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저걸 본 소감이 어떤가?”
에피소드로 본 北 과학사① 청와대의 비밀영화 시사회
[94호] 2009년 01월 01일 (목) 10:30:33
강호제 (사)현대사연구소 상임연구원 <U> minjo21@minjog21.co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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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초, 청와대에서 비밀스러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북이 자신들의 산업발전을 기록한 영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전 국무위원, 정계 중진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영화를 보는 동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을 기획하던 정부 인사들은 영화 속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임자, 저걸 본 소감이 어떤가?”(박정희)
“… 대단합니다.”(최형섭 당시 과기처 장관)
1972년 청와대를 충격에 빠뜨린 기록영화
이 대답을 끝으로 당시 시사회는 끝났다. 당시 영화 속 장면은 이랬다.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자동이양기로 모를 심고 기계로 수확하는 등 기계화된 벼농사 풍경이 나왔다. 자동화된 기계로 석탄을 캔 후 컨베이어 벨트로 운반하는 장면, 용광로에서 쇳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모습 등도 자세하게 나왔다. 뿐만 아니라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비날론 공장 등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장면과 발전기, 트랙터, 자동차, 전기기관차 등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장면도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영화 속 장면 중에 10년 전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남측의 중화학공업 분야는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1972년 당시 모습이라고 해도 충격적이었을 터인데 10년 전 모습이라니!
북은 1954년부터 3년 동안 ‘전후복구사업(1954~1956)’을 진행한 이후 첫 장기 경제발전계획인 ‘제1차 5개년계획(1957~1960)’을 시작했다. 당시 영화 속에는 이 계획을 성곡적으로 마무리한 뒤 열린 ‘제4차 당대회(1961.9.11~18)’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1차 5개년계획의 결과는 북 지도부도 예측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공업생산증가율의 초기 목표가 22%이었지만 최대 53%(1959년), 연평균 36.5%로 목표를 초과해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당시 추진되었던 여러 정책들 중에는 미리 준비되어 시행되기보다 상황에 따라 급박하게 마련된 것이 많았다. 따라서 계획의 결과는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961년 당시 북의 경제 성장은 단순히 양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무식하게 일만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해서 만든 결과가 아니라 기술수준의 향상과 생산능률의 향상을 동시에 추구한 결과였다.
즉 용광로, 비료공장, 발전소 등을 정상화시키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설비를 개조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자동차, 오토바이, 뜨락또르(트랙터), 엑쓰까와또르(굴삭기), 불도젤(불도저), 8m 타닝반 등 정밀 기계설비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해방 당시 남쪽에 비해 유일하게 뒤쳐져 있던 공업분야인 기계공업을 집중 육성한 결과였다.
이러한 생산수준의 향상뿐만 아니라 리승기의 비날론, 려경구의 염화비닐, 한홍식의 무연탄 가스화, 주종명의 함철콕스, 리재업의 합성고무 등 과학이론 수준에서도 뛰어난 성과들이 대규모 공업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1961년 9월에는 전자계산기(컴퓨터)도 제작되었다.
일제시기에 건설된 대부분의 생산설비들은 해방과 동시에 운영 중단되었다가 1940년대 말에 일단 정상화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1950년대 중후반에 복구되었다. 당시 운영되고 있던 전기로는 1890년대 후반에 나온 기술이므로 이 전기로 제조 기술과 운영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61년 반도체, 진공관 사용 컴퓨터 제작하기도
1950년대 말 북에서는 ‘산소취입법’이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이용한 제강법이 시험 적용되고 있었다. 비록 본격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제철, 제강공업의 수준이 상당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강선제강소에서 20톤짜리 전기로를 가지고 33톤까지 생산할 수 있게 하였고 전기로를 40톤짜리로 개조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북에서 생산되던 기계제품들은 북에서 자체적으로 설계, 제작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소련에서 설계도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생산된 제품들을 수입하여, 이를 분해하면서 설계도를 작성하고 최종적으로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제품을 바탕으로 설계도를 만든 이후 생산하는 것이라 ‘역설계(reverse engineering) 방식’이라고 한다. 이는 보통 후발 공업국가에서 추격발전전략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다. 삼성, LG 등도 초기에는 이 전략을 썼다.
석유에서 뽑아내는 나일론과 달리 석탄에서 뽑아내는 합성섬유인 비날론과 PVC의 원료인 염화비닐, 석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무연탄 가스화 등은 기본적으로 과학기술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공업화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비날론은 일제시기 경도제대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 리승기가 직접 개발한 합성섬유인데 나일론과 달리 물기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요즘도 수영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스포츠 타월의 재료로 쓰인다.
또한 무연탄 가스화는 지금은 불법이 되었지만 한때 대체 휘발유로 알려진 제품인 ‘세녹스’가 연관된 기술이다.
1961년 9월에 제작된 북 최초의 컴퓨터는 반도체와 진공관을 함께 사용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제작만 하고 끝낸 것이 아니었다. 이를 생산현장에서 활용하기 노력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북의 IT기술은 이때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당시 과학기술적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성과가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이어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사이에 50년이라는 무시 못할 시간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과 이 당시를 직접적으로 연결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미사일, 핵, IT와 같은 일부 분야에서는 연속성을 갖고 발전해온 분야도 있다. 1990년대 이후 거듭 강조되고 있는 ‘과학기술 중시사상’ 또한 중간에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정책이다.
강호제(34)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국내외를 통틀어 북한 과학기술정책사로 학위를 받는 첫번째 박사일 것이다. 저서로는 해방직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를 다룬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이 있다. 이후 시기를 다룰 《북한 과학기술 형상사 2, 3》권을 집필하고 있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정치사상 중심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북의 모습을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