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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대가로~
Korea, Republic o 먼길 0 387 2013-05-04 20:57:04

 

 

 

 

 

 

 

1962년 北中 ‘국경 밀약’


1969년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이 돌연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북한 주민은 물론 일본 총련계 교포들에게까지 배포된 그 사진의 의미는

 “천지와 백두산은 북한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광고일 뿐이었다.

 북-중간 국계비(國界碑)에서 확인했듯이 북한은 이미 1962년 중국과

 ‘중조변계조약(中朝邊界條約)’을 맺고 국경선을 확정했다.

 

천지와 백두산도 그때 분할됐다.

그러나 중국과북한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 북-중 국경조약은 ‘유령 조약’


취재 과정에서 만난 중국 학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국계비를 들이대도

“중앙정부가 공식화하지 않는 한 1962년 조약은 설(說)일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북한 당국이 매년 발행하는 ‘조선중앙연감’에도 이 조약에 관한 내용은 없다.

 

북-중 국경조약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은

조약 체결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부터.

1990년대 중반 중국에서 출간된 천이(陳毅)의 연보(年譜)엔

‘1962년 10월 12일 천이 외교부장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수행해

 평양에 가서 국경협정을 체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2000년 10월엔 ‘중화인민공화국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변계조약

(中華人民共和國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邊界條約)’이라는

이름의 조약 원문과 의정서 등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양국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조약을 서두른 것은 중국


드러난 사실을 종합하면 국경조약을 서두른 것은 중국이었다.

 

 1959년 이래 인도와 무력충돌을 빚어온 중국은 잠재적인 화약고인

 북한 및 몽골과의 국경문제를 해결해 북방의 불씨를 없애려 했다.

 

중소(中蘇) 분쟁이 결정적 촉매제가 됐다.

 

중소 양국과 등거리를 유지하며 실리를 취하던 북한은

 1960년대 들어 급격히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의 개인숭배 비판은

 중국은 물론 북한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62년 10월 소련이 쿠바에 배치했던 대미(對美) 요격용 미사일을 철수하는 이른바

 ‘쿠바 위기’ 때 중국과 북한은 소련의 결정이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투항”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저우 총리와 천 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어 1963년 9월 중국의 류사오치(劉少奇) 주석이 평양을 방문해

 ‘백두산 꼭대기부터 한반도 남반부까지’를 북한 영토로 재확인했다.

 

 

● 깨진 蜜月, 국경의 총격전


문서상으로는 1964년 3월 중국의 천 부장과 북한의 박성철(朴成哲) 외무상이

 베이징(北京)에서 ‘중조변계의정서’에 사인함으로써 압록강-백두산-두만강을 잇는

 현재의 국경선이 그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6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다시 북-중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곗덩어리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의 앞잡이”라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양국의 밀월이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격분한 북한은 1967년 평양 주재 중국대사를 추방하고 주중대사를 소환했다.

이 시기 국경마을의 주민들은 북-중 양국이 상대를 헐뜯는

 확성기 소리에 밤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1968년 12월과 1969년 3월에는 국경선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인도의 한 신문은 1965년 7월 북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중국은 6·25전쟁 참전 대가로

백두산 지역 250km²가량을 떼어달라고 북한에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1969년 김일성의 백두산 등정은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이벤트였다.

 

 

● 백두산 분할은 참전 대가?


1962년의 국경조약 자체가 중국의 6·25 참전 대가로

북한이 양보한 것이라는 정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이를 확증해 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북한 관계자들의 비공식적인 얘기로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다.

 

1984년 한국에 수해 구제 물자를 가져온 북한적십자회 간부는

 “백두산은 우리와 중국이 반씩 나눠 관장하고 있는데,

중국에 절반을 할양한 것은 전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용단이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듬해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손성필 대표는

한국 대표에게 “백두산의 반은 조상들의 잘못으로 중국에 빼앗겼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족 학자 G씨는 “협상 당시 김일성 이 ‘조선(북한)의 국장(國章)에

 백두산 천지가 들어있는데, 천지를 중국에 다 넘겨주면

국장을 바꿔야 한다’며 중국 대표를 설득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 밀약은 언제 공개될까


왜 북-중 양국은 국경조약 체결 사실 자체를 숨기는 것일까.

 

국내의 국제법 전문가들은 “조약 체결 사실이 알려져

한국 정부가 반발이라도 하고 나선다면 분쟁지역이 될 수 있으니

북한과 중국으로서는 일단 덮어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북한 연구자들은 “김일성이 ‘혁명 성지(聖地)’로 강조해 온

백두산과 천지를 중국과 나눠 가졌다고

인민에게 공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북-중 밀약은 과연 국제사회에서도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출처] 1962년 北中 ‘국경 밀약’ (진실한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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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은 ip1 2013-05-07 22:20:39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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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ot ip2 2013-05-08 23:49:11
    개씨집안은 나라팔구 민족팔구 상상초월하는 역사왜곡에 쏘련앞잡이중국앞잡이... 지놈 가족의번영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손떨리고 무서울게없는넘들...인류역사상 가장치사하고 구역질나는 사기협잡군집안이요..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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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짱꼴라 ip3 2013-05-14 10:44:36
    짱개와김일성이
    역사앞에
    저지른범죄중의한개일뿐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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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길남 ip4 2013-05-14 13:46:31
    어렸을때 부터 이 사실을 알았는데.. 한국분들은 이제야 알았나요? 당시 대가로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석유를 줬다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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