체를 되찾아 가는 것이 인간이 입고 있는 피부의 존재가 아닌가?
나는 그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신없는 훈련에 물주머니가 되다시피 한 태권도 복을 그대로 입고 외출하려했다. 그래서 무선중대 마당으로 재빠르게 빠져 나왔다. 나 뿐 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점심으로 주는 뜨거운 쌀밥과 기름 층에 휩싸인 돼지고기 국을 먹기 싫어 장연 읍 시가지의 시원한 냉면 집을 향해 돌진했다.
떠들썩거리는 무리들이 석비레 먼지가 폴싹이는 마을길을 에돌아 200m정도 내려 왔을 때, 오늘 따라 보이지 않던 지형학참모 이철수가 땀을 흘리며 헐레벌떡 반대방향에서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는 선수들 모두가 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사실 나는 매일 첫 시간이면 나타나던 그가 오늘 따라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지금 뜬금없이 그 것도 점심시간에 땀까지 흘리며 바쁜 걸음으로 올라오는 그를 보고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왔다.
이철수는 선수들 속에서 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영철이 나 좀 보자!” 이 철수는 전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참모동지는 왜 오늘 오전에 훈련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가 그 어떤 말 못할 사연으로 하여 첫 인상이 엄숙한 줄 알았다. 그래서 땀과 함께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낙연 광산 공병 국에 다니는 정권호이라고 알지?"
이철수는 다른 선수들이 다 가고 나 혼자 남아 있는 틈을 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헌데 그의 물음은 전과는 달리 매우 냉소적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실 나는 이철수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참모가 어떻게 권호 형을 알고 있을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권호에 대하여 물어보는 참모의 얼굴에서 나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너 일처리 잘못하고 다니는 거이 있잖아?" 이철수는 내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또다시 물었다. 그러는 그가 어쩜 처음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저는 그런 일이 없는데..."
나는 입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어쩐지 그 어떤 일이 나의 주위로 닥쳐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에 타박상 입은 상처로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머리는 싸하게 아려왔다. 언제나 예감은 필연으로 돌아오고 방심은 또 다른 후회와 비극을 불러온다고 했지 않았는가. 일상에서 남들이 전혀 상상도 하지 않는 배급소 습격과 같은 야성이 나에게는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위태롭게 넘나들어 보여 그 순간만큼은 사실 더 민감해졌다. "지금 낙연 광산에 있는 정권호가 너를 만나려 왔는데 만나겠니?"
낯빛마저 하얘진 이철수는 무엇으로 하여 몹시 흥분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더 길게 몰아쉬었다. "네.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철수를 믿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장연중학교 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8월이라 학교는 방학이 되어 조용했다. 그러나 뙤약볕에 이글거리는 운동장 한 가운데 예사롭지 않는 일본산 "도요다"승용차 한대가 서있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서로 담배를 피우며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저기에 혹시 정권호가 있지 않는가 싶었다. 그래서 부리나케 학교 정문을 통과하여 첫 어귀의 한옥 식 건물인 경비실 근처까지 갔다. 그러나 그 곳 가까이에 접근하였을 때, 갑자기 건물 한쪽에서 난데없는 중좌 계급의 북한군 장교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로선 정말 예견치도 않았고 느끼지도 못한 뜻밖의 돌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무엇인가에 의해 나는 깊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계속 빠져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장교의 출몰로 이상한 감촉을 느꼈으나 사뭇 태연한 척 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단단한 목에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깔끔하게 생긴 장교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두 걸음 안팎에서 갑자기 급제동을 하며 말을 건넸다. "동무가 포탄창고 김영철인가?"
쏙 들어간 장교의 삼각 눈으로 독기가 어린 매서운 불길이 어려 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쳐다 본 그의 인상하나는 정말 표독스러웠다. 어느 별, 어느 행성을 떠돌이 별로 떠돌다 이제야 만난 인연처럼 장교의 표정을 읽는 순간, 나는 간담이 다 싸늘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건방짐과 파렴치함을 지닌 그의 말꼭지에서 왠지 모를 우수가 한꺼번에 겹쳐 들어옴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단보위부 상급참모이다. 네가 지난 7월 31일 밤, 같은 레슬링조의 성철이와 함께 낙연 광산 배급소를 그곳 광산의 이철호의 도움으로 습격하여 쌀을 도둑질 하였지?"
그의 말 첫 마디에 벌써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비라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 터짐을 느꼈다.
입에서 구렁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무서운 소리를 아무 거리낌 없이 꺼내는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헷갈렸다. 그의 말이 긴가민가해졌다. 아니 오나가나 매양 혼란스러워졌다.
왜서인지 그의 말은 분명 내가 몇 분 전만 하여도 동료들과 함께 흥분에 젖어 너스레를 떨던 그런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었다. 완전히 180도 다른 예리한 송곳위에 서있는 운명처럼 나에게는 온 몸의 전율이 순간적으로 말라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독백은 커졌다. 그래서 이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위해 앞에 서있는 장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오른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그런데 아팠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현실이었다. 결국 나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도저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달팽이관을 스쳐 지나간 그의 말은 너무도 시간과 날짜, 사람이 정확했다. 그래서 더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껏 살면서 또, 배급소 습격에서도 전혀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비호같이 날아드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는 사실, 너무도 엄청난 소리에 눈앞마저 아득해졌다. 그래서 스스로 빗물처럼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한 채 연신 떨리는 손으로 아무런 잘 못도 없는 주먹만 줬다 폈다 했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를 국가재산절취혐의로 체포한다."
드디어 태풍의 눈처럼, 보위부 상급참모의 눈에서는 태양처럼 이글거림이 보
였다.
조금 전 모습과는 영 딴 판이었다. 그런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처음보다 더
무서운 살기가 일었다.
그가 체포 장과 함께 수갑을 꺼내자 갑자기 나의 뒤에 서있던 이철수가 내 양
팔을 잡으며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아까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그렇게도 상
냥하던 눈빛마저 완전히 집어던지고 송아지 눈처럼 더 크게 부릅뜨고 달려들
었다.
기가 막혔다. 며칠 전만 하여도 그에게 술 10리터를 가져갔을 때, 동생처럼 대
하며 여자처럼 고운 얼굴에 웃음만 활짝 띠던 이철수였다. 그러던 그가 마치
한 마리의 산토끼를 잡은 포수마냥 살기에 넘쳐 있는 꼴은 한 마디로 말해 가
관이었다.
나는 저절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의 남다른 행동에 사실 기대만큼 실망이
컸다. 최소한 옆에 서서 혀만 찰 줄 알았다. 그러니 더 가슴이 아팠다.
백여 미터 앞 운동장 한 가운데 있던 차 옆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나는 끝내 보위부 상급참모가 꺼낸 수갑에 결박되고 말았다.
나의 체포는 매우 순조로웠다. 왜서인지 나는 반항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도 정확하고 너무도 과학적인 것 같아 반항은 그들에게 또 다른 굴욕이고 타협이며 변명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리고 이게 무슨 꼴이야? 아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 꼬리가 밟혔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힌 전기회로처럼 어지럽게 나의 머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의 무리에 의해 포위된 채, 경비 실안으로 몰려 들어간 나는 다시 한 번 소스라쳐 놀랐다. 뜻밖에도 정권호가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끊고 앉아 있었다. "형님은 어떻게 여기에 있소?"
나의 물음에 머리를 바닥을 향해 숙이고 있던 권호가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된 얼굴을 갑자기 들었다. "야! 이 간나 새끼. 말을 하갔어?" 상급참모가 다짜고짜 뛰어들어 나의 엉덩이를 군화발로 찼다. "너도 여기에 무릎 끓고 앉아. 저 새끼하고 180도 돌아앉으란 말이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새끼라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흘러나왔다. 아마 정권호와 말을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철수는 어느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친척처럼 또, 동생처럼 대하며 나에게 자기 살이라도 떼어 줄 것처럼 여기던 사단지휘부 지형학참모 이철수는 결국 일이 제기되자 자기 발뺌부터 할 타산으로 나를 체포하는데 협력한 것이었다.
참, 세상 한번 더러웠다. 그런 인간을 한 애비 모시 듯 했다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10분 정도 지났을까? 체육 조의 같은 동료 성철이도 잡혀왔다.
결국 나와 성철, 그리고 정권호의 팔에 수갑이 연결되었다. 배급소 습격사건의 종말과 함께 일망타진되는 그 순간의 안타까운 현실을 눈앞에서 그 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목격하자니 복장은 터져 오르고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울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법관들은 나를 가운데 세우고 좌우로 그들의 손을 나의 한쪽 손들과 같이 연결시켜 놓았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저 이 애를 보고 싶어 왔을 뿐입니다."
권호가 반항했다. 하긴 그의 말대로 사실 권호는 이 일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왜 체포했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소리 지르지 말라!"
포획한 짐승의 처리를 두고 고심하는 포수들처럼 우리 주위에 둥그렇게 포진하여 서있던 무리들 중, 검은 선글라스를 낀 40대의 사복을 입은 사나이가 구두 발로 권호를 걷어찼다. "아이고! 아이고! 나한테는 죄가 없습니다."
권호는 엄살 하나만은 죽여주었다. 조금 살짝 맞은 것 같은데 소리는 도살장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돼지의 울부짖음을 능가했다. 그 모습이 전에 8명의 부대원들과 상대하며 식칼로 위협하여 나서던 그 의젓한 모습과 오버랩 되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태지 않고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개그맨 같은 권호의 쇼에 한 동안 어지럽던 머리는 조금 개운해 지는 것 같았다. "개소리 치갔어? 이 새끼. 주둥이를 박살내 버리기 전에 잠자코 있어." 구타는 계속 됐다. 권호의 목소리가 누그러들 때까지 이리떼 같은 무리들의 매는 멈출 줄 몰랐다.
-부르릉 부르릉- 밖에서 차 발동소리가 나더니 경비실 문 옆으로 다가 왔다. 차는 낙연 광산 안전부(경찰서)의 호송차였고 사단보위부 상급지도원만 군복을 입었다. 나머지는 사복을 입은 광산 지구의 안전원(경찰)들이었다. "일어 낫!"
잠시 후, 로우톤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선글라스 사내의 호령은 매서웠다. 우리 셋은 조용히 일어나 그들이 가리키는 대로 차에 몸을 실었다.
트렁크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차에 실어 놓은 경찰들은 날씨가 무더운지 옷소매 단추를 벗어던지며 제각기 모자들을 벗어 부채질만 정신없이 해댔다. 그런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리하게 주시하던 나의 눈앞으로 왼 팔 자개의 밑에 위장된 소련제"떼떼"권총집이 흔들거리며 다가왔다. 사복을 입은 경찰들은 5명이고 운전기사가 한명 더 있었다.
위잉- 토사 운동장에 먼지를 날리며 차는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나와 권호, 성철은 차의 맨 뒤 트렁크 쪽에 쭈그리고 앉았고 운전석과 조수석, 뒤 좌석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들과 사단보위부상급지도원이 앉아있었다. ‘이제는 이 땅에서 내 운명은 끝장이구나! 손에 수갑을 차고 범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결국 내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속담에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생각해보자.’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생각을 굴리려 했다. 그래서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권호에게 물어보았다.
권호는 낙연 광산의 이철호가 경찰서에 체포되어 불었고 그 상황을 혜산 집에서 알려주어 나에게 전해주려 왔다가 법관들의 그물에 걸렸다. 그래도 허접한 동생을 살려 보려고 달려왔던 권호의 마음에 마음이 다 아련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기쁨과 같은 표현으로 전하기는 여이치가 않았다. 처한 상황이 하도 그 범위에 대한 수습이 급선무였다.
이젠 더는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다. ‘아니다. 도주하여 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무기를 소유했고 난 혼자이다. 성철이와 권호만 동의하면 못할 것도 없는데...’
나는 성철이와 권호에게 귀속 말로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형님, 이 새끼들을 까고 도망칩시다." 권호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성철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성철아, 내가 앉은 다리 밑에 망치와 자키가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이 새끼들을 까고 날자."
나는 눈짓으로 나의 발밑에 있는 자동차수리정비기구인 망치와 자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철아! 진정하고 차분하게 따라 가보자"
성철이도 기각했다. 그렇게도 믿었던 친구였는데 궁지에 몰린 코너에서 왠지 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세 명의 마음이 합치면 제갈량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망치나 자키로 한 명만 까 눕히면 역경이 순경으로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들의 말과 행동에 더 섭섭했다. 하긴 인생길엔 갈지자도 있고 우물 정자도 있는 법이다. 더욱이 사람의 마음은 천태만산이 아닌가? 결국 두 사람은 내 마음과 전혀 같지 않았다.
차가 장연 역전근처에 있는 28보병사단 보위소대 마당으로 들어갔다. 장연-만포 행 열차에서 군인들의 신분을 확인할 목적으로 "검열관"과 "검열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열차 승무를 하는 보위소대는 3개의 분대가 있었는데 사단 보위부장이 직접 관리 운영하는 사단의 프로독재기관이었다.
열차 승무 조는 왼팔에 "검열원"이라는 완장을 끼고 7.62미리 자동보총을, "검열관"은 소련제 7발배기 "떼떼"권총을 휴대하고 나서곤 했다. 검열원은 사병들이었고 검열관은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또 주요 도로들을 봉쇄하고 지나가는 군용트럭과 승용차들에 대한 단손도 무섭게 진행했다.
그들의 군사임무 자체가 사람들 취급이다 보니 사단에서는 질 좋은 피복과 무기 장비도 언제나 제일 좋은 것으로 주군 하였는데 그들의 외모를 보면 정말 남들이 다 부러워 할 정도였다.
나도 혜산에서 군대 나오기 전에는 반짝반짝 윤기 나는 군화를 신고 테트론군복에 주름을 세우고 어깨로 자동보총을 메고 지나는 군인들만 봐서 군대가 되면 저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정작 군에 입대하고 보니 보위소대와 같은 특수단위는 모두가 당 일군들과 법관의 자식들만 가는 곳이었고 나 같은 성분이 좋지 못한 서민의 자식들은 그들의 통제수단으로 되는 힘든 부대에만 배치되어 갔다.
황해도와 강원도처럼 군인이 많은 곳에서는 매일이다시피 배고픈 나와 같은 서민의 자식들이 국가협동농장 옥수수 저장창고나 양식창고 등을 습격하여 물의를 일으키곤 하였다.
심지어 힘없는 서민의 집에도 습격하여 도둑질과 살인, 강간을 하는 실례들도 가끔씩 일어났다. 장연 읍에 위치한 28보병사단 정찰중대는 너무도 군인들이 무리하게 행동하여 그곳 주민들은 "마적부대"라고 욕을 하군 했다.
사실 나 역시 군인특세를 내세우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폭행과 절취를 응당한 일로 여기면서 날뛰었다. 길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손을 들어 세우려고 하였다가 세워주지 않으면 끝까지 뒤쫓아 가서 차를 부시고 기사를 반죽음이 되도록 패주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다. 또 일반 주민들을 보고 "뻥가우리"(북한 말)라고 부르면서 무시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옥수수나 기장, 조밭에 달려드는 새무리들을 쫒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세워놓곤 하였는데 그것을 가리켜 일명 "뻥까우리"라고 불렀다.
날로 심해지는 군인들의 행패를 막기 위해 북한군은 프로독재기관인 보위, 검찰을 강화하고 경무 부대들을 새롭게 만들었다.
1984년 까지는 사실 북한군에 식량과 피복 등이 많아 배고픔과 입는 문제에서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더해가는 식량난과 경제난은 총을 든 열혈청년집단인 군대에 제일 빠른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
이런 까닭에 힘 있는 간부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은 자식들을 쉽고 편안한 곳으로 보내려고 하였고 우리 같이 서민의 자식들은 어렵고 힘든 곳에 진출되어 자기들의 귀중한 청춘을 아낌없이 바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얻어지는 것은 노상 멸시와 천대뿐이었다. 한마디로 압축하여 말한다면 북한제도의 모든 정치와 전반 흐름은 손에 칼을 쥔 권세 있는 간부들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선두에 김일성 부자가 서있었고 그들을 위한 필승의 노래는 나와 같은 서민의 자식들에게 언제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도 잠시, 아니나 다를까 그 필승의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보위소대 마당에 호송차를 세워놓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는지 아까 나를 구두 발로 걷어찼던 선글라스를 낀 경찰관만 우리를 감시하려 차에 혼자 남았고 모두가 1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시점에서였다.
정오의 뙤약볕에 차의 겉면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렸다. 거기에 우리를 가두어 놓은 주변의 울타리는 질서 정연하게 설치한 철조망으로 하여 누구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철옹성과 같은 위압을 던져 주어 노래소리는 더 날카로워 보였다.
점심을 먹으려 보위소대 성원들이 부소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제자리걸음으로 대열합창을 부르는 그들의 노래는 숨막히는 정적을 깨고 끝내 나의 달팽이관을 어지럽게 쑤셔 놓았다. 사나운 폭풍도 쳐 몰아내고 신념을 안겨준 김정일 장군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라는 노래였다.
평시에는 몹시 배고픈 시간이었지만 벌어진 상황이 하도 심각하여 나는 그 노랫소리에 더 식욕을 완전히 잃었다. 과연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는지... 나로서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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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나중에 발가 되지않길 바란다 했는데...
역시 감추기가 힘이 들군요.
아마도 글엔 안나왔지만 쌀을 맡겨둔 집에 쌀을 두가마 준게
이웃 모르게 철저히 숨겨 먹어야 했는데 소흘하여 소문이 났던게 아닌가?
안타깝네요.
남한에서도 한탕을 하고 그 돈을 조심히 쓰지 못하는 중에 걸려서 붙잡히는 경우도 가끔
있고, 10년이 다되도록 발각 안되다가 공소시효 하루를 남기고
술짐에서 소주 먹다가 입조심을 못해 붙잡히는 경우도 들었읍니다.
보위부의 고문 동영상도 보았는데 , 그 고통을 겪고도 그래도 몸을 잘 건사하여 남한에 있으니 참 하늘이 도왔네요.
역시 살 사람은 사는가 보네요.
참 글솜씨가 대단합니다.
멋진 작가가 되시길 바랍니다. 홧팅!
쉽지 않은 인생을 사셨네요. 아무튼 이루고 싶은 꿈을 꼭 이루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