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왕비는 몽골여자였지만 공민왕은 그녀를 몹시 사랑하였다.
왕비가 죽자 그의 묘를 앉히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 있는 풍수쟁이들이 왔다. 만약 풍수가 본 자리가 공민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으로 목을 치는 동작을 해보이면 뒤따르던 사령이 풍수쟁이의 목을 치군하였다.
그렇게 수십여명 풍수쟁이의 목이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의 왕비묘가 있는 나즈막한 언덕에 이른 공민왕은 그 곳의 신묘한 경지에 이끌려 가마에서 내려 직접 걸어올라가보았다.
"아 바로 여기다."고 생각하면서 언덕을 올라와 더워서 이마에 땀을 씻으려고 손을 머리위로 가져가는 순간 뒤에서 덜커덩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풍수쟁이의 머리가 이미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지금까지 그랫던 것처럼 왕의 손만 올라가면 풍수의 목을 치군했던 것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아차 실수했구나."
왕비를 안장하고 그앞에 풍수쟁이를 안장하여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곳을 아차실수각이라고 부른다.
ㅡ 공민왕릉참관시 해설원의 말 ㅡ
남쪽역사에는 어찌되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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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은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다 북한지역 개성부근에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공민왕에 대해서 국사시간에 배우는 내용은 대충
1. 당시 고려의 시대상 (원의 위성국가였고 이로인한 친원귀족들의 득세)
2. 공민왕의 개혁정치 및 실패
공민왕이 친원귀족세력을 제거하고 왕권강화를 애쓰면서 등장했던 세력
신흥무인세력(이성계) 및 신진사대부(정도전 등)
물론 신돈도 빼놓을 수 없지만 나중에 제거되죠
*공민왕에 관해서 위와 같은 내용은 야사(?)비슷한 내용이네요.물론 야사에 관심이 없어서들어본 바는 없고 공민왕에 관한 야사 비슷한 내용은 공민왕이 동성애자였다는 내용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나중에 공민왕 이후의 창왕,우왕이 이로 인해서 공민왕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공격을 당한다는 내용을...
고려가 세워진후 만들어진 릉이니 알아보면 고려릉이 적지않게 있을것으로 예상됩니다.
공민왕릉지에 대한 풍수설화 중에 그런게 있네요.
근데 이와 유사한 서울 동쪽의 아차산의 지명 유래처럼
설화나 전설, 야사 등은 실제역사라기보단, 후에 만들어진 재미있는 얘기,
즉, 문학쪽에 가까운 정도인데, 그런걸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을겁니다.
특히나 요즘은 민족주의적 수요가 많으니,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실제 역사는 아예 상관않고, 대담한 주장이나 역사창작을 펼치는 사극작가나
누리꾼들이 환영받는 형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