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견자 서대문형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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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이 작은 문으로 들어 갔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이 얼마랴
본동 감방복도
독방해설
독감방. 북한 교화소 독방보다는 크다
감방문.북한 교화소 감방문 하고 매우 흡사하다
유관순 여사
유관순여사가 옥살했던 감방
추악한 일제는 유관순여사를 굴복시키기 위해 정조를 목숨 같이 여기는 조선여성들의 정조관을 허물려고 집단 강간을 하며 치욕을 안기려 했으나 조선독립을 위한 그의 신념을 허물수 없었다. 형무소 식기. 어쩌면 북한 교화소 식기 "또로배" 하고 신통하다.
수인 신발. 북한 구류장 수감자 신발과 똑 같다.
사형장 입구
사형장 건물
교수대. 이 곳에서 일제 시기 수천의 애국자들이 조국을 위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도 선혈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는 역사의 증견자 이다.
사상범들에게 매 놓았던 사슬
죄수 호송시 씌웠던 감투
족쇄
수쇄
물고문
취조실
독방, 북한 교화소 독방 보다 크다
못 상자. 사람을 이 안에 넣고 고문 한다.
벽관 고문, 사람을 세워서 집어 넣고 고통을 준다.
손톱뽑기 고문
영혼 위로실. 이방에는 5천여명의 실 수형자들의 사진이 벽화로 새겨져 있다.
애잘한 음악과 함께 영혼 위로 설화가 흐른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마음 놓으시고 편히 잠드십시오...여러분들이 피와 넋을 받쳐 지키려던 이 땅이 이제는 세상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편히 주무십시오...
광복전 직전까지 2890명의 수감자가 있었던 서대문형무소...이나라 역사의 증견자로서 묵묵히...침통히...흘러가는 세월을 보며 후대들에게 조국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애국선혈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 ... 현 북한은 일제 시대의 감옥 시설과 운영방법을 그대로 유지하며 21세기 까지 왔다. 모든 것에서 흡사한 것들이 많으며 어쩌면 그 방법이 더욱 악날하게 진화 하였을수도 있다. 내 선혈들에게 죄스러우나 감히 말한다면 일제 시대의 서대문 형무소의 시설이 현 북한 교화소 시설 보다 낮다고 한다. 일제 시대의 탄압 방식을 그대로 도용하고 있는 저 북한은 일인 세습독재를 위하여 온 나라를 감옥하 하여 놓은 인민들을 잡아 기생하는 인간 생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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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 이름이 포함된 데 대해, '박정희 신도'를 자처하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9일 "박정희, 신현확 같은 분들은 일제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실력을 길러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이라며 박 전 대통령 등을 적극 감싸고 나서 논란을 예고했다.
조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왜 친북파가 친일파보다 더 나쁜가'란 제목의 글을 통해 "일제 시대에 한국인의 선택은 항일독립운동하여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인가, 아니면 순응하여 살면서 실력을 길러 독립준비를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었다. 적극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된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극소수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이어 "친북좌익들은 이런 사람들까지 친일파로 몬다"며 "국가가 없었을 때의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수단이었다"며 '친일 생존론'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또한 "친일파 인사들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거의 모두가 조국에 충성을 바쳤다"며 건국 주역들이 친일파였음을 강조한 뒤, "극소수의 친일파들만 김일성 편으로 들어가서 국가반역을 계속했다. 친북파들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즉 조국이 있음에도 민족반역자, 학살자 편을 든다. 반성한 친일파와 반성하지 않은 친북반역자, 누가 더 나쁜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 과정에 "친일파의 상당수는 2차세계대전 때 정보가 부족하여, 즉 일제가 승리하고 있다고 믿은 나머지 친일행동을 했다"며 친일행동이 '국제정보 부족'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며, "친북파는 대명천지의 정보화 시절에 김정일과 김일성의 악마적 행동을 다 알고도 이들에게 혼을 팔고 있다. 모르고 한 굴종과 알고 한 반역, 어느 쪽이 더 나쁜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반발하며 우파와 한나라당에 <친북좌파인명사전>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나서는 등, 일부 보수진영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양상이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6436
친일은 생존수단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은 친일파
우파의 빛 뉴라이트전국연합: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반발발기
종북도 삐꾸짓 친일은 더 삐꾸짓이지만
친일삐꾸짓은 애국
종북삐꾸짓은 반역
보수우파의 불편한 진실
독립투사분들을 거꾸로 매달아 우물에 처박았다고 함
그런데도 신기남은 끝까지 그 사실을 부정한다.
실제로 신상묵에게 고문당한 독립투사분들이 나타나자 마지못해 사과.
이미경 부친 - 신기남이 아버지랑 거기서 거기...
일제헌병의 딸
이미경 부친이 저지른 악행은 신기남 부친과 맞먹을 것임.
정동채 부친 - 당시 일제의 앞잡이로
조선농민들을 착취하던 금융조합서기(식산은행 계열)
동포의 고혈을 빨아먹던 악질중의 악질 친일파
김근태 부친 - 일제하에서 훈도
훈도가 무엇인가? 큰 칼차고 일본제국주의 정신주입에 앞장섰던 악질 친일파
김희선 - 남의 조상들을 친일파로 몰면서 재미봄
그러나 정작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부친은 친일 앞잡이 만주경찰이였음 ( 일본명 가나이에이치)
일제첩자로써 독립투사 사냥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고 함.
생존 독립투사분의 증언으로는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베고
사람을 산채로 굶주린 세파드에게 잡아먹히게 했다고 함.
악질 중의 악질 친일파였음.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과거에 남의 조상들이 친일파였다고 공격을 일삼음
하지만 자신부친의 진실이 드러나자 사과한마디 안함.
유시민 - 아버지 일제하 훈도 (김근태 부친과 더불어 가장 악랄한 친일파 중 하나임)
큰 아버지는 일제하에서 면장이었음
조기숙 - 청와대/열우당 권력의 대변인하면서,
맨날 박근혜와 조선일보 못죽여 안달인 그 여자 ...
웃기게도 그가 맨날 죽이려고 하던 조선일본에 의하여,
조기숙은 동학혁명의 원인이 된 친일파 탐관오리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것이 밝혀짐 !!!
아 ...그래서 조선일보를 죽이려고 노력했나 보다 ...하하하
친일파의 후손들이 인터넷에서 좌빨논객으로 수없이 활동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친일매국좌파 세력들은 어찌 그리 후안무치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안타깝다.
일본군관학교 지원 (삼수)
혈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이며 조국(일본)을 위해 개나 말이 되는 충성을 다하겠다'
이름: 다카끼 마사오
일본군관학교 수석 졸업
졸업생 대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일본천황찬양
일본육사편입: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천왕폐하만세'
계급: 소위
작전참여지역: 만주
작전: 항일세력탄압
직위/무장해제: 일제 패망 시 북경 부근에서 작전 중
편입: 광복군
경력: 남로당
생존: 친일파 백선엽에게 동료 명단 제공
기타: 쿠테타
한명으로 올킬 ㅋㅋㅋㅋ
1937년 8월 2일 사설
총후의 임무 - 조선군사후원연맹이 목적
북지사변(중일전쟁)이 중대화하기 시작하자 조선 역시 제국신민으로서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은 1)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며 2)단,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후원의 우려가 없이 제일선의 임무를 다하게 하여 총후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하는 자로, 조선 전도를 통괄하여 조선군사후원연맹이 있고 그 아래 각도는 각 도별로 도군사후원연맹이 있고 도 아래는 다시 부·군·도별로 각 부·군·도 군사후원연맹이 있어 가지고 상하가 긴밀한 연락과 통제 밑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기하도록 조직된 것이다.
황국의 위무선양(威武宣揚)과 동양평화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제일선에 선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안심과 용기를 가지고 신명을 다하게 하는 데는 총후(총검의 뒤쪽)에 선 일반국민의 정신적·물질적 후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1937년 12월 12일 2면 머리기사 (난징 함락을 축하)
황군의 신속한 행동으로 단번에 지나 수도 남경을 무찌르게 되었다는 전선뉴스가 보도하여진 지 불과 수일에 이제 최후의 공성으로 단말마적 저항을 계속하던 남경성도 10일 밤으로 완전 함락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남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그동안 총독부에서 각도에 미리부터 전달한 바에 의하여 준비가 진행되어 있던 `남경함락축하제'는 이제 전 조선적으로 집행하게 되어 명 12일에 일제히 경성을 비롯한 전 조선 각 주요도시와 군 면 촌을 통하여 남경함락 전승축하행사로 학생생도들의 기행렬, 제등행렬, 봉고제 등이 벌어질 것이다.
1938년 1월 1일 1면 머리기사 (내선일체 찬양)
미나미 총독의 제일성은 선만일여(鮮滿一如)의 표어하에 전민중의 시선을 만주 내지 북지(北支)에로 일전(一轉)시키었다. 이같이 하여 조선 만주간의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 주력하였다.
조선인 이민 문제의 새로운 양해, 양지(兩地)의 경계 건설의 제휴, 교통통신망의 정비, 조선인 관리의 만주 진출 등 양지의 관계는 배전·긴밀하여졌다.
그 다음에 미나미 총독의 새 표어로 제창된 것이 내선일체(內鮮一體)이다.
일선동화(日鮮同化)도 내선융화(內鮮融化)도 옛말로 돌린 내선일여(內鮮一如)에서 내선일체로 재전(再轉)한 것이다.
이는 지역을 주로 한 경제적 제휴라든가 하는 것보다는 직접 조선 민중을 상대로 한 국민으로서의 신념상 의무, 권리의 동등을 전제로 한 내선 양족의 동족친화감을 깊게함에 있었다.
물론 이 실적은 괄목할 것이었다
1940년 10월호 권두언
광고무비(曠古無比)의 시국하 광휘 있는 황기(皇紀) 2600년과 함께 금 10월1일로써 시정(한일병합)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회고하건대 지금부터 만 30년 전 동아의 시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위급존망의 추에 당하였던 명치 43년 8월22일 일한 양국은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하고 그대 29일부터 이것을 공포실시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은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
30년 동안 7대에 이르는 총독들은 그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특색있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 결실시켰다.
2300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를 실천해 황국신민 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사려 깊은 시정(한일병합) 30주년을 맞이하여 각각 자기의 시국인식을 반성하고 시국의 장래를 투명하게 관찰하여 일층 각오를 굳게 하고 또 일단의 노력을 더하여 그 명예를 선양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건 유툽에 오른 엠비시뉴스
http://www.youtube.com/watch?v=znpQWlKTX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