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탈북자 살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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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와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3) 김대중 정부 탈북자 살리다. 1995년이 되어 미련한 김영삼 정부의 무능이 뚜렷이 나타나자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다시 복귀했다. <문민정부> 슬러건을 든 김영삼은 ‘깨끗한 나라’를 주창하면서 전두환-노태우정권 세력을 싹쓸이식으로 타도했고 김종필, 박태준을 비롯한 박정희 산업화세력까지 부정부패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전두화-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을 구속했다.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타도했던 것이다. 정통 보수 세력은 산산 조작이 나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김대중이 아니었다. 1996년 어느날 강명도가(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1994년 귀순, 현 조명철 국회의원과 같은 해 입국) 우리 귀순자 10여명에게 김대중과의 오찬에 가자고 추동했다. 국회식당으로 가는 순간까지 ‘임영선이 너 김대중 만나 사진 찍는 순간부터 인생 망가 진다’라는 안기부의 협박전화는 계속되었다. ‘아니 김대중이 김일성의 혁명전사 라는데 남조선 빨갱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간다’라며 기어코 갔다. 초청된 귀순자들 대부분이 이런저런 핑계로 불참 했다. 참여한 5명은 안기부가 참가자 명단을 확보한 후에 강명도 로부터 연락을 받아 안기부의 협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의 북한귀순자 첫 면담은 아태평화 재단 임동원 이사장이 기획한 것이었다. 당시 강명도는 임동원 이사장과 광림교회 성도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통일부장관,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은 16살 때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퇴각하는 국군을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다. 평안북도 위원군 사람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전에는 대대장으로 참전 했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해 호주대사를 비롯해 여러나라 대사를 거쳐 노태우정부에서 통일부 차관을 하다가 퇴직했다. 정통 대북전문가가 백의종군 한다는 것을 안 김대중이 만남을 연락했고 두 사람의 남북평화 이념과 사상, 전략이 일치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볓 정책은 사실 임동원 장관의 구상과 전략의 전 과정이다. 사실 대북 햇볓 정책은 노태우정부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것 또한 임동원 장관의 이념과 전략이었다. 안기부와 일반국민들이 말하듯이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었다. 독일통일 과정과 당시의 상황을 차곡차곡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저분은 참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 자기의 뚜렷한 이념과 철학의 경지에 간 사람이네’라고 생각되었다. 오찬에서 귀순자들의 원통이 터졌다. ‘자유대한으로 오라고 전단을 날리고 방송을 불어대고는 찾아오면 정보만 빼먹고 1400만원 쥐어주고 네 멋대로 살아라 하냐?’하는 식이었다. 김대중은 자기들이 집권하면 귀순자들의 정착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안기부에서는 김대중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못하며 민주당의 집권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나는 이회창을 찍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임동원이사장이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으로 임명되더니 보수파 거장 강인덕이 통일부장관이 되었다. 강인덕장관 역시 평안도 사람이었고 임동원과는 절친한 사이었다. 정권인수 과정에 이미 남한으로 이주해 온 북한사람들의 정착문제 개선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던 귀순자 정착프로그램을 보훈처로 돌려보내지 않고 통일부로 끌어들였다. 보건복지부에서는 북한이주민들이라고 특별정책을 실행하기가 어렵고, 보훈처에서는 장차 급증 할 북한주민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입국한 북한주민이 독신일 경우 정착보조금 3700만원으로 책정하고 가족 수에 따라 가산금을 추가 지급하며 임대주택 은 가족상황에 따라 평수를 조정하고 될수록 서울과 수도권에 우선 공급하도록 했다. 의료지원과 교육은 보훈처의 국가유공자 격으로 복귀시키고 직업알선과 취직보조금 지급을 추가했다. 동시에 통일부에 <하나원> 정착교육기관을 신설하기로 했다. 통일부 하나원이 개원되고 졸업하는 북한주민들은 통장에 2천만원 정도의 현금을 넣어가지고 나왔다. 한번에 소진하지 못하도록 분기별로 찾을 수 있도록 ‘현금지급 띠’를 붙였다. 그것이 바로 중국체류 북한주민들이 대거 남한으로 이주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목돈이 생긴 탈북자들은 중국의 친인척과 동료들을 데려 올수 있었던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한해 수백 명의 북한주민들이 남한으로 이주해오는 시대가 열렸다. 훗 날 알게 되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의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진행될 당시 한해 500명 입국 시대가 열렸다. 중국체류 북한주민들의 남한입국 붐이 터졌던 것이다. 당시 만주지역에서 작전하던 우리는 남한으로 가겠다는 북한주민에게 1인당 중국페 3천원만 지급하면 순조롭게 제3국 한국영사관으로 찾아갔다. 그러던 것이 돈을 가지고 찾아오는 북한주민들이 빈번해졌다. 알고 보니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순조롭던 북한주민들의 남한이주에 복병이 나타났다. 남한으로 입국한 북한주민들로부터 북한상황을 알게 된 시민단체들의 탈북난민 국제캠페인 활동이 거세지고 종교단체들의 선교활동이 노골화되면서 중국과 북한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외교 단지들에 북한주민들이 난입하고 그에 대한 국제단체들의 언론플레이는 중국을 격분시켰다. 또 다른 복병은 북한주민들을 받아들이는 한국 영사관들의 예산이 없었 다는 것이다. 영사관들은 영사부 관리비를 총동원해 북한주민들을 받아들였다. 한국교민들과 종교단체들에 국가의 고통을 함께 해줄 것을 호소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태국, 몽골 국경을 넘은 북한주민들은 현지인들에게 ‘나를 한국대사관까지 데려다주면 1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오는데 현지인들은 한국영사관 직원에게 돈을 달라고 생떼를 썼다. 당황한 외교관들은 자기 개인 돈을 있는 대로 지급했는데 가족 생활비를 털어냈다. 그런 자금은 영수증 처리도 불가능했다. 교민들과 상인들의 피해도 막대했고 베트남 호치민 한인연합교회는 파산에 몰렸다. 2002년 4월이 되자 북한주민들의 이주 경로에 있는 각 나라 한국영사부들과 교민들, 종교단체들은 손을 들었다. 더 이상 북한주민들을 협력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가들에서 쫗겨나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북한주민들의 처량한 모습을 보며 영사관에 강력항의하고 현지인들과 협의를 해보아도 답변은 ‘서울 가서 중앙정부와 해결하라’ 였다. 정부부처들은 물론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피타게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모두 환한 미소로 거부했다. 심지어 어느 대형교회 담임 목사는 ‘그런 사람들 한국으로 데려 오면 안 됩니다.’라고 펄쩍 뛰었다. 나는 억이 막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고 그것이 미안해 3000천만 원을 후원 했고 그 돈으로 봉고차 2대를 구입해 몽골지역에 공급 했다. 복과 불행은 항상 자기 등에 지고 다닌다고, 교회에서 임동원 장관을 만났다. 나는 원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녔는데 강명도가 꼬스겨서 광림교회로 갔고 임장관은 가끔 만날 때마다 친구들과 냉면 사먹으라고 10만~20만원 용돈을 주군 했다. 국정원장이 되어 50만원 용돈을 받아보았는데 그때 외교안보수석이나 통일부장관보다 국정원장이 헐씬 높다는 것을 알았다. 임동원 장관은 구체적으로 글을 써서 자기 집 팩스로 넣어 달라고 했다. 나는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고 며칠 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임 선생 여기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실이고 비서관입니다. 정부 예비비를 사용해 북한주민들 전부를 받아들이도록 결정됐다고 알려주라고 해 전화합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가 며칠 후 방송을 보고 이해했다. 정부가 당장 정부예비비를 투입해 영사부에 찾아오는 북한주민들 전부를 받아들이도록 결정했다는 것이다.
2002년 한해 북한주민 1천명 입국시대가 열렸다. 2003년부터 외교부와 통일부에 이주해 오는 북한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부예산이 책정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국정원과 외교부에서 임영선이 청와대에 투서를 날렸다면서 이런 저런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 집행자는 경찰청이었고 바람잡이는 MBC와 SBS였다. 그들은 비열한 범법자 탈북자들을 골라 임영선을 모함하는 작업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오늘날 북한주민들의 남한이주의 물고는 김대중 정부에서 터졌 던 것이다.
통일방송 대표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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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1-21 09:16:28
아무리 그렇게 위대한일을 했다고 또 만주에서 혁명투쟁을 줄기차게 해왔다는데 2000년도 까지 1년에 100~300명정도 밖에 오지 않았거든요.
너무 과하게 사실을 부풀리니 이건 뭐 좁쌀1알을 축구공으로 불구어버리는것 아닌가요?
그리고 타 탈북인들과 줄것 있으면 빨리주고 그러세요.
그리고 전체 탈북인들이 인정할만한 글을 올리셔야죠. 이건 뭐 만날 허황한 환상소설같은것만 올리니 탈북인들이 외곡된 정보를 알고 피해를 당할수 있다는것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탈북인들에 대해 피해를 주거나 탈북인들에 대해 나쁜이미지를 줄 글은 삼가해주세요. 그런것은 당신이 한다는 통일방송에서도 심사숙고 해야 한다고 봅니다.
-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1-21 09:16:11
http://usinsideworld.com/article/view.php?bbs_id=news&doc_num=342
- 우리의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1-20 20:30:22
- 우리의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1-20 20:37:51
실향민2세이며 해병대 출신인 문재인이가 진보의 보검을 틀어쥐고 보수진영과의 대결구도를 형성하고는 눈앞의 영달만을 쫒으며 사기를 치더니 왜서인지 당신도 그처럼 숨겨두었던 자기의 본 모습을 점점 드러내 보이는구먼.
참 같은 탈북자로서 천지신명께 맹세를 하건데 당신 같은 인간을 보면 정말로 부끄러울 따름이요. 우리가 김대중과 노무현과 같은 이 땅의 진보세력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김일성에서 시작된 북한의 3대 독재를 마치 자기들의 사업 파트너처럼 여기고 수 천만의 북한 백성들은 저들과 한갖 대상할 가치조차 없는 이용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요.
혹시 김대중이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하나를 위해 퍼준 돈이 얼마인지는 알아요? 자그만치 5억불이요. 그래 그 돈이 김대중의 돈인가? 바로 국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이란 말이요.
평화의 물꼬를 한 반도에서 자기가 완성한 것처럼 자처하며 노벨평화상이나 받고 7천만국민들 앞에서 쇼를 할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피를 흘렸던 국군포로들은 바로 지옥의 어둠 속에서 구천을 떠 돌았소.
그때 정상회담 날짜가 6월10일이었는데 5억불의 절반 밖에 김정일의 계좌로 입금하지 못하여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은 김대중에게 요구한 돈을 다 주기 전에는 오지 말라고 했죠. 바빠맞은 김대중의 과잉 충성분자들은 청와대를 문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나머지 돈입금에 피눈이 되어 날뛰었소. 결국 3일이 지난 6월13일에 김대중은 평양으로 갔지.
그의 햇볕 정책에서 가장 큰 죄악은 바로 국군포로와 맞먹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수십명이나 김정일의 요구대로 보내준 것이요. 때문에 김정일은 김대중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지. 자기가 이번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은 전적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을 자기의 품에 데려오는 것이라고 말이요.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해 김대중이나 노무현, 문재인, 그리고 안철수와 같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이 땅에 죽은 나뭇가지를 꽂아 넣은 꼴이요. 때문에 그들의 잘못된 의식은 역사의 심판대에 의해 반드시 계산될 것이요.
부디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위해 헌신하시오. 재잘거리는 잔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펄펄 끓는 뜨거운 심장을 드리대란 말이요.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