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반)종교의 자유로 가는 빨갱이의 경제민주화는 피에 굶주린 악마의 蠱惑(고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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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9:1-2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모든 것에 대해 알아내는 하나님의 직관력 통찰력으로 모든 정보를 취득하여 이를 응용케 하는 지혜의 공간구조 하나님의 지혜의 집을 어제 고찰하였다. 이러한 지혜의 집은 곧 지혜의 공간구조라 하였다. 이와 類似(유사)한 것이 곧 인간의 거대지성의 집단 지성을 의미하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빛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의 지식의 힘으로 지식을 알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알아가는 것과 인간의 지식으로 이를 알아가는 것의 차이다. 그 차이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그러한 懸隔(현격)한 차이를 가진다.
그것의 차이와 그 문명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가진다. 만물을 선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영광이다. 그 얼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신다. [이사야 42:8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예부터 인간은 집단지성을 구성하고 각기의 이익만을 추구해 왔다. 하여 인간문명은 시작된다. 각기 집단지성은 종족 단위로 또는 기업단위로 또는 민족 단위로 국가 단위로, 그들만의 블록의 단위로 이익을 만들어 갔다.
그들만의 이익은 이웃사랑인가? 이는 타를 죽여 자기들만 사는 침략적인 것이 대부분을 이룬다. 인간의 주관적인 善(선)은 하나님의 선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세상은 하나님의 선과 악마의 악의 싸움터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善(선)의 영역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주관적인 선이 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주관적인 선이 권력을 가지고 선으로 등극하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상에게 선의 영광을 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결코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괴가 붕괴되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국가만의 이익은 과연 합당한 짓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열린 민족주의의 의미에서 닫힌 민족주의와 그 이기주의는 惡(악)인 것이다. 닫힌 민족이기주의 그것에 짓이겨지는 민족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기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천하민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를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살아야 하는 길로 가야한다. 그것의 균형을 잡아야 하고 수평선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서로의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시장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건강은 하나님의 잣대에서 나오는 균형의 황금률을 기본으로 한다. 그 기준에서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市場(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장이 더러운 욕심의 개입으로 악덕 상혼(그들만의 이익)이 판을 치게 되면 결국 서로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市場(시장)은 파괴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이웃사랑의 법치 정치행위이다. 바로잡는 것에는 황금률의 균형감각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잣대에서 나오는 신묘 기묘 절묘 오묘 기묘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 공간 구조에서 응용력이라고 한다.
이 능력을 가져야 相生(상생)한다. 황금률의 하나님의 잣대가 필요하다. 그 잣대는 만유에 대한 응용력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주 절실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집단을 이뤄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집단지성이 거대지성을 이루고 그것으로 하나 되어 지식의 축적을 하고 그 지식에서 나오는 실험적인 잣대로 생존의 응용력을 찾아가고 있다. 축적된 지식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응용력을 추적해가는 것이다. 그러한 경주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그 각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독특한 차원의 응용능력을 찾아내는 집단이 시장을 선점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고도로 높은 지성의 집단을 만들고 그들로 그 일을 도모하게 한다. 하지만 이웃사랑과 이웃파괴를 가늠하는 잣대가 주관적이기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이기주의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 것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잣대가 필요하고 저울이 필요하고 구분하는 방책이 필요한데, 그런 가늠이 불확실하도록 속이는 저울추로 국가가 또는 민족 간에 각 기업체 간에 서로 속이고 속는 짓으로 자기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것이 곧 인류의 비극이 된다.
이웃사랑에 집단지성의 종류는 크게 나눠 하나님의 이웃사랑의 지혜의 공간구조와 인간의 인본주의 이웃사랑의 지식의 공간구조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는 공간구조에서 나오는 이웃사랑의 응용력을 오늘의 본문에서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라고 비유한다. 인본주의 이웃사랑의 지식공간구조(지식의 축적의 집단지성 거대지성)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배제된다. 하나님이 배제되면 하나님의 빛은 없게 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짙어진다. 흑암에서 인간은 망한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운영되는데 이를 배제하면 사실상 만물에 대한 오용 남용 악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을 인간의 욕심으로 욕심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집단 지성이 아무리 거대지성이라고 해도 무한한 지식의 세계에서 모래 한 알 손에 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어떻게 그 지식의 茫茫大海(망망대해)를 헤쳐 갈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실험을 고집한다.
인간의 축적된 집단의 지식으로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지혜로 직관 통찰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차이를 가진다. 만물의 선용에 대한 응용의 잣대를 찾아내고 이를 사용하는 능력의 차이는 마치도 광도의 차이를 가진다. 손불(작은 손에 들린 등불)과 일곱 개의 태양의 차이라고나 할까? 만물에서 선용하는 응용능력을 추려낸다든지 추출한다든지 실 삼아낸다는 의미는 그 光度(광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 광도의 차이를 안다면 ‘손불’을 던져버릴 것이다. 밝은 대낮에 그 ‘손불’은 불필요 한 것이다.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의 응용능력 곧 요리조리와 칵테일의 문명(to mix, mingle, produce by mixing)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지혜의 요리조리와 칵테일의 하나님과 그 지혜를 배제한 인본주의 곧 인간의 지식의 요리조리와 그 칵테일 문명은 ‘손불‘은 일곱 날의 태양 빛의 차이라고 이미 밝혔다. 그런 차이를 가지는 것이 곧 천국과 세상의 문명의 차이라고 한다. 우리가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의 공간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만물을 선용하는 능력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잣대를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잣대로 그 공간 구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응용능력을 무한히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만이 인간은 만물을 오로지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을 배제한 곳에는 어둠이 깃드는데, 악마가 그곳을 掘穴(굴혈)로 삼는다. 따라서 인본주의 지식공간구조는 악마의 어둠에 눌려 도리어 만물의 선용이 아니라 악용으로 가게 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분명한 한계이다. 이는 인간이 악마를 제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함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내민 손을 뿌리친다.
인본주의 지식 공간 구조에서 나오는 빛을 ‘손불‘ 이라 했는데 듣기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 ‘魂(혼)불’로 정의하기로 한다. 그것에 관한 뜻을 함축하자면, 그 魂(혼)불은 마치도 손에 있는 작은 불과 같아서 어둠에서 오는 시련의 바람이라고 하는 것에 부닥치면 언제고 꺼질 수 있다. 그것이 꺼지면 지식의 오류에 빠져 광대한 지식의 영역을 洞涉 通涉(통섭)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결국 迷兒(미아)가 된다. 미아들이 가진 지식은 혼돈 그자체이고 공허 그자체이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세상의 지성인으로 추앙되어 인도자가 된다.
그것이 魂(혼)불의 한계이고 곧 인간에 대한 미혹이다. 그 미혹의 끝은 결국 만물에 대한 惡用(악용), 하나님을 배제하는 악역자처와 악마의 초래를 만드는 흉측한 일에 自薦(자천)하는 자가 된다. 모름지기 인간을 만드신 분의 빛으로 세상을 독해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집단 지성을 이뤄야 하는데, 그 공간 구조에서 나오는 요리조리와 칵테일의 모든 응용의 분야를 받아 누려야 하는데, 이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내세우는 이웃사랑의 의미는 언제나 오용 남용 악용으로 歸着(귀착)된다. 이는 인류의 재앙으로 몰아가는 짓이다.
微物(미물)하나에 숨겨진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 그 지식을 알아낸다 해도 그것에서 나오는 정보를 악덕 商魂(상혼)이 사용한다면 이웃을 위한 선용이 아니라 돈을 위한 악용으로 간다는 것에서 21세기의 인류의 불행은 언제나 곁에서 虎視耽耽(호시탐탐)한다. 우리는 이런 지식 문명의 세상을 악마의 소굴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구분치 못하고 있다. 그저 창의성을 가진 집단으로 여겨 고급두뇌의 집단으로 이를 높이려고만 한다. 그곳은 악마의 巢窟(소굴)이다. 악마의 소굴에는 피바다가 언제나 출렁인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배제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응용능력을 배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으로 만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이 만든 ‘魂(혼)불’에서 있기를 좋아한다. [요한복음5:33-36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魂(혼)불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가야 한다.
[~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사신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등불 곧 ‘魂(혼)불’로 산다. 이런 선택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밝은 백주에 가로등의 의미는 아주 초라하다. 그 때문에 가로등을 끈다는 것을 기본으로 안다. 하지만 인간은 그 魂(혼)불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그 빛으로 모든 존재에서 응용능력을 삼아내어 세상을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용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웃사랑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존재이고 만물도 각기 존재인데, 상호관계에서 악용은 이웃을 파괴하는 재앙의 단초가 되고 과정과 그 결말이 되기 때문이다. 북괴도 거대한 집단 지성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반종교의 자유로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애초부터 부정하는 거대지성 집단 지성의 의미다. 이들은 모든 것을 사용 활용 이용한다고 하지만 사실 상 악용일 뿐이다.
그 때문에 북괴의 그 공간 구조에는 만물을 악용하는 악마가 언제나 가득한 것이다. 그 악마는 인간의 피에 굶주려 있기에 만물을 악용하는 지식으로 가득하고 인간이 발견해내는 지식을 악용하여 도리어 인간을 이웃을 인류를 파멸시키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짓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여 발생한 전대미문 미증유의 북한인권 유린이라 하겠다. 그런 참혹한 유린 생명경시의 참상위에 세운 체제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체제라 하는데 세상은 이의가 없다. 이는 마치도 사람을 죽여 피를 바다를 만들고 배를 띄어 유람하는 것과 같다.
도대체 북괴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악마의 살인대행업체에 불과한 자들이다. 그것으로 구축한 체제가 도대체 이웃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저들끼리 그 체제를 위해 열심히 합심하는 것은 있으나, 그것이 결국 전체적으로 악용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마의 결집일 뿐이다. 그들끼리의 이웃사랑이라고 한다. 우리가 강조하는 이웃사랑은 악마와 그 종자들을 배제한다. 그것들을 영구붕괴 함과 북한주민을 그것들의 손과 그 악습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한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
[마태복음12:25-26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우리가 강조하는 이웃사랑은 악마와 그 종자들과의 서로 사랑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를 받아 행하는 이웃사랑이다. 사욕집단끼리의 동질적인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북의 빨갱이는 그런 우정을 과시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의 이웃사랑을 파괴한다.
개인 이기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나 자민족 이기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기준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강조한다. 만물을 악용하는 자들이 말하는 자기들끼리 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를 받아 만물을 선용하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준 하는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이웃사랑이다. 만물을 악용하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악마의 거처일 뿐이다. 그 거처를 철거하고 악마를 몰아내야 한다. 속히 북괴를 붕괴시켜야 한다.
인간 곁에서 악마를 배제하려고 하면 반드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가진 나라에서 국교로 하자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선택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함에도 국교여부를 떠나 언제나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집단지성을 이루고 그 나름의 문명을 만든다. 만물에 대한 요리조리와 칵테일의 融合(융합)이 그것이다. 융합에는 황금률을 필요하고 물론 요리조리에도 황금률은 절실하다. 그 잣대로 살아야 이웃사랑이 완성된다.
그 문명으로 무역하고 먹고 사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은 실업자가 되어 먹고 살기가 막막해지는 것이다. 국가를 이끄는 또는 대표하는 거대지성의 群(군)이 결국 그 나라를 먹여 살리는 경쟁력이 되는 것인데, 사람은 언제나 먹고 살아야 한다는 문제와 삶의 질의 문제와 부요의 욕구를 가진다. 그것을 충족케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 그러한 정치를 이웃사랑의 행위라고 한다. 인간을 모든 가난에서부터 구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종류의 가난에 대한 치료는 인간의 魂(혼)불에서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 과연 모든 종류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물은 특히 인간 세계는 상대적인 관계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성은 貧富(빈부)의 의미이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자가 언제든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신명기 15: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
인간 중에 가난한 자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대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이웃사랑은 이를 사랑의 水平線(수평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신명기 15:4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여 수평선을 이루는 작업이다. 이는 자기 욕심을 이기게 하는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곧 응용력을 가진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이고 그 응용능력을 그 사랑을 실행할 때 나오는 것이다. 집단 지식인들을 고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려는 것인데, 다만 그 응용능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악덕 商魂(상혼)의 욕심 때문인 것이라면, 결코 인류에게 불행을 만들어 낼 뿐이고 악마는 그것으로 피에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각기 그런 상혼의 집단을 법치통제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에 있는 것이다. 욕심을 억제케 하는 힘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힘뿐이다.
각기의 상혼의 욕심을 죽이는 힘의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하나님이 인간 속으로 임하셔서 그 속의 욕심을 억제시키면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통제하면 그는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통제를 받으면 그런 세상이 되면 재물의 축적이 성공이 아니라 나눔이 성공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공감대가 형성이 된다. 나눔의 의미는 응용의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의 잣대가 분명해야 한다. 그 나눔은 인간의 욕심을 억제하는 순수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순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유일무이하다.
그 때문에 사랑의 바다를 이루는 수평선의 의미는 수면 하에 해저의 수많은 굴곡의 의미를 모두 다 덮는다는 것에서 그 빛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주관적으로 세운 선의 기준에 따라 공평한 나눔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강탈이기 때문이다. 의롭지 못한 짓이다. 제도권으로 과연 인간의 욕심을 억제될 수 없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를 우리 심령 속으로 받아들여 만물을 선용하여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완성하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경제민주화라는 실험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빨갱이가 말하는 상생과 자유대한민국이 말하는 상생의 의미는 다르다. 빨갱이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란 자본주의의 抹殺(말살)에 있다. 이는 마치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 그 안에 황금알을 나눠 갖자는 구호이다. 이는 경제파괴로 인해 많은 가난을 양산하는 악마의 짓이다. 하나님의 선의 기준으로 하는 경제민주화란 더 많은 그 거위를 사육하여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에 손이 미치지 못하는 領域(영역)은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
사회 전반에 빨갱이들이 집단 지성을 이뤄 여러 용어의 혼란을 일으켜가면서 대한민국을 그 경제를 파괴하고 있다. 그것의 요리조리와 그 칵테일은 사망의 독이 가득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인간의 욕심을 이기는 것의 능력의 차이를 살펴보자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를 실제적으로 받아야 그것에서 욕심을 이기게 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반종교의 자유 경제민주화는 부자의 것을 강탈하겠다는 의미다.
<구국기도생각> http://onlyjesus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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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7-08 19:4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