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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봉기 가능성 있을가?
United States 봉기 0 260 2011-03-29 02:50:43

인터뷰/오길남의 南과 北

 
“북의 본질은 노예사회, 神政(신정)체제, 兵營(병영)국가”


‘주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자진 入國(입북)했다가 절망한 뒤 처자식을 남겨두고 탈출,
귀환한 南韓의 한 진보적 지식인의 눈에 비친 북한체제의 본질


李 淸


22년 만의 서울행

 

吳吉男(오길남)씨(50)는 70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독일에 유학, 튀빙겐 대학과 브레멘대 대학원(경제학 박사)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반정부단체인 민건」(民建) 간부로 활약하다가 85년 12월 13일 아내 신숙자(50), 딸 혜원, 규원 등 가족 3명과 함께 북한을 「선택」, 평양으로 들어갔으나 북한 당국이 기껏 대남방송 요원으로 부리는 데 환멸을 느끼고 1년 만인 86년 11월 21일 최현희, 신상옥씨와 비슷한 방법으로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탈출, 자본주의 세계로 되돌아온 지식인이다.

 

그 후 그는 독일에 머물면서 북한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윤이상, 송두율 등 재독 친북인사들과 북한대사관, 그리고 UN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 엠네스티, 독일 정부 등을 통하여 「생명이 탈진 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북한 당국이 그 귀중한 ‘인질’들을 내놓을 까닭이 없었다.

 

한 때는 가족을 위해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까지 했던 오길남씨는 마침내 가족과의 상봉을「통일 후 」로 미룬 채 지난 4월 10일 주독 한국 대사관에 ‘간첩’으로 자수, 5월 22일 유학길을 떠난지 22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오길남씨는 자신의 인생이「꺾어지고 부서졌다 」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태풍이 할퀴고 간 황량한 들판에 앉은 농부처럼 가끔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꺾어지고 부서진 」결과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데에 오씨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데에 오씨의 자괴심은 컸다. 「 내 눈을 내가 찔렀다」고 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가 딸들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도 했다.

 

오씨는 오랫동안의 독일 생활과 지난 5년 동안의 피가 마르는「기다림」의 세월을 거치면서 거의 실어증에 걸릴 정도여서 「어휘도 잘 생각나지 않고 생각을 정돈하여 표현하기가 힘이 든다」고 괴로워하였다.「자수간첩」으로 합동 기자회견을 할 때 자신의「못난 얼굴 」을 향해 쏟아지던 불빛 아래서 말문이 막히고 당황했던 경험 때문에 그 이후 최초의 단독 회견인 필자와의 만남에서도 말문이 제대로 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사이에 차츰 20여년 전까지 쓰던 부산말이 그대로 섞여져 나오면서 막힘이 없고 정돈된 말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오씨는 특히 한 사람의 경제학도로서, 북한의 실체 모습을 모르고(알려고 하지도 않고) 관념적으로 「주체 」의 환상에 빠져 있는 일부 한국의「진보적 」인 학자, 지식인들에게 「 만나서 토론하고 경험을 전해주고 싶은 」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 오선생의 수기를 읽어보니 「 누가 내 말을 믿겠는가 」하고 불신에 대한 두려우을 토로해 놓은 대목이 자주 눈에 띄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쨌든 나는 북에 갔다가 온 사람이다. 그리고 공작임무를 띠고 나온 간첩이다. 나는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지만 거대하고 무자비한 권력집단에 의하여 삶이 파괴됐다. 그래서 협심증과 공포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고 지금도 두려움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밖의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은 귀국한 이후 이미 많이 가셨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엷어질 것이지만 이 사회가 나에 대해 미덥지 못한 눈으로 보는 시선은 앞으로도 오래 갈 것이다. 이 점이 괴롭다. 』

 

-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신비의 세계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보고 와서 소식을 전하고 있고, 그쪽에 살던 사람들이 넘어와 생생한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오선생처럼 남한 출신의 경제학도로서 북한경제를 위해 뭔가 뜻 있는 일을 하려는 목적으로 입북하여 그곳 경제를 몸으로 체득하고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한의 경제는 대체 어떤 모형인가.

 

 

『 북한의 노동양식은 노예제도 』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후에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객관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의 국면을 주관적으로 뛰어넘었다. 비록 생산 수단의 사회주의화를 이루었다 하나 역사의 발전을 거꾸로 돌려버린 것만은 사실이다.

이처럼 역사의 역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북한 사회의 구성은 봉건사회에 가까웠다. 나는 광복거리 건설장 등에서의 자원노동, 금요노동 등을 해봤고, 북한의 공장들을 다녀 봤다. 그리고 「 농민시장」과 백화점 등 경제활동의 요소들을 두루 살펴 봤다. 그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북한의 노동 양식, 일하는 방법, 경영체제 등은 노예제도라는 것이다. 그쪽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던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 북한의 노동양식을 노예제도라고 규정할 만한 증거를 말할 수 있는가.

 

『농민들을 예로 들자면 국가(당)라는 노예주 밑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통제를 받는 노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협동농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공장에서의 노동양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나는 여러 공장들을 견학하기는 하였으나 그곳의 자세한 형편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공장에 데려가서도 주로 김일성, 김정일이 방문하여 만졌던 물건, 앉았던 자리 등을 신성하게 표시해 두고 그런 곳들을 주로 보여줬다. 북한의 경제구조는 농업경제 반, 공업형태 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업의 경영형태나 노동방식도 협동농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

 

- 노예제도라는 고대사회의 유물을 20세기 후반 우리 민족의 한쪽 국가에 결부시키려니 아무래도 쉽게 납득이 안간다. 자세히 부연해 달라.

 

『 그리스, 이집트와 같은 고대사회의 노예제도에서는 노예의 매매가 이루어졌으나 북한 사회에서는 매매의 매매제도는 없다. 노예의 매매행위만 없다 뿐이니 생산관계는 노예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노예제도를 토대로 이루어진 북한의 사회는 사회 잉여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인민생활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언필칭 「인간 개조」를 부르짖고 있지만 결과는 피골이 상접한 노예 인간들만 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인간생명의 창조적 기능이 죽어가고 있는 것, 생명 그 자체가 질식사하고 있는, 이것이 부한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생산관계만 노예제도인 것이 아니다. 생산물도 노예제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데 거대한 축조물들이 그 증거이다. 대성산 혁명유적지, 인민문화궁전, 지하 1백m 속을 달리는 지하철,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버티고 서 있는 만수무강탑… 이런 것들은 모두 神殿(신전)이며 왕릉.궁전이기도 하다. 노예제 사회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데 북한 사회야말로 철저한 광신의 사회다. 어딜 가나 예배당(강당)이 있고 예배(집회)가 있으며 말씀(김부자의 교시)이 인민생활을 시시콜콜하게 지배한다. 노래만 하더라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같은 군가조나 최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있는 보천보악단의 연주곡 등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찬송가처럼 축 처져 있어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

 

 

『흐름이 없는 사회 』

 

- 서강대학교의 李相禹(이상우) 교수도 「 북한은 신탁에 의하여 지배되는 신정체제다 . 그 때문에 생산력이 낮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생산력은 어떤가.

 

『 북한의 질곡은 근본적으로 「 사람을 묶어놓는」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개인도 그렇지만 경제 역시 살아있는 유기체다. 북한은 이 유기체의 마디마디를 묶어서 피가 흐르지 않도록 인위적인 장치를 해놓았다. 기업소와 기업소끼리도 유기적 연결이 없다. 이처럼 스스로를 꽁꽁 묶어놓으니 사고도 경직될 수밖에 없다. 사고마저 경직되니 북한의 생산은 축소 재생산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내가 북한에 갔다가 나온 후에도 유심히 관찰해 보니 그쪽 경제는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했고 지금은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다. 당연한 결과이다.』

 

- 북한이 ‘우리 식대로 살자’면서 자립경제를 추구해온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북한의 자급처럼 경제라는 것은 한 마디로 수도원 경제와 같은 것이다. 그 사회의 지배계급은 대지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경호텔을 만들 때도, 평양 지하철이나 서해 갑문을 만들 때도 그토록 거대한 축조물의 건설에 따르는 효율성이나 수익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크고 높은 것을 세워놓고 「야, 우리가 이만큼 했다」고 자족하고 과시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움직이는 역동성보다 서 있는 대형 축조물의 건설에 열심인 것도 그 때문이다. 아방궁을 지은 옛 황제의 심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 

 

- 북한에서는 경제단위들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화폐는 어떤 구실을 하는가.

 

『 북한의 화폐는 교환과 매개의 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유한 의미에서의 상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폐에 의한 ‘유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끼리의 수평적인 의견의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화가 없다시피하고 편지가 별로 없으며 여행도 허가제로 극히 필요한 경우 아니면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오가는 흐름이 없다. 사회적 의견이라는 것도 인간끼리 생각의 교환과 흐름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낙하하는 것이다. 남북고위당국자 회담이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한 사람들은 남쪽 사회의 의견형성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쪽 사람들도 북쪽의 수직적 의견 낙하과정을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회의다운 회의가 될 리가 없다.』

 

 

굶주리게 해놓고 통치한다

 

- 화폐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업장 경영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

 

『 군대식 조직과 강제 동원이 유일한 방식이다. 일종의 분업, 협업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방식으로는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칠보산 연락소에서 함께 일하던 「동무 」들도 가끔 「50년대식 방식으로는 안된다 」거나 「우리는 기후조건이 나빠(기온의 차가 심한 현상을 말하는 듯) 발전을 못하고 있다」는 등 한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사회가 지니고 있는 질곡의 근본 원인을 직시할 용기는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 대신 그들은 「가난」에 잘 길들여져 있었다. 칠보산 연락소 요원들이 농촌작업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成敬姬(성경희)(46.이화여대 졸. 69년 납북 KAL기 여승무원), 鄭敬淑(정경숙)(46. 연세대 졸, 69년 납북 KAL기 여승무원) 등 여자들이 감자를 삶고 오이냉국을 만들어 일터로 나왔다. 감자를 먹고 있는데 연락소장 金仲麟(김중린)(68. 전 통일전선부장)이 굉장히 화를 내면서「 오선생님, 감자는 껍질째로 먹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보니 김중린 자신도 감자를 껍질 채 먹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

 

- 사회의 기능이 축소 재생산으로 나가다 보니 「 욕구의 축소」를 강요하게 되었다는 얘기 같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에게 근로의욕을 어떤 방법으로 진작시키는가.

 

『 나도 그게 궁금했다. 결국 그것은 「 명령」과 「돌격」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김정일식의 사고방식에 따라 「와닥닥 해제끼라 」는 것인데 이건 무서운 얘기다. 그러나 명령과 명령, 사업과 사업의 유기적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보니 이빨 빠진 톱니처럼 경제현상들이 지리멸렬해 있다. 이런 판이니 경제 이론 따위는 씨가 먹히지 않는다. 국제무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 좀 들여다 보았더니 그 분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 그토록 지리멸렬한 사회가 지구상의 어떤 국가보다 강인한 힘으로 묶여져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았는가.

 

『빈곤이다. 북한은 묶지 않고는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사회다. 무엇으로 묶느냐 하면 군대의 힘보다 「빈곤」으로 묶고 있다. 「 빈곤」은 북한 사회를 묶는 최대의 사슬이다. 생활이 향상되면 저런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다. 「 굶주리게 해놓고 통치한다」는 것은 북의 지도자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체제 유지의 근간이 되어 있다.』

 

- 북한 경제의 객관적인 평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우리 정부에서는 북한의 GNP를 9백 달러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 본 결과 4백 달러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나도 4백 달러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북한의 GNP에 대해서는 1천 달러에서부터 3~4백 달러에 이르기까지 추정치가 다양하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천 달러쯤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 수준이 못 되는 것 같다. GNP를 계산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없다. 이를 우리식으로 계산하다 보니 1천 달러라는 수치가 나온 모양인데 내 생각으로는 실제보다 과장되게 계산된 것 같다.』 

 

 

『 통일 비용을 겁낼 필요는 없다 』

 

- 남북한간 경제력의 차이는 정확한 수치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같은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통일 비용」이라는 새로운 걱정거리를 낳게 되었다. 남한 사회에서는 이 「 통일 비용」 때문에 남북통일을 서두를 것이 없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오선생은 독일에 오래 살면서 동ㆍ서독의 대립과 통일의 과정을 지켜보았고, 통독 후의 어려운 경제 문제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남북한의 경제를 모두 접해 볼 수 있었던 행운아(?)이기도 하다. 남한에서의 우려하고 있는 「 통일 비용 」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서독의 경우 경제 체제의 우열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나 산업기술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통일로 인하여 동독쪽의 수준 높은 기술이 체제상의 취약성으로 인하여 폐기되는 바람에 엄청난 비용이 발생한 것이다. 동독의 기술적 수준은 서독에 비해 10분의 6쯤은 되는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 사이에는 그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 때 발생한 것과 같은, 북한 산업의 폐기에 따른 비용은 크게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의지금 이렇다할만한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통일전 동독의 수준에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남한 정부가 북한 경제의 자생력 회복을 도와주고 개방을 유도하려는 정책에는 찬성한다. 그렇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북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추측 또한 옳다. 그러나 「 통일 비용」을 겁내서 흡수통일을 망설인다면 그것은 옳은 판단이 아닌 것 같다. 』

 

 

『 유격대식의 전략만이 존재 』

 

- 남북한 통일의 시기는 세계적 관심사다. 여러가지 구구한 설이 많으나 시기적으로는 적어도 금세기 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설이 가장 많다. 통일이 될 경우 남북한의 경제는 독일처럼 동등하게 혼합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통일 비용」이 과다하리라는 걱정도 모든 것을 독일과 같이 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북한은 구동독과 다르다. 내가 그곳을 「선택」하였을 때는 최소한 의료, 교육제도와 같은 사회의 기본적 평등구조는 완비되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아주 컸다.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은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없지 않느냐 」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알고 보면 아주 불완전하였다. 병든 아내의 치료 대문에 갖은 고생을 다 해보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알고 있다. 연필 한 자루도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나마 엉성한 물건이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으로 본 평양 거리와 남북 회담 대표들에 대한 만찬, 그리고 화려한 공연이나 지켜본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 주체사회주의 」라는 것도 이론만 무성하고 그나마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저 치고, 속이고, 와다닥 해제끼는 유격대식의 기습공격 전략만이 존재하고 있다. 경제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통일이 돼도 북한에는 폐기해야 할 만한 그 어떤 사회적 잉여와 축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용 들만한 것(손실)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북의 사람들을 먹이는 것, 이것이 통일 비용의 가장 큰 항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서비스, 금융 등 모둔 것이 점차적으로 들어가 북한 경제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 것이다. 통일 되자마자 남북의 경제를 뒤섞어버리면 곤란하다. 연변에 사는 동포들처럼 북한 동포들도 한꺼번에 남쪽으로 내려와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한동안 양쪽을 분리해놓고 점차적으로 동질화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같은 문제는 나로서는 어려운 문제다. 』

 

- 「통일 비용 」에 관한 오선생의 견해는 아주 독특하다. 경제학자로서 이 문제에 관해 계속 연구해 볼 생각이 있는가.

 

『앞으로 계속 이 문제를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처지는 지금 그런 「희망 」을 얘기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 모든 것을 배급에 의존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항상 물자의 부족에 허덕이리라는 것쯤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농민시장 」과 같은 소규모 시장이 이를 보완하고 있지 않는가.

 

『 그나마 「 농민시장」이 있어 질식할 것 같은 주민들의 생활에 숨통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농민시장은 평양시내 여러 곳에서 봤는데 송신 농민시장이 제일 컸다. 일종의 상설시장으로 점포라기보다는 남한의 시골 장터에 농민들이 먹고 남은 채소를 팔러 나오듯이 이 사람들은 집단농장 아닌 집 둘레의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들고 나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파는 시장이다. 혹간 김밥이나 간편한 먹을거리를 파는 점포도 몇 군데 있었다. 낯선 사람(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체격이나 피부색깔, 영양상태 등으로 금방 식별이 된다)으로 보였는지 어깨를 툭 치며 시비를 걸어오는 여자 깡패(?)도 있었다.

 

여기서는 공산품은 일제 취급되지 않는다. 돼지고기, 쇠고기, 바닷고기도 공산품과 같이 거래되지 않는 품목이다. 민물고기(미꾸라지 따위), 닭고기는 팔고 있었다. 주로 고구마줄기, 콩나물, 두부 등 반찬거리가 많았고 구하기 힘들지만 고춧가루도 있었다. 참빗과 엿도 팔았다.

 

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일반적인 행정가격보다 엄청나게 비싸다. 가령 계란 한 개의 값이 2원인데 여성 근로자의 월급이 40원이라는 식이다. 나는 병이 들어 몸이 허약한 아내와 또 두 딸을 먹이기 위하여 틈만나면 농민시장을 찾아다니며 콩나물, 두부 따위의 먹을 것을 사다 날랐다. 』

 

 

『 민중봉기의 가능성 희박 』

 

- 오선생은 어떤 집에서 살았는가.

 

『내가 살던 집은 창광거리의 고려호텔 바로 옆 동흥동에 있는 20층짜리 아파트의 12층이었다. 방 3개짜리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집 부근에 역전백화점이 있어 자주 가봤는데 거기서는 생리대도 팔고 화장지도 팔았다. 화장지는 한 뭉치에 1원이었다. 이런 물건들은 나오자마자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에서 생필품을 제대로 구하려면 남자고 여자고 열심히 돌아다녀야 한다. 집안에 할머니 같은 사람이 있으면 아주 편리하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북한은 매우 살기가 어려운 세상인 것 같다. 그곳 주민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동구 공산국가들처럼 민중 봉기의 가능성은 없는가.

 

『 민중 봉기는 당분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기아 속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기본적인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에 영양이 공급돼야 조직적인 봉기가 일어나는 법이다. 80년대 한국 근로자들의 대반란(오씨는 이렇게 표현했다)도 근로자들이 어느 정도 살 만하니까 일어난 것이다. 북한은 먹는 것을 조금씩 주는데 그나마 당이 공급의 줄을 완전히 거머쥐고 있으니 반체제적인 투쟁이 일어날 틈이 없다.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여 어른들의 속을 썩이는 「전대협」의 행사자금이 수억원 소요됐다는 신문보도를 읽고 놀랐다. 그 돈은 이 사회가 준 것이다.

북에서는 그런 사회적 잉여가 없다.』

 

 

만성적인 영양 부족

 

- 만성적인 물자부족이 북한 사람들의 외모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

 

『 우선 체구가 작고 깡마른 인간이 북의 일반적인 체형이다. 같은 동족인데도 남한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속을 들여다보면 기진맥진해 있는 것이 북한 사회다. 전라도 출신으로 남로당원이었던 할아버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오선생, 병나면 안된다 」고 기회 있을 때마다 걱정을 해 주었다. 의과대학도 있고 병원도 있다. 그러나 병이 나면 이용하기 어렵고 치료에 한계가 있어 나만 서럽고 손해일 뿐이니 몸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북한의 아이들은 50년대 우리 사회에서처럼 누런 코를 비물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영양이 나쁜 탓이다.

 

칠보산 연락소에도 월북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1백50~2백명 정도 있었으나 모두 중앙당에서 만든 책자나 노동신문, 남한의 대학신문 등에서 베끼기나 할 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尹老彬(윤노빈)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판단하고 생각하기를 멈춰버린 기계처럼 맥이 빠진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딱하다고 말하자 윤노빈은「오선생, 저 사람들 글 못 쓴다고 티잡지 마시오. 저사람들의 두뇌는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다 」고 했다. 그들 대부분이 남한에서 서울 대학 등 일류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어 월북한 「 사상의 전사」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두뇌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두뇌가 기능하지 않기로는 칠보산 연락소의 월북 인사들뿐만 아니었다. 북한 사회 전체가 그랬다.

 

가수가 노래 부르는 방법, 농부가 수박농사에 거름 주는 법까지 김일성, 김정일이 다 교시하는데 인민들이 머리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머리를 쓰고 싶어도 만성적인 영양부족의 상태에서는 제대로 쓸 수도 없는 법이다.

 

점심에는 밥곽을 싸 와서 먹는데 9월이 되면 쌀이 떨어져(강냉이고개) 강냉이 배급이 많아지므로 점심밥곽도 강냉이밥이 된다. 강냉이밥에 고춧가루가 적게 들어 시퍼렇게 보이는 김치가 반찬의 전부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락소 부소장의 밥곽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의 질이 높아지려면 영양공급이 좋아야 한다. 두뇌노동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 자유로운 정신이라든가 합리적 사고는 발을 붙이기 힘들다는 얘기인가.

 

『북한은 이성의 빛과 과학이 차단된 종교 우월사회다. 칼 마르크스의 종교비판론을 북한 사회에 비쳐보면 바로 오늘의 북한 사회에 비쳐보면 바로 오늘의 북한을 두고 말한 것 같아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북한 이론가들의 책을 읽어보면 정말 신물이 나고 구역질이 나서 읽을 수가 없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관념적, 추상적인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독창적 시각은 전혀 없고 주어진 텍스트를 누가 멋지고 심하게 부풀리느냐하는 경쟁만 있을 뿐이다. 아마 통일이 되면 북한의 기자들은 전부 실직할 것이다. 그런 글을 가지고 남한기자들과 경쟁할 수 없다. 글만 그렇겠는가. 모든 직종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 이론가들의 저서나 기사의 특징은 동의어의 끊임없는 반복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말을 가지고 반복, 또 반복하는데 몇 10년을 그렇게 해 오고 있다. 그 사이에 사고할 기능도 잃었고, 사고할 필요성도 없어졌다. 그러나 북한이라고해서 전부 「 사고 기능이 정지된 사람 」들만 사는 것은 아니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이 봤다. 이념담당 비서 황장엽, 조평통 위원장 허담(내가 북한 갔을 때 생존) 등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주로 부부장급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부장급(장관급) 이상의 「 지배층 」에서는 트인 사람을 보기 어려웠다.』

 

 

막강한 군사력 유지의 비밀

 

- 폴 케네디는 강대국 흥망의 틀을 밝히는 가운데 경제력과 군사력의 배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남북한을 비교해 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그 뒤부터 국가의 경영방식이 남한은 경제 제일주의로, 북한은 군사 제일주의로 달라지고 남한은 외자도입과 수출의존의 개방경제로, 북한은 자력갱생 경제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지금에 이르렀다.

 

북한 경제가 피폐한 것은 군사 제일주의에 의하여 군비투자의 과다와 상대적으로 경제적 투자의 미흡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의 경제가 정말 어렵다면 군사력의 유지도 어려워야 할 것인데 지금 북한은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미스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재생산 구조로 봐서는 분명히 미스터리에 속한다. 생산에는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이 있는 품목의 기초적 생산 부문과 생활과 무관한 비기초적 생산이 있는데 기초적 생산이 부진하더라도 비기초적 생산은 그런대로 유지되는 수가 있다. 북한이 그 예다. 그러나 북한은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비기초적 생산에 대한 투자가 과다하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제 전체가 일그러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

 

- 사회주의식 생산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 북한에도 공장은 많다. 그러나 제대로 가동되는 것은 드물다. 아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학생들이 「 영웅적인 결단」에 의하여 지방에 있는 공장으로 자원하여 떠나는 경우가 많으나 그들이 가봤자 공장 자체가 제대로 돌지 않아 할 일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경제의 피가 돌지 않기 때문이고 사회적 잉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 오선생은 노예국가, 신정국가라고 했는데 군사국가라는 특성이 강한 것 아닌가.

 

『 그렇다. 구 소련에서는 그들 스스로 「 병영 사회」라는 말을 썼는데 북한의 경우 ‘병영 국가’의 특성이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다. 군인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잘 먹여주는 것 같았다. 영양이나 보급에 있어 민간인보다는 조금 나아보였다.』

 

- 오선생은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인민배급이 아닌 초대소 배급을 받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특별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우가 특별하면 뭐하는가. 사회 전체가 빈혈증에 걸려 있기 때문에 덩달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작워들 연락소 옆에 공급연락소가 하나 있었는데 점심 때 군인들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키 크고 몸집이 좋은 여자들도 있었다. 옆사람에게 「 저 여자들 예쁘고 건강합니다요 」그랬더니 「저 사람들 모두 당수유단자들 」이라고 하는 바람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당수 유단자인 그 잘 생긴 여자들은 뭔가 특별배급을 받고 있었다.』

 

 

무모성ㆍ저돌성ㆍ비효율성

 

- 북한의 경제가 나아질 전망은 없는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의 지도부가 트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북한의 현재와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산에서 싸움이나 하던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농촌이나 공장, 건출물을 돌아보면서 그저 외관의 질서정연함, 웅대함만 보고「좋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는 그 질곡을 깰 수가 없다. 밖에서 자본과 기술, 경영방법이 들어가야 비로소 그 경제는 피가 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지배를 공보히 하려는 앙샹레짐 현상 때문에 인민들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 

 

- 사진에서 보는 북한의 농촌 주택들은 비교적 잘 개량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선생은 어떻게 보았는가.

 

『그것이 바로 북한식 겉치레의 표본이다. 겉으로 개량되어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시멘트로 처바른 천박한 구조물들일 뿐이다.』

 

- 북한 경제의 현실에 대해 북한의 지도층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또 돌파구를 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일본 자본을 들여와 북쪽의 한정된 지역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방식을 차용함으로써 돌파구를 열어보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북한 사회 전체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외부의 자본은 들어가는 족족 탕진되고 말것이다. 물론 그쪽에서도 잘 되는 것이 있다. 김부자의 특별지시가 있는 부분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해내고 말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북한 사회의 무모성, 저돌성, 비효율성은 그쪽의 경제를 질식케 하는 요인인 동시에 잘못하면 엉뚱한 도발을 할 수 있는 요소로서 경제의 대상이기도 하다.』

 

- 북한 경제가 자체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렵다는 뜻인가.

 

『그렇다. 외부에서「현대적 경영기법」이 들어가야만 비로서 변화가 가능하다. 효율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하 1백m로 파내려간 평양의 지하철 같은 구조물, 생산 소재를 아끼지 않고 왕창 써버리는 관리 부재의 사업장… 그런 판에 외국으로부터 자본재만 도입한다고 경제가 일어설수는 없을 것이다.』

 

- 자라난 환경을 이야기해 달라.

 

『 나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청송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고등학교는 부산고등학교를 다녔다(61년 졸업). 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81년에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다닐 때 부산의 국제신문을 배달하여 학비를 댔는데 늘 어려워서 등교 정지를 당할 때도 많았다.』

 

- 서울대학 독문과를 나와 독일로 유학을 가서는 왜 경제학을 선택했나.

 

 

독일 유학 가서 경제학 공부

 

『처음에는 독문학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노조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노동청 직원을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어 사회민주주의쪽으로 기울어져 경제학을 선택하게 됐다. 한국에서 독문학을 했던 내가 경제학쪽으로 선회한 까닭은 학생시절 가난했던 경험(독일에서도 여전히 가난했다)이 무의식 속에서 작용했던 탓도 있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동경, 그리고 70년대 한국의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 및 해외에서의 통일 열기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에는 「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하는 선택적 명제가 젊은 학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북한도 우리의 일부」라는 논리에 거역할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튀빙겐 대학을 거쳐 브레멘 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연구한 것은 수리(數理) 경제학 쪽이었다. 역사적인 측면을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 독일에 있는 반정부 단체의 뿌리와 발전과정, 그리고 오선생 자신의 참여는 어느 정도였는가.

 

『 1974년 3월1일. 본의 뮌스터 광장에서 최초의 유신체제 반대 데모가 있었다. 그것은 재독 반정부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 」(민건)가 주도한 것인데 「 민건 」은 초대회장 宋斗律(송두율)(48. 뮌스터대 교수, 서울대 출신)과 작곡가 尹伊桑(윤이상)(75) 등이 중심이 되어 처음에는 55명의 회원으로 출발, 나중에는 4백여명의 회원에다 미국, 캐나다 등지에까지 활동폭을 넓혀간 단체이다. 「 민건 」의 노선은 남한의 유신체제 반대와 남쪽 정부의 반통일적 자세에 대한 비판이 핵심을 이루었다. 당시 이 운동에 가담했던  재독 유학생, 지식인들 중 절반 이상이 지금은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로 활약 중이다.

 

77년에는 재독 노동자 일부가 「한인노동자연맹」을 만들어 북한 정부와 밀착하였고, 78년에는 「 민건 」마저도 교회파와 민족파로 양분되었다. 윤이상이 이끄는 민족파는 노골적으로 용공적, 친북적 노선을 걸었고, 여기에 반대하는 교회파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두 조각이 난 것이다.

 

그 이후 「 민건」은 복잡하게 분화되어 「 한민통 」등 잡다한 단체로 난립되었다가 지금은 「 범민통 」을 거쳐 「 범민련 」의 이름으로 존속해 오고 있는데 윤이상을 대부로 한 북한 정권의 외곽단체로 기능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 조국통일 운동에 큰 손실을 끼친 인물 」로 평가하고 있다. 한때 「 민건 」의 부회장까지 지냈던 나 때문에 해외에서의 친북단체 활동의 기반이 흔들렸다는 뜻일 게다.  나는 북한을 탈출하여 독일에 머문 지난 5년 동안 이념적인 갈들을 겪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나의 「경험」을 말해주고 그들의 「선택」에 도움을 주었다.』 

 

 

출처 : 월간조선 1992.7 일부 발췌

2009-08-29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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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위 ip1 2011-03-29 18:02:32
    난 너희같은 놈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건지 돌대가리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만 나온다.
    좌빨 집안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 있는지???

    범민련의 족보를 대충 알게 되었다.
    윤이상과 송두율이도 뻔한 놈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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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능성제로 ip2 2011-03-31 22:03:09
    북한 애미나이들은 말만 뺀질나게 하지 행동으론 못 옮겨
    그래서 저 나라가 저 모양 저 꼴인거~~ 이젠 같은 민족이라고 하면 안돼.
    이산 1세대들도 다 사라져 가는 마당에 이젠 연결고리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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