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 측근 이춘상 씨의 죽음
꿈이 이뤄지려는 찰라에...
박정희 일가(一家)를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故人의 명복을 빈다.
趙甲濟 朴正熙(박정희) 一家는 질풍노도의 역사 속에서 죽음과 늘 가까이 있었다. 박정희의 형은 우익 손에, 부인(육영수 여사)은 좌익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다. 박근혜 후보도 2006년 유세도중 목에 칼을 맞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하였다.
박근혜(朴槿惠) 후보의 14년 측근인 이춘상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고 고인(故人)의 앳된 얼굴 사진을 보았다. 40代의 사고사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陰地(음지)에서 모시던 사람이 드디어 대망(大望)을 이루기 직전의 죽음이었다. 꿈이 이뤄지려는 찰라의 사고였다.
그가 맡았던 SNS 홍보 부문에서도 예상 외로 朴 후보가 文 후보를 이기고 있었다. 朴 후보로선 혈육을 잃은 것보다 더한 충격일 것이다. 사람을 두루 만나지 않아 '소통이 어려운 이'라는 평을 받아온 朴 후보에겐 이춘상 씨 등 '부드럽고 맑은 사심(私心) 없는' 측근들이 있어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朴正熙(박정희) 일가(一家)는 질풍노도의 역사 속에서 죽음과 늘 가까이 있었다. 박정희의 형은 우익 손에 죽고 부인은 좌익 손에, 자신은 부하 손에 죽었다. 박근혜 후보도 2006년 유세도중 목에 칼을 맞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하였다. 죽음과 늘 친하였던 박정희는 그러나 위대한 생명력을 한민족에 선물한 분이다. 그가 생명을 사랑한 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朴正熙) 전기(傳記)(全13권) 작업을 일단 끝낸 뒤 아들 지만(志晩)씨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나무 꽃 강아지를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를 쓴 글이 없더군요."
지만(志晩)씨의 이 말이 이 분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朴正熙가 산림(山林)녹화에 성공한 것은 그가 숲과 나무를 사랑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것은 못 살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결과일 수가 있다. 그의 일기(日記)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日記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이가 들다가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초등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하였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함은 물정(物情)을 모를 때의 마음상태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청탁)을 다 들여 마시되 맑은 혼(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朴대통령이 1973년 7월3일 경주 불국사 복원(復原) 준공식에 참석하여 내린 지시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불국사 주차장의 1~2호 변소 뒤편에 벚꽃나무를 植栽(식재)하여 미화할 것. ‘화랑의 집’ 뒤편 남산에 자생(自生)하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클 수 없는 잡목은 제거하고 적합한 樹種(수종)으로 대체할 것.>
사람들은 “대통령이 화장실 주변에 나무 심는 것까지 간섭해야 하는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자동차로 지방을 다니면서 창밖을 살펴보다가 가끔 수행원에게 “저기 좋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누가 베었어?”라고 묻기도 하였다. 한국의 산야(山野)를 자신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75년 8월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는데, 한 기자가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씨가 용인(龍仁)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입산(入山)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제4호에 실린 5학년생 朴正熙(당시 19세)의 ‘대자연(大自然)’이란 제목의 시(詩).
1.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황야의 한 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태양을 등에 지고 大地를 일구는 농부가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였다는 朴正熙가 가장 사랑한 것은 한국사람, 특히 가난하고 어렵고 약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그를 평하여 ‘자신의 한(恨)을 민족의 한(恨)으로 여기고 한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킨 사람이다’고 하는데, 민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1951년 朴正熙가 9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북한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전사자(戰死者)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사단장에게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종갑(金鍾甲) 사단장은 박정희를 불러 준비를 시켰더니 그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아마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
1963년 그가 <국가와 혁명과 나>를 박상길(朴相吉)씨에게 구술, 대필(代筆)시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朴 의장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것을 좀 넣어줄 수 없습니까”라고 어색하게 말하더라고 한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는 이런 ‘서민적 반골정신’을 권력자가 되고나서도 죽을 때까지 유지한 사람이었다.
朴대통령은 1972년 연두 순시 때 노동청을 방문,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職工(직공)인데, 그 작은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시력(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고, 가보니 저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책임자가 다니다가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전기(電氣)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것은 간단한 착안입니다.”
朴正熙는 울릉도를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2년 10월 해군배로 울릉도를 찾았다. 그는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도동 항구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본선(本船)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일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전복될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해군 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다. 그때 풍랑은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전송 나왔던 島民(도민)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갔을 때 朴 의장을 비롯한 乘船者(승선자)들이 한 사람씩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내렸다. 다행히 수심(水深)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朴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건너편 학동 항구로 갔다. 그쪽 바다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학동 항구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朴 의장은 밧줄로 묶어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본선(本船)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朴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동행하였던 동아일보 이만섭(李萬燮) 기자(국회의장 역임)는 “만약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朴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號(호)가 없었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그는 '박정희란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고 거절하였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 대통령은 '박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하였다. 朴 대통령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박사 학위가 하나도 없다. 朴 대통령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대통령 박정희)'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박정희 배)'라고만 했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혔다. 그날을 생일이라고 생각한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해도 그냥 받아주었다. 호, 명예박사,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 대통령은 권위적인 것들을 생래적으로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횡포를 미워하였다.
그는 虛禮虛飾(허례허식)도 싫어하였다. 항상 청빈(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헤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시신(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면서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썼다. 자신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 君臨(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전시(戰時) 부산에서 맞선을 보던 날 육영수(陸英修)는 박정희(朴正熙) 소령의 뒷모습을 먼저 보았다고 한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으로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정희(朴正熙)가 보여 준 최후의 모습이 바로 그의 뒷모습일 것이다. 가난과 망국(亡國)과 戰亂(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한(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하여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총탄에 가슴을 뚫리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혁명가 朴正熙였다. 이장춘(李長春) 대사(퇴임)는 이런 박정희를 평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혁명가'라고 했다.
나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단정하는 걸 반대하지만, 어떤 시기에 그가 '독재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독재'엔 여러 종류가 있다. 700만의 인명(人命)을 희생시키고도 경제건설에 실패한 김일성-김정일 식 독재가 있고, 수천 만 명을 죽인 스탈린이나 모택동 식 독재, 경제활동이 가장 자유로운 싱가포르를 만든 이광요(李光耀) 식 독재도 있다. 세계사를 보면, 혁명적 변화엔 수많은 인명(人命) 희생이 따르는 게 보통인데 박정희 시절은 극히 예외였다.
박정희(朴正熙)가 한민족(韓民族) 2000년 역사상 최단기간 내에 최대(最大)의 변화를 몰고온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였음에도 자유와 인권(人權)을 최소한도로 제약하는 데 그칠 수 있었던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사랑한 그의 마음과 관계 있을 것이다. 이춘상 씨의 죽음이 박정희 일가(一家)를 따라다니는 '검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고인(故人)의 명복을 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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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