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봉은 어떤 사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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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고유환이라는 교수가 쓴 북한의 역사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헌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여쭈어봅니다.
그가 말하기를 68년1월 북한 게릴라들이 박대통령을 어떻게 해보려고 청와대습격에 나섰던 사건이 김일성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건의 장본인은 김창봉과 허봉학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가 그래서 김창봉이를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아 정치범으로 숙청하여 남한에게 자기의 본심을 보여주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도 오래된 김창봉의 역사를 꺼내보이는 것이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알고 있는 김창봉이와 너무도 다르게 서술이 되어 있어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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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완전 폐쇠적이면서 비공개 사회이다보니 북한에 살면서도 모르는 일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남한 분들은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국정원 같은 전문 조사기관에서 연구 발표한 자료들을 책으로 보다나니 경제부문자료 같은 것도 일반 북한사람들 보다 더 잘 압니다.
그러나 저 김창봉 사건과 같이 엉뚱하게 알면서도 마치도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긍지감을 가지는 답답한 분들도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 북한이 <우리말 다듬기>를 오래동안 해온 것만은 사실이지만 ....
가정들에서 사용하는 전구를 <불알>이라고 고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남한 분들은 북한에서는 전구를 <불알>이라고 한다고 완전히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죠.
그리고 언어에서도 북한에는 분명 <그렇습네다.> < 그렇습네까?>라는 말은 ,,,
있지도 않거니와 쓰지도 않는데...
탈북자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것을 북한을 가상한 영화나 대중 용어로 까지
흉내를 내고 있는 정도 입니다.
또한 북한을 연구 한다는 일부 교수 박사들은 ..
북한의 산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온 탈북자들이나...
군대에서도 정말 아니할 말로 염소나 끌고 다니던 탈영병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사실 확인도 없이 종합해서는 북한학 연구 논문이라고 발표를 하군 합니다.
그러면 다른사람들은 그책을 보고는 그대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탈북자들이 책을 쓰는데서도 ...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내기 위하여..
자기를 무슨 영웅시 하며 북한 사회에서 있지도 않은 일들을 꾸며내거나...
또는 뜬 소문으로나 들었던 이야기를 기정사실 처럼 펴 냄으로서 ...
북한에 있는 우리들의 부모 형제들을 인간이 아닌 야만인과 같이 비화시켜 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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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도 김창봉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른 탈북자분들이 더 잘 아는 분들이 있을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김창봉은 간첩으로 몰려 수용소에 간 것이 아니라...
극심한 군벌관료주의자로 낙인되어 수용소에 갔습니다.
그 사건의 기본고리는 김창봉이 남한을 특수부대로 통일 시킨다면서 1960년대 중엽부터
사회에서 세포비서 급들의 청장년들을 모아다가 <농산대>라는 명칭을 가진 특수부대를 창설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 특수부대의 자신심과 용기와 전투력 또한 매우 대단 했습니다.
그 특수부대는 모든것을 자력갱생하여 자급자족하는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황해도에서 그 특수부대와 농민들 사이에 농사를 짓는 논물을 놓고 큰 싸움이 벌어졌고....
그것이 번져서 <농산대>가 황해도의 어느 군 안전부를 습격하고..
안전원들과 장시간동안 총격전 까지 벌이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후 김창봉은 군벌관료주의자로 숙청되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특수부대인 농산대는 100% 해산되여 사회에 내보냈으나 그들에게는 문건에 나쁜 꼬리가 달려서 완전 감시대상으로 전락 되었습니다.
당시에 김창봉은 군대 제일주의를 부르짖으며 군대들의 모든 돼지우리에도 타일을 붙이고 ... 돼지우리 바닥에는 전기난방시설을 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우상화를 부추겼고...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기부터 중앙당에서 권력의 기반을 닦아 나가던 김정일의 눈에 걸려서 숙청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철저히 김창봉은 본인이 당위에 올라서서 영웅으로 놀았던 죄도 있지만 김정일의 눈에 걸리면서... 밀려 낫습니다.
허본학 역시 당시 대남사업을 보면서...예술 영화도 <소대장> 이라는 빨찌산 투쟁시기 자신을 형상한 영화 까지도 만들게 하였으며 이 두사람은 김정일의 수령 후계자 설립을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한마디로 김정일의 수령 후계자 추대에 반대했던 <건방진 항일 투사들> 을 숙청하기
위한 모략에 걸려서 김창봉과 허봉학은 수용소로 갔던 것입니다.
남한 분들은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의 마수에 걸려 죽었는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조금후에 생각나는 대로 다시 알려 드리겟습니다.
그때당시 개정일은 김대에 다니면서 사랑의 놀음에 빠지여서 김일성의 권력후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못하고 있던시기입니다
한마디로 김창봉은 김일성이 모르게 정찰국을 조직하여 정찰국의 행동으로 남한을 통일시킨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인민군 각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고아출신들을 차출하여 부대를 조직하였고 그부대장으로 김책의 아들 김정태를 임명하였다
그때 저의 큰형이 6.25동란으로 고아가 아닌 고아로 이부대에서 근무하면서 남한에 한달에 서너번씩 전투임무로 나가다가 돌아오군하였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1969년 5월에 김일성이 남포에 있는 별장으로 사냥을 다녀오다가 김창봉과 김정태가 술에 취하여 김일성의 차를 정지시키고 그앞으로 지나가는 무소불위의 행동으로 김일성과 함께 타고있던 최현의 심기를 건드리여서 일어난 숙청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영웅아닌영웅으로 대접받으면서 부대생활을 하던 큰형이 970년도에 부대가해산되여 출당과 함께 영웅박탈을 당하여집으로 돌아와서 탄광에서 10년동안 고된노동으로 혁명화의 과정을 거쳐서 영웅은 되찾지못하고 복당만 하게되여습니다
김창봉사건은 그후에 다시 판명이 되어 김일성의 지시로 김창봉과 김정태만 수용소생활로 마감하게 하고 그나머지 인원은 복당시키고 사회생활 하게 되여습니다
더 자세한것은 이부대에서 저의 큰형과 같이 근무하였던 김신조목사님이 더잘알것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군사복무를 하던 연대지휘부가 김창봉이 쓰던 병영이라고 들었습니다. 건물이 얼마나 요한한지 황해도 시골에서 그런 건물은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연대지휘부는 오히려 사단지휘부의 건물보다 더 웅장하고 리모델링이 잘댔습니다. 지휘부로부터 500미터 근처에는 맥주공장이 있었고 파이프로 연결로 맥주가 임의 시각에 밸브만 열면 지휘부에서 마음대로 마시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연대지휘부에서 3킬로미터정도 바다가 쪽으로 가면 중학교건물이 있었는데 그 또한 김창봉의 99칸짜리 별장이었다고 합니다.
님이 말씀한 것처럼 그 지역 토박이들은 김창봉이가 거느리고 있던 잠바부대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더군요. 논두렁물 하나를 가지고도 기관총을 걸어 놓고 잠바부대와 농민들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얘기도 저역시 그때 들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청와대습격과 강릉잠수함사건 같은 북한 군에 의한 공격의 내막을 김일성이가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김창봉이가 북한민족보위상이라고 하는 북한 군의 총체적인 실수권자여도 김일성에게까지 보고하지 않을 정도로 안하무익이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결국 고유환교수가 쓴 책은 청와대습격과 그 시기 감행된 북한군의 공격은 김일성과는 별개로 진행된 군부세력의 일방적인 처사였다고 서술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저는 김일성이가 적화통일의 야망이 전혀 없는 그런 인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북에서는 김창봉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있엇으니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수가 있지요,,,
죄목은 <당의유일사상체계>를 주장하려는 김정일과 정면 대립.
김일성의 부하이지 또 다른 상관은 모른다고 버티다가 죽었음.
청와대습격 사건을 김일성이 모른다고 한것은 <한일월드컵 개최계획을 청와대가 몰랐다는 말 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