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아리랑'과 중국의 음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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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아리랑]'김일성 아리랑'과 중국의 음모 [뉴시스] 2012년 06월 18일(월) 오전 07:31 【서울=뉴시스】김연갑의 '아리랑' <4>소련의 붕괴 이후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강화가 55개 소수민족 중 14위인 조선족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동안 중국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의 조선인 항일투쟁을 수도 북경을 일제에 유린당하지 않게 해준,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 평가해왔다. 이런 관계론을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내세우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이런 관계는 무시되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감(천안문사태), 개혁·개방 정책에 의한 지역간, 계층간, 도농간 빈부격차 등으로 불만이 고조되고,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이 제기되어 신강 위그루 자치구나 서장 티베트 자치구의 독립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는 현실적 고민을 이 논리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논란으로 대두된 만리장성의 연장 논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이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동북3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은 한반도 정세변화, 즉 북한의 정권붕괴나 한반도 통일 같은 변화에 대비한 전략지(고구려연구재단,『만주』, 2005, 252쪽)이기 때문에 이를 회유, 관리하는 차원에서 전통문화를 보존시킨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아리랑을 상징적으로 대상화 한 것이다. 조선족들은 이 문제를 회유책이 아닌 특혜로 인식할 수 있다. 실제 2006년 만난 연변의 원로 음악인들이 “중앙정부가 조선족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고맙다”고 하는 것을 보았고, 문화부 후원의 <아리랑 국제학술대회>에서 조선족 동포 발표자가 “민족의 미래와 먼 장래를 위해서 이러한 문화적인 것들을 좀더 넓게 선전하고 좀더 깊게 연구하였으면 한다” (장익선, <중국에서의 아리랑이 지닌 상징성>, 아리랑국제학술대회 논문집, 2011, 161~179쪽)고 하면서도 중국의 아리랑 지정을 ‘중앙정부의 큰 배려’라고 발언한 사실 등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이 학술대회가 ‘중국 아리랑사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임에도, 이에 대한 반성이나 대응 논리 개발은 고사하고, 기획의도나 실행 과정에서 이를 문제의식으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물론 5월에 개최된 국립민속박물관 주최의 <아리랑특별전시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맹성을 촉구하게 한다. 그동안 남측의 일부 학자들이 동포사회 민속에 대해 단지 논문 소재 대상으로만 활용하고, 일부 신문·방송이 특집기사나 프로그램의 대상으로만 활용하고, 또한 한국에 나와 허드렛일로 사는 동포들에게 동포애를 발휘하지 않은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속적 연구 프로잭트로 2002년 시작된 동북공정판공실(東北工程辦公室) 주관의 5년 사업 동북공정의 논리는 현실에 적용되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미래 국가전략을 역사연구라는 이름으로 이론화한 국가적 연구사업이다. 즉, 영토적 통합을 강화해야 할 중국 정부로서는 고구려·발해인을 중국 민족으로, 이들 왕조를 모두 중국 역사로 규정함으로써 중국의 국가정체성인 ‘통일적 다민족국가’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민족의 자긍심과 역사적 자부심을 고취시켜 중국 국민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사실상 편입시켰다. 이는 남북한 통일 후 있을지 모를 만주지역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연고권 주장을 사전에 차단하고, 북한 유사시 개입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 두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여기에 청사(靑史)의 서술이 더해지면, 중국의 한반도관과 정책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중국은 대미, 대일전략 차원에서도 한반도를 자국역사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기고···”(지해범, <조선은 중국의 속국인가 외국인가>, 《월간조선》, 2012, 3.) 알려진 바대로 신채호는 이미 70여년전, “한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민족이 강성해지며, 타민족이 득하면 한민족이 열퇴한다”는 고구려 ‘구강수복론’(舊疆收復論)(단재 신채호전집, 별집 234쪽)을 『朝鮮上古史』에서 설파했다. 여순감옥에서 어떤 참고문헌도 없이 이 책을 저술한 천재적인 민족주의자인데, 이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싹쓸이식 신식민사관’의 출현인 것이다. 아리랑이 한민족 상징이라는 사실과 북한이 연례적으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개최하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국무형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를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 운운하는 것은 북한과의 특수 관계에 의한 결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아리랑> 조·중합작과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중국 지원설 등이다. 이를 확대하여 아리랑을 세계유네스코에 등재하는 일도 공동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은 2006년 <고구려고분군>을 조중 공동으로 등재하였다) 5월4일자 한국일보 <중국 이웃끼리 아리랑 나눠 갖자 생떼>에 의하며 세계유네스코 아리랑 신청을 공동으로 하자고 했으니 이는 이미 북한과는 논의를 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중의 긴밀 관계는 매우 우려스런 상황이다. “군사력이 동원되지 않았을 뿐이지 티베트 상황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태다. 우선 항미원조 전쟁을 통한 전통적 유착관계와 이를 기저로 한 현실 유착관계의 심각성이다. 즉, 중국은 엄연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의 공산 측 당사국이라는 사실로, 1961년 체결한 <조·중우호협력조약>이 군사 보호막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게 되면 정전협정은 자동 폐기되고 중국군의 개입은 국제법상 보장된다. 이것이 중국의 북한에 대한 동맹적 협력과 북한의 냉전적 통일전략을 유지하게 하는 구조적 배경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제적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관리방식은 소위 ‘현상유지 플러스’(status quo plus), 즉 ‘2(남·북)+2(미·중)’ 포맷으로 미중 양국 이익의 균형점(balancing of interest) 유지이다. 그러나 미·중간에는 한반도 문제해결의 최종상황(end state)에 대한 합의점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두 강대국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문제’이다) 이런 난맥상과 아리랑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동포들의 집거지인 동북삼성은 북한과 인접한 지역으로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투쟁 거점이다. 여기에서 빨치산 활동으로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김일성과 김정숙의 존재를 알렸다. 바로 이 두 전투에서 아리랑이 불렸다는 사실은 북한의 아리랑 사업 근간을 이루는 논리적 배경이다. 이를 동포사회와 관련하여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특히 동북삼성 일대에서의 항일투쟁은 동포사회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약품이나 무기나 식량 조달은 물론, 정보 등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동포들과 항일 독립운동 전선과는 긴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간파한 일본 토벌대는 첩자를 두는 등 이 지역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 결과 동포들의 피해는 전선의 피해와 일치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리랑은 투쟁의 한 무기가 되었는데, 바로 암호로 불렸다. 이런 사실은 이미 80년대 중국민족대학 황유복 교수의 구체적인 자료제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토벌대와 독립군들과의 투쟁에서 아리랑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이다. 북한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그리고 다부작(多部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의 아리랑이 이 상황과 역할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동포사회의 아리랑 상황은 동포사회에 중첩된 의미로 존재한다. 곧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조국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한탄, 타국에서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항일의식의 한 표방으로서 불렸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는 1930년대 후반기는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였다.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중국 군벌의 도움으로 힘겹게 유지하던 항일투쟁이 어쩔 수 없이 지하화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 소식은 중국과 국내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보도한《동아일보》호외를 1998년 10월 방북 <동아일보> 취재단이 금동판으로 새겨 기증했고, 이는 북한 금수산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 경찰을 완벽하게 격퇴한 이 두 지역 전투는 대승이었다. 바로 이 전투에서 아리랑이 동지로서 기능했다. 이 사실은 김일성의 전기『세기와 더불어』에 기록되었고,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형상화 되었다. 보천보 전투는 함경남도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면 보전(堡田)을 만주의 김일성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와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합작하여 전개한 전투로 1937년 6월 4일 밤 기습, 일방적인 대승을 거둔 전투다. 빨치산 부대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은 것으로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과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으로 군사적 성과 이상의 정치적 성과까지 거두었다. 동아일보의 경우는 호외(이 전투로 1937년과 38년에 대대적인 일제의 검거 열풍이 있었다. 이로써 재만조선인 조국광복회의 장백현 조직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와해되었으며, 총 739명이 체포, 이중 권영벽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하고, 박달은 1938년 체포되어 조선총독부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까지 발간 할 정도로 김일성의 전설적인 명성을 알렸다. 그리고 일본군과 만주국 국경 연합부대와 부응동 근처 간삼봉에서 전투가 벌어져 역시 대승을 거두었으니 본국에서 증파한 일본 군경의 대대적인 추격을 받아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참혹한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된 것이다. “간삼봉 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중심을 비춰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 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었으며 나중에는 인생 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는 것이다.” (세기와 더불어, 제6권, 1995) 이 두 전투를 최근에 들어서야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사실로 언급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미 일반화 된 김일성(이 시기의 기록에는 본명 김성주가 아닌 김일성으로 나온다. 1931년 적위대에 입대할 때 김일성으로 바꾼 것이다. 와다 하루키 지음, 이종석 번역,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 1992, 창비사, 86쪽)의 간삼봉전투 상황 일부이다. 이는 당시 <매일신보> 7월 9일자가 보도한 <토벌대와 교화 중에도 노래 부르는 女黨員,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라는 기사도 보여주듯, 전투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은 공연을 열었는데, 그 중에 아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젊은 여성 유격대원들이 이 와중에 아리랑을 합창하고 있는 것이다. 1절은 우리가 다 아는 가사에다 2절에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저기 저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섣달에도 꽃만 핀다”(김상일, <간삼봉에 울려 퍼진 아리랑, 그리고 ‘아리랑’ 공연> 2007)와 같은 구체적인 해석을 한다. (이 상황은 북한이 ‘아리랑은 항일 혁명의 동지이다’라는 말과 함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등의 작품에서 아리랑을 수용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 전투의 성과 여부를 떠나 김일성의 항일 전투에 아리랑이 함께 했음을 수용하게 한다. 이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김일성아리랑’을 특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바로 이 아리랑을 중심으로 한다. 소위 ‘내재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런 아리랑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노래인 것이다. 최근 연변지역에서 발매된 CD <조선민요Ⅰ아리랑>에는 이 전투와 아리랑 상황을 형상화한 <간삼봉에 울린 아리랑>(arirang echoed through jiansanfeng)(이 음반의 표지에는 발행처가 <길림민족록음록화출판사>로 되어있으나 음반 내부에는 ‘DPR KOREA’로 되어있어 그 저의를 의심케 한다. ‘김일성 아리랑’의 아리랑을 음반으로 자유롭게 유포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런 인식에 동의했다는 것은 공조의 실상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이 수록되어있다. 신운호 작사, 전민철 작곡의 창작곡이다. (총 3절이다. 이 중 제1절은 “보천보에 횃불올린 혁명군은 기세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지산 녀장군이 선창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능선마다 뇌성타고 울렸네”이다) 이 같은 김일성의 항일활동에 배경을 두었다는 아리랑에 대한 해석은 저항성에 가치 중심이 주어진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 북한문화와 공유한 동포사회에서는 일관되게 유지된 인식이다. 그런데 이 맥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음반의 포장에는 <길림민족록음록화출판사>가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내부 해설지에는 'DPR KOREA'로 되어있어 동포사회와 아리랑의 해석과 제작의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회의 조직체계를 이해한다면 이것이 중앙정부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중국이 아리랑을 자국 무형문화재로 등재한 사실에 대한 정치·문화적 배경을 살폈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북한과의 다소 복잡한 역학관계가 얽혀있음을 알게 한다. 정리하면 중국 동포 사회의 모국 전통문화, 그 중 아리랑의 지속과 변이의 축은 이제 중국의 한반도 전략 관계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후원 신나라레코드>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www.arira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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