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을 존경한 봉하마을 정신병자
근래에는 중국인들도 모택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립니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 정부와 중국인 입장에서 볼 때 모택동은 처치곤란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모택동은 1976년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고 죽었습니다. 그의 이념적 오류로 수천만의 중국인이 죽었습니다.
시장경제 사회로 변모한 현재 중국 입장에서 볼 때, 공산주의자인 모택동은 처치곤란한 인물인 것이죠.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모택동을 존경하라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이 변했고 모택동의 과오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한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봉하마을 정신병자입니다. 노씨의 발언을 듣고 당시 중국정부도 당황했죠. 이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봉하 정신병자는 모택동의 어록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신병자가 자살을 안할수 있나?
펌 /최악의 학살자 모택동
가장 최악의 학살은 모택동 치하의 공산정권 중국에서 저질러졌다. 이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학살 기록으로 올라 있다.
1971년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는, 1949년부터 보고서 발간 시점까지 중국에서 3,225만명에서 6,170만명 사이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1994년 7월17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모택동이 적어도 4,000만명, 혹은 8,000만명 이상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존 리처드 스티븐슨의 저서 중-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중국인 대학살
"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이며 무참한 결말이다"(스튜어트 슈람·Stuart R. Schram, 하버드 대학 교수)
‘대약진운동’으로 굶어죽은 사람만 3,000~4,300만 명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홍위병,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 집에 난입 폭행과 살인 저질러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 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일례로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文革기간 내내 수난을 받은 문화 유산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金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 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 외교부 점거 후 해외 중국 대사관에 혁명 선전·공산주의 선동
중국 문제에 정통한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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