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孫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代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孫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金大中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朴正熙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氏가 아니라 尹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金海 金氏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尹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孫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金山祭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金大中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大祭가 열린 興武王陵 앞에는 「金大中」 아닌 「尹大中」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孫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金大中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恨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孫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姓氏 문제는 金大中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姓氏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金大中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政敵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金大中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金大中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金大中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孫昌植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孫貴峰)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孫씨 아버지는 孫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代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孫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鐵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孫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孫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孫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敵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孫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光州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孫씨는 1968년 조선大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半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孫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善太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金善太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孫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金善太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씨는 공화당의 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家産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大邱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對日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油를 구하기 위해 全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油公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油公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郡守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大邱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巨金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家産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金善太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金善太씨가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金大中씨가 金씨가 아니고 尹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李姬鎬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孫씨는 바로 金大中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光州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光州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李京植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金弘一·韓和甲·金玉斗·咸允植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孫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光州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李姬鎬 여사가 아들 金弘一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李姬鎬 여사는 저에게도 光州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李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金弘一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社報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民推協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孫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에서 金大中씨의 실제 아버지는 尹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孫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孫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孫昌植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金大中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新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全斗煥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金大中씨 家系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金海 金씨로 金大中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前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金敬仁 前 의원은 金大中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木浦에서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孫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孫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金大中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島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村老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金大中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金大中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金大中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金大中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金大中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金大中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金大中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金大中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木浦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金大中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張之淑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金大中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할 面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張鹵島가 諸葛成祚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諸葛成祚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諸葛成祚 부친 호적에는 諸葛成祚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諸葛成祚 부분만 毁棄(훼기: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諸葛成祚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張鹵島가 諸葛成祚의 妻고, 諸葛成祚가 죽은 뒤 張鹵島가 그의 부친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光州지방법원 木浦지원에서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官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諸葛成祚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張鹵島가 1925년에 아버지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張之淑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은 생모 張鹵島가 1960년에 金云式과 혼인하면서 金云式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張鹵島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諸葛成祚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諸葛成祚 사망 후에서 시작해 張鹵島가 친정 호적에 재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金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金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金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朴正熙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金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村老들에 따르면 金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張鹵島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金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金대통령의 生家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金 前 대통령의 어머니는 尹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金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金대통령 어머니는 尹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金云式을 알게 되었고, 金云式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金云式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金云式은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金云式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大本(호적상 이름은 大本인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張鹵島 집안 사람과 張鹵島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네 사람들, 그리고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 문중 사람들과 張鹵島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面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金大中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金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妻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張鹵島가 아들을 낳자, 尹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金대통령 호적에는 尹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尹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尹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張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金云式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尹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金大中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尹씨니, 金씨니, 諸葛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金云式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大本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尹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張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金云式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金大中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어머니를 위해 木浦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金云式 어른입니다』
―金云式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金云式씨의 큰아들과 金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金云式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張鹵島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面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金大中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大本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木浦에 있던 金大中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金大中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大本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大本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金云式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金大中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張鹵島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李姬鎬 여사)가 봉투에다 몇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金대통령은 어머니가 金云式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尹씨가 맞겠네요.
『尹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尹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金大中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金大中)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이 諸葛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諸葛씨라고 했고, 金海 金씨 문중 어른들도 諸葛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諸葛成祚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諸葛成祚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尹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金大中씨라는 것이 金海 金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尹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諸葛씨라는 것이지요』
―諸葛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諸葛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張鹵島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諸葛成祚의 형이 金大中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諸葛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諸葛成祚의 형은 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金弘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孫씨는 「金大中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孫씨가 만났던 사람들이 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 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 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金大中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金대통령에게 直言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金海 金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金大中씨는 諸葛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金大中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 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金대통령의 큰아들 金弘一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金大中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金大中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金大中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孫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金大中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金大中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全斗煥, 金鍾泌 등 金大中 선생의 政敵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人物史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 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金大中 선생이 答을 한다고 해서, 아니 答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金大中」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家長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金大中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孫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 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金海 金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년 6월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14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 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 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孫씨의 친구인 李京植씨와 趙福衡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孫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不敬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金弘一 의원의 측근이며 孫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孫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訴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訴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혼자서 재판 준비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法大 출신인 李京植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 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 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 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金鍾泌씨와 全斗煥 前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金海 金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金鍾泌씨였기 때문이고, 全斗煥씨는 金大中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氏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 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金弘一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년 10월26일 종결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金大中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金大中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金泳三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孫昌植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金云式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金云式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金順禮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張鹵島의 假墓가 있었다.
金云式-金順禮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金云式-張鹵島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金云式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경기도 龍仁으로 옮겼다. 金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金云式-張鹵島만 合葬(합장)하고,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金云式 묘소 바로 위에 金대통령의 배다른 형 金大本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孫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孫昌植씨는 光州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碑文을 썼다.
(출처: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