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위엔에 팔려 간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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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위엔에 팔려 간 삶
최영림(가명) 1992년생 양강도 혜산 출신 2009년 탈북 2011년 한국 입국
나는 양강도 혜산 시에서 516 건설사업소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함경남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992년에 태어났다. 내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으며, 가족들은 지금도 북에 남아있다.
우리 집은 무척이나 가난해서 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도, 배불리 먹어본 기억도 없다. 어릴 때부터 학교 대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기도 하고 어머니와 과일과 나물 장사를 하기도 했다.
2005년, 내가 열 살 때, 우리 가족이 살던 하모니카 집 한 가구에서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다. 이렇게 집을 잃고 우리 집의 가세는 더욱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직접 벽돌을 모아 집을 세우기 전까지 우리는 남한에서 말하는 노숙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척 집에 얹혀살기도 했는데 툭하면 “집도 없는 것들이”라는 말과 갖은 핍박을 받곤 했다. 동생과 나는 벽돌을 줍기 위해 길거리로 나갔고, 어머니는 건설사업소 사람들에게 술이나 식사를 팔면서 돈을 모으거나 벽돌을 받았다.
아버지가 빚까지 지게 되자 우리 집 형편은 더욱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위출혈로 쓰러져 입원했고 어머니도 난소에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아버지 건설사무소 동료들이 도와줘서 병원비는 어렵게 마련할 수 있다. 내가 아픈 것은 견딜 수 있겠는데 부모님이 아픈 것은 견딜 수 없었고, 그때의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고 밖에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살던 혜산은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이다. 혜산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돈을 벌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서 빚을 갚고 아픈 부모님을 돕고 싶었다.
나는 강둑을 세 번이나 서성거리며 중국으로 갈지를 고민했다. 결심이 섰고 어머니에게 중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내 손을 부여잡으며 “너가 어떻게 그러나..어머니를 떠나지 마라.”라고 눈물 고인 모습으로 말리셨다. 그날 밤 부모님이 “우리 때문에 영림이가 중국을 가려고 한다. 이를 어쩌냐”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뒤에 남겨지는 부모님이 눈에 밟혀 눈물이 왈칵 났다.
중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어머니는 내 손을 끌고 자장면 집을 갔다. 난생 처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한껏 먹을 수 있었다. 열심히 음식을 먹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그립다.
2009년 3월, 내가 중국으로 넘어가던 날의 압록강은 얼어 있었다. 중국으로 가기까지의 강의 길이는 짧았지만 행여나 당국에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늘을 입에 물고, 잡히면 그대로 바늘을 삼킬 심정으로 얼은 압록강 위를 뛰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강둑을 넘고 강을 건넜다. 당시 나는 오로지 북한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자 나를 기다리는 것은 검은색 차량이었다. 한 40대 중년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공안에게 붙잡히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조선말로 말했다. 의심은 갔지만 북한 땅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가고자하는 마음으로 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남자는 피곤함을 덜어줄 거라고 약도 한 알을 건넸지만, 나는 삼키는 척하고 이빨 사이에 넣었다. 그때 무엇인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차는 나를 태우고 점점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가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몇 시간 쯤 갔을까 남자는 나를 어느 시골 마을의 창고 같이 허름한 집에 내려놓았다. 이곳은 아예 도망 칠 엄두도 내지 못할 시골이었고 사람도 별로 없는 그런 곳이었다. 북한에서는 못 살아도 그래도 시내에서 살았는데 이렇게 허름한 시골 중국집을 보고 놀랐다. 이 한족 집에는 할머니, 고모, 며느리, 30 살 아들, 그리고 두 살 된 아기가 살고 있었다. 나는 중국 돈 2만원에 그 집 식모로 팔려갔던 것이다.
한족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8개월 동안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그나마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내가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집에서 갇혀서 하루 종일 TV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틀 연이어 TV를 보고 있으면 머리도 아프고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에 있으면서 많이 울었다. 가을에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났고, 하늘을 보는 것도 눈물이 났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 보다 심적으로 괴로운 게 더 컸다. 하늘이면 하늘, 달이면 달에게 이 집에서 내보내달라고 빌었다. 단 하루라도 조선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장마당에 가는 길에 도망쳐 나와서 전부터 알던 어느 조선 여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는 북한에서 아들을 하나 데리고 중국으로 온지 얼마 안됐고 나는 그 아들을 돌보면서 두 달간 있었다.
두 달 후 모자는 시내에 나갔다가 공안에 붙들리고 말았다. 아들이 공동변소에서 앞에서 놀다가 중국 애들과 시비가 붙어 중국 아이를 때렸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와 중국말로 말을 걸었다. 아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중국인은 공안에 신고를 해버렸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잡히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이를 뒤따라오면서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붙잡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 주변을 돌았다. 결국 변소 안에 하루 종일 있다가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있다가 나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나는 (팔려갔던) 한족 집 고모의 친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당시 내가 일하던 집 밑에 살고 있었는데 공중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보고 어디론가 찾아오라고 하는데 당시 중국어를 잘 못하는 나는 그대로 따랐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내가 식모살이하던 집 가까이로 불렀고, 결국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30살 한족가족 아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잡아간 거라고 열심히 변명했지만 한족 가족들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한족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묻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집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온갖 수모를 참았지만 이제는 그런 희망조차 사라졌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가치 없이 산다는 것이 느껴져서 괴로웠다.
거울을 보면서 “어? 내가 살았네. 어떻게 용케도 살아있네”라고 물을 때가 많았다. 정신도, 기억도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북의 친구들과 어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훔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멍하니 아무런 감정조차 없어졌다. 그리운 어머니도 생각나지 않았고 집도 양강도라는 정도만 생각이 났다.
“여기가 현실이 맞나. 내가 죽었나? 죽어도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날은 잠도 안 자고 새벽 2-3시에 일어났다. 일도 하기 싫으면 내팽개쳐버렸다. 그러자 그 집 며느리는 내가 밖에서 나쁜 사람에게 맞아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나를 아껴주던 할머니는 “나쁜 놈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라며 안쓰러워서 쓰다듬기도 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면 “나쁜 놈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들은 나를 여전히 괴롭혔다.
5월 5일, 중국의 명절이 되자 시내에서 돈을 벌던 아들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인사도 하지 않자 “왜 그러는가? 한번 도망치니까 또 도망치려고 하는 건가?”라고 비꼬았다. 그 전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는데 이제는 드러내놓고 못되게 구는 것이다. 내게 “또 한 번 가보지?”라며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내 심정 누가 알겠나’라는 마음으로 피했다. 그가 일어나라고 소리쳐도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나를 밀치고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약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 마침 감기에 걸려서 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한 20분 정도 지나자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쓰러졌다. 할머니가 달려와서 나를 깨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놀라서 고모를 불렀고, 곧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위세척을 시켰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째 되자 아들은 내게 미안한지 말을 걸었다. “동생아 왜 그러냐. 오빠가 그렇게 나쁜 놈인가?” “제발 이 집에서 내보내주세요.” 나는 이틀 동안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일으켜 무릎 꿇고 빌었다. “보내주면 어디 가겠나?” “한국을 가겠어요.”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코웃음을 쳤다. “너 생각이 야무지구나. 한국가면 누가 너를 받아주겠는가? 너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너를 받아주겠는가?” “보내만 준다면 한국을 갈 수 있어요.” “놀고 있군. 사람들이 다 너를 놀리는 것이다. 갈 수 있으면 한번 가봐라. 여기서 서너 발자국만 걸어도 경찰이 와서 너를 잡아간다.” “여기 더 있다가는 말라 죽겠어요.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누가 너를 말라 죽이냐? 우리가 너를 못살게 구냐? 우리 집에서 너 먹고 싶은 거 다 해주고, 입고 싶은 거 다해주는데.” “당신네 집에서 생활했던 돈은 갚을 테니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나는 애원했다. “네가 여기서 중국인으로 인정받는다면 일할 수도 돈도 벌 수도 있겠지만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말라 죽어도 여기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여기서 신분도 없고 죽어도 너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어.”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내 목숨은 짐승의 것보다 못했다. 내가 죽어 시체를 쓰레기장에 갔다 버려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슬픔에 못 이겨 또 자살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동맥을 끊었다. 약을 먹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동맥 끊을 때는 머리 중간에서부터 바늘로 찌르면서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심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북에서 나를 힘들게 키워놓았는데 나는 비참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죄송했다.
손목에서 피가 흘렀고 고통스러워서 옆에 있던 의자를 쥐어뜯고 뒹굴었다. 그러자 그 집 아이가 보고 “아지미가 피로 장난한다”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달려와서 나를 치료했고 덩달아 고모도 말렸다. 고모는 “도망치더라도 조금이라도 몸이 건강해져야 도망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달랬는데 생각해보면 그 말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그때는 너무 소박하게도 이 말 한마디가 힘이 되었다.
두 번의 자살시도 끝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강냉이가 익을 때 도망가리라 다짐했다. 석 달 후 마침내 강냉이가 사람 키만큼 자랐다. 2010년 7월 29일은 보름달이 떴고 비가 왔다. 주의를 살피다 밤 11시 반에 담장을 몰래 넘었다
이번 잡히면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 북에서 강을 넘었을 때보다 더 큰 각오로 임했다. 동맥도 끊어 보았으니 지니고 있는 칼로 내 목이라도 못 찌를까. 한번 해보니 무서울 것도 없었고 죽자고 마음먹었는데 못 할게 없었다.
한족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9미터나 되는 담장을 넘어야했다. 담장을 바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야외에 위치한 화장실을 타고 올라가야했다. 화장실은 변소에 뚜껑이 없는 푸세식이라 발을 잘못 디디면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 담장을 맨발로 올라갔다. 담장에 올라서서 강냉이 밭이 있는 밑을 내려다보니 내가 뛰기엔 너무 높다. 하지만 눈을 딱 감고 뛰어내리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냉이가 한참 익을 때라 얼굴이 긁히고 상처가 낫지만 일어나서 정신없이 한참을 뛰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집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차로 2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걸어서는 한참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내에 나가려면 버스라도 타야 갈 수 있다.
나는 강냉이 밭에 숨어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따라 비가 왔는데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는 강냉이 밭에서 김매는 시절이니까 날이 화창했다면 밭일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냉이 밭에 숨어 있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인다. 바깥을 주시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동안 도망치기 위해 도와달라는 중국어만 골라서 공부했었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있으니까 사투리도 많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나는 중국 사람인데 다른 먼 지역에서 돈 벌러 와서 이 지역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때려서 도망 나왔다. 친구한테 전화를 할 수 있게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내가 중국말을 잘 하니까 그는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신발도 못 신고 도망 나온 것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메이자 얼마나 불쌍한가. 어디까지 가나? 내가 데려다 줄까”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돈 백원과 지니고 있던 전화기도 원래 바꾸려던 거였다며 내게 선뜻 주었다.
북한여자들은 중국집에서 도망쳐 나와 의지된다고 조선 사람을 많이 찾아간다. 하지만 한 민족이라 찾아갔다가 다시 팔려가는 경우가 많고 이 사실은 가슴이 아프다. 나 또한 그럴 뻔했다. 나도 한족 집에서 도망쳐 나와 어느 조선여자를 찾아갔다. 이 조선여자는 중국인에게 시집와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중국인 시댁에는 미혼인 첫째 아들과 이미 혼인한 둘째가 있었다. 처음에 이 조선여자는 딸 같은 내가 오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잘 대해줬다. 시아버지도 내가 중국말을 잘하니까 좋아했고 며느리를 삼겠다고 며칠 동안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으로 가겠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사실 시골에서 중국여자와 결혼하려면 많은 돈을 내고 사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 집에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또 동네에서 북한여자가 결혼하면 잘한다더라 하는 인식 때문에 나를 쉽게 받아들였다. 이 시아버지는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는 아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 북한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조선여자도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여자도 나를 팔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시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이 집 며느리를 하겠다고 했다. 아들과는 얼굴은 한 번도 못보고 전화연결 해보았다. 오로지 그가 시내 큰 공장에서 물품 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 나는 한국을 당장 못가더라도 살다가라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다면 이집에 잠시 있는 동안이라도 이 가족을 실망시키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 한족 가족은 나를 돈을 주고 사오지 않은 탓에 자유롭게 내보내 주었다. 이집에서 나의 명칭은 며느리였고 가족들도 ‘네 방’이다, ‘네 집’이다라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했다. 시아버지도 나를 중국여자 못지않게 대해 주었고 남편 될 남자도 내가 중국말을 잘하니까 한 달 동안 매일 전화했다. 심지어 나에게 만원까지 줬다. 내가 그 사람에게 나는 “중국여자를 아내로 들이려면 적어도 20만원씩 드는데 당신은 돈이 안 들지 않나. 내 어머니가 힘들게 북한에 있으니까 북한에다가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돈 만원을 북한으로 송금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의 사촌가족(시아버지 사촌동생)이 모였다. 그런데 사촌가족의 며느리도 북한 여자였던 것이다. 북한에서 온 언니 은희(가명)를 만나서 기뻤고, 이 22살 언니는 키 1m 70cm에 너무 예뻤고, 당시에 중국인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니의 사촌이 한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는 사촌과 연결을 시켜달라고 했고 결국 이 언니와 함께 둘이서 시골에서 도망쳤다.
중국에서 한국행으로 가는 길에 잡혀서 북송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라는 말도 들었다. 북한에서 강을 건너다가 걸리면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을 오다가 잡히면 범위가 넓어진다. 나와 언니는 또 약을 들고 있었다. 잡히면 총살당할 지도 모르니 그 전에 먹고 죽으려고 했다.
청도에서 곤명까지 오는데 3일이나 걸렸다. 나와, 언니, 언니의 어머니까지 3명이 움직였다. 심양에서부터 우리는 북한언니 사촌이 소개시켜준, 얼굴을 본적도 없는 한국인 브로커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브로커는 한국에서 우리와 연락했기에, 나는 우리가 어떻게 되든 이 사람은 절대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중국말도 잘하니까 브로커가 필요 없었다. 신분증만 보여주지 않으면 북한여자로 의심받은 적은 없었다.
중국의 국경을 넘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잡히면 총살이다. 그때 나는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감기에 걸려 몸이 아팠다. 아프니까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귀도 안 들렸다.
곤명에 도착하자 브로커를 통해서 모여진 16명의 북한사람이 있었다. 모두 힘들게 산을 넘고 이제 태국으로 가는 강 하나만 건너면 되었다. 이 중에는 4살, 6살 되는 아이들도 두 명 있었다. 북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업고 산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차 소리가 들렸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살겠다고 모든 짐을 내팽개치고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몸이 아픈 상태에서 뛰다가 넘어졌는데 언니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알고 봤더니 하지만 사실 그 차량은 우리를 강까지 데려다 주러 온 차였던 것이다. 라오스에서 강을 건널 때는 보트도 아닌 나무 쪽배를 타고 건넜다.
태국에 도착해 우리는 9일 동안 메사이 감옥 있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알량미 밥을 두 끼씩밖에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일찍 내보냈다는데 우리 16명은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메사이에서 치앙라이로 옮겨져 8일 동안 있은 후 방콕에서 2달 정도 있었다.
나는 방콕 수용소에서 국정원 사람들과 면담할 때 북한사람이 아니라는 오해를 받았다.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조선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고 북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 김정일에 대해서나 북한가곡을 하나도 몰랐다. 오로지 아버지 직장만 알았고 그 누구도 내가 북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행이 1주일동안 연기되었다. 국정원 사람들은 내게 북한사람이라고 거짓말한 댓가로 방콕에서 2년 감옥으로 갈 수 있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다행히 아버지 직장 분이 그곳에 있어서 516 건설사업소와 아버지를 확인해서 2011년 2월 한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4월 29일, 하나원 청소년 반에 배정되어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당당하게 교복이라는 것을 입어 보구나하고 감격했다. 요즘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학원을 다닌다.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에 창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다. 중국 하늘을 올려다 볼 때는 내가 과연 한국을 갈 수 있을까, 언제갈 수 있을까라고 올려다봤었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님 생각이 나 혼자 행복한 것이 죄스럽다. 어머니가 내가 다른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선생님과 함께 내 소개도 한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또 자원봉사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도 하는, 이런 대견한 내 모습을 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전까지는 정신없어서 이런 생각 못했는데 이제 지나온 일 생각하면 감격스럽기도, 죄스럽기도 하다.
한국에 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1분 1초도 해본 적이 없다. 북한과 중국에 있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았다. 특히 중국에 있을 때는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서러웠다.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 착하게 살면 내 주변은 착한 사람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인생의 목표는 첫째는 착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는 열심히 사는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북한 아이들은 삶에 대한 의지는 많은데 힘들게 노력한 것만큼 대가를 못 받아 억울한 것이 많다. 내가 가장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 아이들은 배움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혜산에는 강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 내 동생도 한국을 오고 싶어 한다. 동생은 노래도 잘하고 똑똑해서 공부도 잘 할 것이다. 꼭 데려오고 싶다.
중국의 시골에 살고 있는 북한 사람들도 한국을 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다가 잡히는 게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한다. 중국은 김정일과 가까우니까 북한사람들을 잡으면 북한으로 보내는데 한국으로 보내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http://kor.nkhumanrights.or.kr/board/bbs_list.php?board_table=bbs_e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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