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밥(이밥) 먹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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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밥(이밥) 먹던 날
‘번쩍’ ‘번쩍’ 하더니 ‘반짝’ 전기불이 왔다. 석유불을 빛 삼아 명절 음식을 하던 온 집안은 불시로 밝아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닭목을 쥐고 일어나서 해놓은 반찬은 식장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마넷은 만가동(다 움직인다)이다. 아버지 곁에서 쌔근쌔근 자던 햇님은 어쩌다가 온 전등불에 눈이 부셔져 깨어나더니 ‘야! 불이왔네. 어머니 지금 몇시입니까? 오늘은 새벽에 불이 다 오고’ 하면서 잠자리에서 깡충 일어서더니 두팔을 벌리고 빙구르르 도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가지런히 놓인 반찬 그릇들과 푸짐한 음식 냄새를 맡더니 너무도 좋아서 ‘날마다 명절이면 좋겠네 나는 정말 좋겠네’ 하면서 손뼉을 짜락짜락 치더니 혼자서 좋아하기는 무엇한지 자고 있는 아버지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빨리 일어나쇼 오늘은 2월 16일인데 빨리 보쇼 어머니는 맛있는 것을 가득 해놓았습니다.’ ‘햇님아 아버지는 3직(오후4-12시까지 하는 일)을 하고 들어와서 이제 눈을 붙였다. 깨우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 잠꾸러기 같은게 전기불에 눈이 부시지도 않은 모양이지’ 하며 종알거린다. 그 소리에 햇님의 아버지는 ‘응 햇님아! 오늘은 정말 명절이지 아버지도 일어나자꾸나 그런데 아버지는 불이 온 것도 모르고 잤구나.’ 하면서 햇님이에게 손을 내밀어 서로 밀고 당기며 일어났다. 햇님이는 빨리 세수를 하고 김정일 장군님께 인사를 드리고 선물받은 과자를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세수 소래와 바가지를 찾았다. 나는 쌀뜸물이 담겨져 있는 소래를 가르키며 ‘구정물은 바게쯔에 뒈지고 세수를 하여라’고 하였다. 물을 버리던 햇님은 쌀뜸물에 가라앉은 몇 알의 입쌀을 보고 ‘어머니 쌀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하면서 고사리같은 손으로 한알 두알 뜸물 아래서 건져내는 것을 보고 이제 겨우 5살인데 입쌀 한알 한알을 저렇게 아까와하는 모습을 보며 가난이 일찍 철들게 한다고 하더니 정말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밥을 푸면서 ‘햇님이 아버지, 옷을 입고 어머니를 모셔오시오. 오늘 아침은 우리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합시다.’ ‘그래 엄마랑 성일이랑 같이 와서 그러면 정말 좋지 뭐’ 하며 내 눈치를 본다. ‘어찌겠습니까? 좀 넉넉히 하느라고 했는데 ---’ 이때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햇님이는 ‘야! 어머니 꼬꼬밥을 했구나. 꼬꼬밥 어머니 가마치가 있습니까?’ (정말 강냉이 밥도 가마치라는 것을 모른다. 시라지를 밑에 깔고 밥을 하다보니 가마치는 정말 보기 힘들다)’ 하며 빡빡 가마치를 긁는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준다. ‘아버지는 빨리 가서 할머니를 모시고 오시오. 코풀래기 같은 성일이 오빠는 오늘도 돼지처럼 먹겠다’ 하면서 기쁨 절반 근심 절반이다. 나는 오늘 입쌀 밥도 하고 밀가루로 빵도 만들고 콩나물채, 감자채, 두부굽이, 시금치채(절근것), 인조 고기채를 하였다. 아침 6시 우리 가정은 시어머니와 한상에 둘러앉았다. 먼저 햇님이가 선물을 가지고 ‘경애하는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에게 과자를, 아버지와 나에게는 사탕을, 성일이 오빠에게도 사탕을 주어 온 집안 식구들이 하나씩 맛을 보았다. 밥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광산에서 선물 공급으로 준 돼지 고기도 끓였으니 말이다. 햇님이는 어느 것부터 먹어야 할지 너무 좋아서 이것저것 짚어보면서 꼬꼬밥 그릇을 보배단지처럼 안고 있다. 한 공기씩 떠 놓은 새하얀 입쌀밥을 보며 나는 가슴이 찌르르 하였다. 정말 1년 365일치고 이 밥을 먹는 날이 다섯 손가락에도 꼽지 못한다. 몇 달전에 돌아가신 큰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찡하며 콧등이 시큰거렸다. 나의 큰 아버지는 광산 설계 실장이었고, 큰 엄마는 일생을 흙냄새를 맡으며 허리가 굽었다. 고난의 행군때 임신 8개월짜리 맏딸을 땅에 묻은 다음 아마 10년은 더 앞서 폭삭하게 늙었다. 소토지로 근근히 살아가던 그 집은 화폐 교환으로 풍지박살이 되었다. 알곡이 좀 눅으면 사겠다고 돈을 조금 모아둔 것이 휴지조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몇 달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큰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지누비(병이 심한 상태)를 한지 한달채 되던 어느 날 나는 벼르고 벼르고 입쌀 반키로 사과 3알, 청어 1마리를 사가지고 큰 어머니의 집을 찾아 갔다. 자리에 누워 있는 큰 아버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큰 어머니에게 가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서 큰 아버지에게 대접을 하자고 하니 오늘까지 이틀 채 아무것도 잡수지 못했다고 하면서 ‘경일이 아버지 햇님이 엄마가 쌀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한다. 그러자 큰 아버지는 나를 오라고 한다. 내가 사과를 깍아드리니 조금씩 잡수시며 ‘너도 살기가 힘든데 이런걸 다 가지고 오는가’고 하면서 나를 걱정한다. 2시간이 넘어서 밥을 하고 청어도 굽고 해서 밥상을 차려드렸다. 큰 아버지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에 기대어 앉아서 밥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후유’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내 죽기 전에 이밥을 한번 실컷 먹어보고 싶었는데’ 한다. 그 말은 들은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큰 아버지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합니까? 약도 잡숫고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하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 날 큰 아버지는 두 숟가락도 잡숫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그때부터 4일후 장마당에서 들어와 저녁을 지어먹은 나는 너무도 피곤하여 가마목에 자리도 펴지 못한채 쓰러져 굳잠이 들었다. ‘햇님이 엄마, 햇님이 엄마’ 하는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석유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밤 11시다. 큰 어머니 옆집에서 찾아왔는데 큰 아버지가 위급하다고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같다고 했다. 나는 오늘 저녁에 들려보려고 했는데 온 몸이 너무 쑤시고 아파서 래일 들리자고 했는데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랐다. 햇님이 아버지가 3직을 나가고 없기에 자고 있는 햇님을 깨워가지고 부랴부랴 큰 어머니 집에 도착하니 이미 때는 늦었다. 큰 아버지는 금방 운명을 하였다. 더욱이 가슴 아픈 것은 3일전에 해놓은 그 밥을 절반도 잡수지 못한채 그릇채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나도 억이 막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큰 어머니 어째서 저 밥이 아직도 저렇게 있습니까?’하니 ‘햇님아! 큰아버지는 이제는 못먹겠다고 하면서 자꾸 나를 먹으라고 내가 그렇게 사정을 해도 자기는 많이 먹었다고 하면서---’ 하더니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결국 그 밥은 큰 아버지 묘지 앞에 가서 묻어놓았다. ‘애미야 밥은 안먹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고 있니 얼굴 표정이 안좋구나’ 나는 밥상의 분위기를 흐리기가 민망스러워 ‘아님니다. 빨리 어머니 잡수시오. 햇님아, 너도 빨리 먹어라’고 하니 햇님이는 ‘할머니 우리는 언제면 매일 꼬꼬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나도 시어머니도 대답을 잃고 말았다.
김일성은 ‘세상에서 우리 인민들과 같이 좋은 인민은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살게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하면서 쌀은 공산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웠으나 묘향산 별장에서 죽었다. 김정일은 수령님의 유훈이 교시를 관철한답시고 ‘지금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데 나라고 어찌 편히 쉬겠는가?’ 하면서 달리는 현지 지도의 승용차 안에서 삶은 감자와 제기밥으로 때(한끼식사)를 에운다고 하였는데 300만명이 굶어 죽고 30만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식을 살리려고 두만강을 넘었으니 김정일이 비명에 죽을만도 하다. 할아버지, 아버지 유훈을 받들어 인민 생활에 박차를 가한다고 하는 철뚜기 없는 저 김정은이는 마식령 스키장이며, 승마장이며, 물놀이장을 건설하는 곳을 돌아치는데 언제면 이밥을 먹을 수 있는가고 물어보는 다섯 살 천진난만한 저 어린 것의 물음에
김정은이여! 대답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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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매번 감가히 봅니다.,
이렇게 자유롭고 편한곳에서 님의 글을 보니 참 죄송한마음을 금할 수가 업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