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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대 혁명학원 군사교원을 하신 아버지
Korea, Republic o 만경대 0 221 2013-04-14 14:10:21
 

 

마지막 아버지 모습


저는 3월1일 피눈물을 삼키면서  어머님 과 작별하고 아버지가 계시는 동생  집으로 갔다.

북한 사정으로 어머님 은 제가 모시고 아버지는 동생이 모시였다.

아버지에게 남조선에 간다가 말하자니 아버지가 무서웠고 말하지 않고 떠나자고 하니 불효 하고 평생 후회 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는 남조선에 가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짐작을 하셨는지 1시간정도 침묵을 하시다가 말씀을 하시 엇습니다.

남조선에 왜 가려고 하니 ?

저는 배고 푼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제가 평양 사리원 해주 함흥  대도시를 돌아보니 굶어 죽어 가는 사람 들이 헤아릴 수 가 없었습니다.

장사를 하면 안전원이 다 강탈하고 농사를 지면 군대가 도득 질 하고  말 좀 잘못하면 보위부가 와서 협박을 하여 돈을 강탈하고 더러워서 못살겠습니다.

이 나라에 자유도 인권도 모든 것이 유린당하고 우리가 사람입니까?

하여 남조선에 가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철학, 역사, 지리를 전공하고 공부할 때 내가 왜 너에게 이런 것을 공부 하지 말라고 했는지 지금 이해가 가느냐?


이런  날을 내가 예상하고 너의 앞길을 막았다.

그때도 너는 나의 반대를 무시하고 너의 갈 길을 가고 훗날 .아버지 아버지가 반대하여도 저는 주체사상 강사가 되었고 전국 주체사상에 대하여 토론회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라고

자랑했지 .

내가 말했지 철학은 누구의 생각이지  밥은 먹지 못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 진실이거나 정의 가 아니라고.

또 지리는 너의 욕망과 야심을 충동하여 너를 괴롭힌다.

고 말했지 .

이때도 너는 끝가지 역사 공부를 하였고 지리 공부를 하였다.

결과는 어떠냐?

너는 조국을 버리고 남조선으로 간다는 것이잖아.

아버지 솔직히 말하여주십시오.

아버지도 조국을 장군님 품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니다 조국이란 조상의 물려준 피와 뼈 와 언어 풍습 조상의 넋  조상의 훈적이 있는 것이 지 장군님의 품은 아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조국이 장군님 품이라고 하면 장군님 품이다.

너는 남조선에 가면 부자가 되고 자유를 만끽 하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가지마라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 하겠습니다.

우리 김일성 민족이잖아요

그러면 김일성 수령님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님과 할아버지 김보현 선생님 중조부 김응우 선생님은 김일성 민족에 해당 되나요

아니면 그들은 단군 민족인가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

아버지와 논쟁은 4일간 주야로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논쟁이 아니라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변명이 얻고  자유라는 포장을 한 아들의 현실 기피 논쟁이 엇다.

부자지간에 논쟁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하루 3끼 밥과 반주를 준비하여준 동생에게 미안한 생각의 들 때 여동생이 저를 불렀다.

오빠 저는 30년 동안 오빠를 존경하고 남조선에 가시는 것도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누가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신고를 할 가 두렵습니다.

아버지 고집을 누가 당하나요?

아버지께 남조선 안 간다고 말씀드리고  빨리 떠나세요!

오늘 두만강에 가보니 녹기 시작해요

동생을 말을 듣고 아버지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버지 남조선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처님처럼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을 하시면서

……. 그래 장사를 부지런히 하여 가족과 어머님을 돌봐라…….

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이 농사를 하신 독초를 한 모금 깊숙이 빠신다.


2000년3월7일 봄…….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저 청진을 가요

안녕히 계십시오.


한참 후에 아버지 방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잘 가…….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다

훗날 동생과 전화 통화에서 들은 이야기다.

이날 아버지는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시지 않으시고 술만 드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남조선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고 자식하고 하루라도 더 같이 자고 싶어 논쟁을 길게 하였다고 한다.

전 만경대 혁명학원 군사교관이시고 전쟁 시기 중대장이시던 아버지 공산주의 사상에는 확신을 가지시고 김정일 주체사상에 반감을 가졌던 아버지

그래도 6남 3녀 중에 셋째 가 제일 효자이다

모골이 있는 남조선으로  가련다.



3년 후 아버지는 길주에 있는 할아버지 들이 계시는 산에 가시여 절을 올리시고 이아들이 있는 남조선으로 오시다가 심장 마비로 돌아 가시 엇습니다.


2000년3월8일 두만강을 넘어서며 다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한국에 오셨더라면 김정일이 어린 시절 비화 정일봉과 정일의 생가  나무에 새겨진 글에 대한 폭로를 하시거나 책을 내시면 엄청 성공하시고 행복 하였을 것 같은 망상도 해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김정일의 거짓 생가 구호 나무 정일봉 만드는 초석을 58 연년부터 70년까지 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님 저를 나아 주시고 길러 주시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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