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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노병은 아직도 인천에서 싸운다
인천연대 6 257 2005-09-30 12:13:21
노병은 아직도 인천에서 싸운다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반미와 친미, 철거와 사수의 끝없는 대결
일방적 찬양론 제대로 따져보고 그를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는 건 어떤가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하정민 인턴기자 foolosophy@naver.com


“내가 이 아래 송도에 살았거든.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이었는데 저쪽 인천 앞바다에서 하루 종일 비 오듯이 포탄이 날아왔어. 집 앞에 떨어졌는데, 운 좋게 터지지는 않고 튕겨나간 돌에 머리를 맞았어.”

지난 9월21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만난 김아무개(61)씨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 속의 흉터를 가리켰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는 맥아더의 공습 명령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는데도 군복을 입고 맥아더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서 달려왔다. 해병대 전우회 인천지부와 서울지부, 경기지부가 사흘씩 번갈아 맥아더 동상을 호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맥아더가 지배하는 인천 앞바다


“내가 인천상륙작전을 다 지켜봤어. 민간인이야 많이 죽었지. 하지만 전쟁 때 사람이야 다 죽는 것이지, 뭐. 그건 맥아더 장군의 잘못이 아니야.”

인천상륙작전의 민간인 희생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미군용 고어텍스의 지퍼를 잠그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한 퇴역군인은 허리춤에 가스총을 차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2개 중대의 젊은 전경들은 24시간 동상을 사수했다. 인천 앞바다 저 멀리 팔미도 등대가 보였다.

인천 앞바다는 맥아더에서 시작해 맥아더에서 끝난다.

인천항에 도착하는 화물선의 조타수들은 팔미도 등대를 보고, 그곳에서 입항 허가를 기다린다. 팔미도 등대 아래에는 맥아더 부조상이 새겨진 기념석이 있다. 반대편으로 16km 떨어진 인천 자유공원에는 쌍안경을 든 맥아더 동상이 서 있다. 두개의 맥아더 동상이 인천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꼴이다.

팔미도 등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이었다. 연합군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바다에 상륙하기 위해 먼저 이 등대를 점령해야 했다. 9월14일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한국인으로 구성된 미국 비정규군인 켈로(KLO) 부대가 북한군과 교전한 끝에 등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등대에 올라간 깃발은 태극기나 유엔기가 아닌 성조기였다. 맥아더의 연합군은 261척의 함대와 미 해병대 1개 사단, 육군 7개 사단 등 총 7만5천명의 병력을 투입해 작전에 성공했고, 이튿날 인천을 탈환했다. 이미 공습과 함포사격으로 인천은 폐허가 된 뒤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단번에 전세를 뒤집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7년, 맥아더 동상은 월미도 앞바다를 굽어보는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맥아더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 문제를 이슈화한 건 인천이 아닌 중앙의 통일운동 단체들이었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는 지난 5월부터 자유공원과 인천역 광장 등에서 30여 차례 집회를 열고 “맥아더는 민족 분단의 원흉이며 제국주의의 상책”이라며 동상 철거와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9월11일에는 전국적 규모의 단체인 민중연대가 동상 앞에서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보수단체들은 강력 반발했다. 맞불 집회가 열렸고, 진보-보수 단체의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


자유공원에 뺏긴 만국공원을 되찾자

△ 맥아더 장군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인 1957년 9월15일에 건립됐다. 이후 한국 최초의 근대공원인 만국공원은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사실 맥아더 동상 문제를 처음 제기한 곳은 인천 지역의 시민단체들이었다. 다만 ‘철거’가 아닌 ‘이전’이었다. 이들은 2002년부터 맥아더 동상을 송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이전하고, 자유공원을 애초의 만국공원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맥아더 동상을 살아 숨쉬는 시민의 터전이 아닌 박물관으로 보내자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1급 전범인 일왕에게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최근에 인천상륙작전의 길 안내를 일본군에 맡겼다는 사실까지 밝혀졌지요. 만주 핵무기 사용 계획 등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공과에 논란이 있는 맥아더 동상이 공개적인 장소에 서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의 박길상 사무처장은 맥아더 동상의 문제는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맥아더 파크’로 전락한 자유공원의 공간적 정체성을 되찾는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이 한국 최초의 근대공원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공원은 탑골공원보다도 9년 빠른 1888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존스톤 별장, 세창양행 사택 등 각종 근대 건축물이 서 있던 역사문화 유산의 ‘문화 터미널’이기도 했다.

김창수 인천학연구소 소장은 “자유공원의 역사적 정체성을 비춰볼 때 맥아더 장군 동상의 위치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개항장이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구한말 각국 공관이 자리 잡았던 다문화 공간이 한국전쟁 뒤 미국의 독점 공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1957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지면서 이름을 빼앗기고 만국공원은 자유공원이 됐다.

“인천 앞바다가 잘 보이는 위치 두 군데에 각각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세워놨어요. 만국의 문화가 공존해야 하는 공간인데, 아메리카 가든이 되어버린 거죠.”

만국공원 복원 사업은 인천시가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다. 만국공원 복원이 가시화되면 맥아더 동상과 100주년 기념탑의 철거나 이전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인천시 산하 인천발전연구원은 이같은 내용으로 지난해 ‘각국공원(만국공원) 창조적 복원사업 기본구상 및 시설배치계획 연구’라는 보고서까지 냈다. 이 보고서에는 맥아더 동상 자리에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인 세창양행 사택을 복원하는 방안이 제시돼 있다. 정치적인 파장을 의식해 동상의 이전·철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국 기념물이 득세한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라는 의미다. 더욱이 인천시는 만국공원 복원 방안에 대해서 최근 인천학연구소에 용역까지 줬다. 하지만 안상수 인천시장은 동상 철거 논란이 확산되자 “맥아더 동상 철거는 국익에 반하므로 안 된다”고 밝혔다. 기존 시의 사업 방향을 거슬러 미리부터 명토 박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박길상 사무처장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보수층 표를 의식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문제가 논란이 되자, 보수단체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지난 7월15일 열린 보수단체의 동상 사수 기자회견. (사진/ 박승화 기자)


위인을 존경하라는 뜻으로 세운 게 동상일진대 맥아더는 ‘위인’과 ‘악인’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맥아더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에서 맥아더는 시민에게 위인으로만 비치고 학습된다. 학계 인사들은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냉전시대 ‘한국의 구원자’로 일방적으로 찬양됐던 맥아더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이뤄지면 그때 가서 동상 문제가 자연스레 떠오르리라는 것이다.


인천시 계획에 따르면 철거나 이전 불가피


이와 더불어 진보진영 내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일방적 철거 운동이 미래를 고려할 때 현명한 방법만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인천 시민단체들이 추진하고 있는 박물관 이전 방안도 맥락을 같이한다.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의 류제홍 박사는 맥아더 동상을 될 수 있으면 ‘비가시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동상은 기본적으로 영웅을 추앙한 식민지 시대의 부산물이에요. 지금은 현존하는 동상을 사람들의 시선이 밖으로 갖다놓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맥아더 동상도 파괴와 폭력의 군대문화를 표상하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맥아더 동상을 통해 과거의 유산이 부정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주변의 대지를 파서 맥아더 동상을 땅 밑으로 집어넣는 방식도 있죠. 맥아더 동상은 남기되 시점은 현재화하는 겁니다.”


냉전에서 자유롭다면 동상이 문제랴


건축평론가 이용재씨는 “맥아더의 공과와 관계없이 어쨌든 우리가 만든 기념물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며 “현재의 잣대로 역사적 기념물을 없애는 것은 너무 섣부르며, 동상을 후세에 남겨 역사의 심판을 받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적’처럼 다가온 맥아더 동상 철거 논쟁을 바라보는 인천 시민들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인천 지역언론인 의 강명수 대표는 “인천 시민이라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 한장 안 찍어본 사람이 없다”며 “이데올로기에 앞서 맥아더 동상은 시민들에게 친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함부로 동상 철거를 말했다가는 공격당할 분위기”라고 전했다. 1998년 인천 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맥아더는 20.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맥아더는 근대의 추억마냥 한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파이프를 문 노병의 초상은 한국전 전쟁영웅의 친숙한 아이콘이었다. 그래서 맥아더를 일상에서 탈취해 역사의 박물관에 보내자는 주장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온다. 맥아더 동상은 한국 사회가 진정 냉전·분단 체제를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한국 사회가 진정 냉전으로부터 자유롭다면, 맥아더 동상의 존재는 철거든 존치든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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