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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남자만 피웠다?
Korea, Republic of 민속문화 0 265 2013-12-16 11:14:48

담배는 영어로 ‘tabacco’라고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tabaco’, 프랑스에서는 ‘tobac’, 독일·네덜란드·러시아에서는 'tabak', 스웨덴에서는 ‘tobak’라고 부른다. 일본은 ‘다바코’라고 한다. ‘tabacco’의 어원은 콜럼버스 일행이 상륙한 당시 서인도 제도를 비롯한 앤틸리스 제도 일대에 살고 있던 아라와크족이 사용하던 흡연 기구를 그들의 언어로 ‘tabaco’라고 발음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가 부르는 ‘담배’라는 이름은 ‘타바코(tabacco)’가 일본을 거치면서 ‘다바코’가 되고 우리말로 바뀌는 과정에서 ‘담바구’, ‘담배’ 등으로 변한 결과다.

피카소와 헤밍웨이는 시가를 물고 살았다. 처칠, 맥아더, 임어당, 마크 트웨인도 세상이 알아주는 애연가였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 번이나 끊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의 장유가 이름난 애연가였다. 그는 우의정까지 지내고 뒤에 효종의 장인이 된 인물이다. 장유는 문집 《계곡문필》에서 담배의 전래 과정과 당시의 흡연 풍속 등을 상세히 설명해 후세에 남겼다. 그는 “담배를 즐기면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으며, 추우면 능히 이를 따뜻하게 하고 더우면 능히 이를 서늘하게 한다”고 적었다. 왕들 가운데는 정조, 고종, 순종이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도 궐련을 즐겨 피웠다고 한다.

근세에는 시인 공초 오상순이 애연가로 유명하다. 그는 ‘꽁초’로 통할 만큼 담배를 즐겼다. 눈 뜨고 잠잘 때까지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글자로는 금연이라는 두 자다. 이 두 자를 볼 때는 무슨 송충이나 독사를 보는 것같이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루이 14세, 제임스 1세, 나폴레옹, 히틀러 등은 담배를 매우 싫어했다. 면전에서 담배 피우는 행위는 곧 반항이라고 간주했다. 독일의 문호 괴테도 담배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니코틴의 향락은 기껏해야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학 파탄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담배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담배는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유럽을 거친 후 인도양을 건너 일본 또는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담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17세기 초 광해군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헌종 때 학자 이규경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광해군 10년(1618)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중국과 조선의 모든 사물을 60권에 걸쳐 고증한 책이다. 1653년 우리나라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억류 생활 14년 만에 탈출에 성공해 본국으로 돌아가서 《난선 제주도 난파기》(‘하멜표류기’로 알려져 있다)를 썼는데, 그 책의 부록 ‘조선국’ 편에 “조선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50~60년 전으로, 일본으로부터 전래했다”고 기술했다. 담배의 별명은 다양해서 남초(南草), 남령초(南靈草), 담바고(淡婆古), 망우초(忘憂草), 심심초 등으로 불렸다. 한 번 빨아 습성이 되면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어 상사초(相思草)라고도 했다.

초기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이 피웠다. 당시 참고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담배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모양이다. 옛날 양가의 마님들은 나들이를 할 때 항상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든 담배 전담 여종을 뒤따르게 했다. 이들을 연비(煙婢)라고 한다.

또 아무 앞에서나 담배 피워도 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이 궁중에 숙직하는 문관들이 모여 흡연하는 것을 보고는 “입 냄새가 좋지 않다(口不美)”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담배에 관한 예법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윗사람 앞에서는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비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 앞에서, 젊은이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금물이었다. 맞담배질 하는 것을 ‘통죽(通竹)’이라고 한다. 상전 앞에서 서민이나 하인의 통죽은 금기사항이었다. 이에 비해 일부 기녀들은 양반들과 통죽을 했다. 게다가 담뱃대도 함께 쓰는 특혜를 누렸다.

양반의 담뱃대는 쓰임새가 다양했다. 담배를 필 때는 물론 아랫사람을 부르거나 꾸짖을 때 때로는 매로도 쓰였다. 쇠로 만든 대통은 무기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남에게 얻어맞거나 의외의 일을 당해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빗대 ‘대통 맞은 병아리 같다’는 말이 생겼다.

1945년 9월 광복의 기쁨을 기념해 ‘승리(勝利)’라는 담배가 출시됐다. 승리는 우리나라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담배였기에 감격이 더 컸다. 승리는 여러 가지 언어로 표기돼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앞면에는 세로의 한글 글씨로 ‘승리’라고 크게 쓰고, 그 위에 한자로 ‘記念卷煙(기념궐련)’이라고 표기했다. 아래에는 발매처인 조선군정청 전매국이 표시돼 있다. 뒷면은 상단에 ‘Victory’를 흘림체로 쓰고, 그 밑에 영문으로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내용의 문구(CIGARETTES Are a special production of the Monopoly Bureau in celebration of the successful termination of the war)를 적었다. 옆면에는 ‘10 CIGARETTES Y3.’라고 표기했다. 가격은 3원(얼마 후 5원으로 인상), 길이는 6cm. 승리는 아무나 피울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당시 쌀 한 말 가격이 45원, 교사 월급이 440원 정도였다. 승리는 1947년 5월까지 생산됐다.

승리가 나올 무렵 가장 애용했던 담배는 ‘풍년초’로, 쌈지담배라고 불렀다. 풍년초는 잎담배 썬 것을 봉지에 넣어 파는 담배다. 곰방대에 넣어 피우거나 신문지에 말아 피웠다. 담배를 파는 곳에서 풍년초용 종이를 따로 팔기도 했다. 종이는 얇고 누런 색깔이었다. 그러다 하얀 종이에 깨끗하게 말려 있는 승리가 나오자, 이를 ‘흰 담배’라 불렀다. 네모난 갑에서 하얀 담배를 꺼내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승리를 피우는 것 자체가 상류층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승리’가 우리나라 궐련담배(卷煙: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 즉 종이말음담배)의 최초일까? 그렇지는 않다. 초기 궐련은 청나라와 일본에서 들여왔다. 1897년부터 청나라 상인들은 주로 ‘칼표’라는 영국 상사의 궐련을 팔았으며, 일본인들은 ‘히어로(Hero)’ 등을 본국에서 가져다 팔았다. 히어로는 일본 무라이(村井) 담배회사가 우리나라에서 판매했던 담배다. 담뱃갑에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넣어 ‘나랏님에 대한 불경’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궐련을 생산·판매한 것은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에 의해서다. 일본인들은 1905년 연초 공장을 증축하고 ‘이글’표(매표 담배) 담배를 생산했다. 비록 일본인이 만들었지만 이것이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궐련의 효시였다. 담배는 양절 궐련(막궐련, 필터 없이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으로 10개비 한 갑에 3전을 받았다.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이 이 담배를 피웠다. 그해 신석합명회사라는 궐련제조회사가 생겼다. 경영자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이듬해 7월에 문을 닫았다. 이후 동아연초주식회사, 조선연초주식회사 등 민간업자들이 담배를 제조·판매했다. 1907년 영미연초회사는 ‘뽀삐’를 내놓았고, 1912년 동아연초사는 ‘전화표’, ‘금구’, ‘따리아’ 등의 브랜드를 선보였다.

1945년 ‘승리’에 이어 1946년에는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민족의 꽃 ‘무궁화’의 이름을 딴 담배가 나왔다. 1948년에는 정부 수립에 맞춰 새벽 닭 울음을 뜻하는 ‘계명’이 출시됐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전우야 잘 자라〉의 2절).” 1951년 현인이 불러 널리 애창된 진중가요다. 19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최초의 군용 담배인 ‘화랑’이 나왔다. 화랑은 1981년까지 무려 32년 9개월이나 장수했다.

195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필터 담배인 ‘아리랑’이 나왔다. 초기 ‘아리랑’은 종이와 천을 말아 만든 필터여서 흡연감이 좋지 않았다. 애연가들의 불평이 쏟아지자 곧바로 품질이 좋은 국산 필터가 나왔다. ‘아리랑’은 1958년부터 1976년까지 판매했다가 중단되고,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재발매했다. 1960~70년대에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거나 정부시책 홍보성이 강한 담배들이 줄을 이었다.

1960년대에는 ‘새마을’, ‘새나라’, ‘희망’, ‘자유종’, ‘상록수’, ‘청자’ 등이, 1970년대에는 ‘환희’, ‘한산도’, ‘거북선’, ‘남대문’ 등이 대표적인 담배였다. 특히 1969년에 나온 청자(전통문화를 계승·발전한다는 의미)는 당시 최고급 담배로 애연가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전국에 담배 이름을 딴 ‘청자다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정도였다. 발매 초기 품귀 현상을 빚어 담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술집이나 다방 업주들이 웃돈을 주고 몽땅 사다가 단골손님에게만 팔았기 때문에 일찍 동이 났던 탓이다. 청자는 29년 4개월 동안 애연가의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나온 ‘88시리즈 담배’, 국산 담배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진 ‘솔’, 처음으로 약초 곽향을 첨가한 ‘도라지’ 등이 선을 보였다. 솔은 군용 담배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90년대 이후에는 국산 담배의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영어식 이름의 담배가 주류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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