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는 일종의 축복이다. 흉터는 생애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많은 도움을 준다. 살아가는
어느 순간 자기 만족을 위해서든 혹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든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려 할 때마다 그 흉터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니까(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음악에서 흉터는 어떤 역할을 할까? 다른 악기에 비해 유독 상처나 흉터에 닿을 때 더 예민해지는 악기. 특히 탱고나 러시아
음악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아코디언의 경우는 말이다. 아코디언 연주자 채수린(48?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생활음악과 초빙교수)
씨의 연주를 들어 본 이들은 “소름끼친다” “아프다” “눈물 난다”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저는 가령 와인색을 두고 붉다거나 하는 어떤 규정된 색으로 부르지 않아요. 세상에는
명명할 수 없는 게 많지요. 음악도 그저 들려줄 뿐이지, ‘이 음악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연주할 때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어요. 다 내려놓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는 스스로 “천성이 아코디언 연주자로 타고났다”고 말한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남성코리아합창단 공연 반주, 서울 팝스오케스트라,
수원시향 등과 협연하고 각종 콘서트에 참여했다. 연극과 영화계에서 그는 ‘북한말 트레이너’로도 유명하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나의 결혼원정기> <님은 먼 곳에> <만남의 광장> 등에서 배우들에게 북한말을
가르치면서 북한사람들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7년 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이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예술대학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했다. 그의 집은 북한에서 손꼽히는 음악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해외유학을 다녀온 음악가로, 어머니는
북한에서 첫손 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가 바순 연주자가 됐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고
가담했던 일이 정치적으로 비화됐고, 그는 가족들을 남겨 놓고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왔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의 옛 명성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전 언제든지 바닥에 앉아 연주할 수 있어요. 지하철 무대든, 양로원이든 연주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어요.”
한국에 온 후 가장 어려운 게 생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북한을 떠나면서 유일하게 지니고 온 아코디언을 생활고 때문에 전당포에
맡기기도 하고, 자살기도도 여러 번 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연주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가장 괴로웠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사람들이 들이닥쳐 피아노를 빼앗아 간 적이 있어요. 북한에서는 때때로 이해 못 할 일들이
일어났죠. ‘피아노 내놓으라’고 엉엉 울다 이틀 동안 앓아누웠어요. 그때 아코디언 소리가 들렸죠.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을
손풍금이라고 부르는데, 그때 집에 아코디언이 있었거든요. ‘내가 해볼래!’라며 아코디언을 잡았죠. 그리고 ‘엄마, 나는 이 소리가
너무 좋다’ 하면서 아코디언에 매혹돼 피아노를 잊었어요.”
생명 같은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맡기고 온 날에도 그는 어릴 적 피아노를 뺏겼던 때처럼 죽음 같은 절망에 빠졌다고 한다.
“기절한 것처럼 이틀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어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였죠. 이틀을 기절한 것처럼 움직이지도 못했어요.
주변에서는 접시닦이라도 하라고 하는데, ‘아무것이 없어도 난 채수린이야’라는 자존심이 남아 있었지요.”
그때 거짓말처럼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의 음악을 들었던 이들 중 악기점 주인은 “천천히 벌어서 갚으라”며
아코디언을 선뜻 내주었고, “무거운 아코디언을 가지고 다니려면 차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아무 조건 없이 마티즈를 사 준
할머니도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음악을 하라’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파울로 코엘료 말처럼 그에게 흉터는 음악가로서 깊이와
폭을 갖게 한 축복이 되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북한말 트레이너
2003년에는 연극에도 출연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의 첫 내한 연출로 화제를 모은 연극 <보이체크
Woyzeck>에서 악사(아코디언) 역할을 맡은 것. 그는 이 연극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음악으로 그려 냈는데, 그의
강렬한 탱고 선율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때 이후 그의 활동 영역은 연극, 영화계로 확대됐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팀에 합류해 8개월간 배우들에게 북한말과 풍습을 알려줬어요.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 북한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어요. 새끼 꼬기부터 일상적인 생활 습관까지 모두 코치해 주었어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숨은 공이 컸다.
“북한말이라고 한 가지 사투리로만 표현할 수는 없어요. 임하룡 선생은 평안도 지역의 농군,
정재영은 평안도의 노동자로 분했죠. 또 함경남도의 남자가 등장하지요. 소심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진심은 뜨겁지요. 미친
여자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던 거지요.”
그는 “사람 복이 많은 것 같다”고 하지만, 그의 열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천안에서 밤 10시에 강의가 끝난 날도 영화 촬영장인 해남까지 달려갔다고 하니. 그는 최근 제천국제음악영화제 5주년 기념 앨범에서 영화 <형사>의 OST 작업을 해금연주자 꽃별, 가야금연주자 정민아 등과 함께 했다.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다른 연주자들이 “선생님! 좀 쉬세요”라고 권해도 그는 무대에 서는 순간까지 아코디언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코디언에 오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내 호흡으로 열을 내야 하거든요. 이 호흡을 놓치면 아코디언이 나를 인도하지 않아요.”
아코디언은 최소 12kg 이상 나가는 무게에 멜빵을 어깨에 메야 해 사람보다 악기가 먼저 보인다. 다른 연주자들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연주하는 게 부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보기에 흉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큰 것을 여자가 안고 있으니까요. 하하하…. 저에게는 음악이 중요할 뿐 연주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요즘도 새벽에 일어나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 베개가 흥건히 젖어 있는 날이 많다고 한다. 꿈속에서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난 게 아닐까? 그래로 눈을 뜨면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하는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탱고 연주에서 반도네온의 음색이 좀 무거운 편이라면 아코디언의 음색은 밝은 편이다. 하지만 두 악기 모두 이중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겉으로는 밝지만 그 안에는 절망적인 순간들을 이겨낸 시간이, 또 생에 대한 긍정이 함께 들어 있다. 그 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연주자의 몫이라는 것을 채수린 씨는 알고 있다. <영화음악, 아코디언을 만나다>라는 앨범과 새로운 영화음악을 준비 중인 그. 그의 삶이 빚어내는 아코디언 소리를 곧 만나게 될 것 같다.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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