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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한 북한 지하교회 여성 신자
United States 사한전 0 232 2014-01-12 14:10:35

탈북한 북한 지하교회 여성 신자

북한에 신앙의 자유가 있다구요, 웃기는 얘기죠 

李在禎의 희한한 북한 종교관

 

李在禎(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11월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렇게 대답했다. 
북한에 장로회, 천주교가 있고 교회를 짓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의 발전이라 생각한다
성공회 성직자라는 사람이, 그것도 통일부 장관이「북한에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교회가 신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2005년 4월, 한 북한인권단체 사무실에서 만났던 정은혜(23·가명)씨였다. 앳되지만 야무져 보이는 아가씨였다.
북한인권단체 관계자는 당시『저 아이는 북한에 있을 때 기독교를 믿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아버지는 10여년 전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가족을 북한에 남겨 둔 채 혼자서 북한을 탈출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 정양이 말로만 듣던 북한 지하교회의 신자라는 말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가족이 아직 북한에, 그것도 강제수용소에 있다는 얘기에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재정씨의 인사청문회 발언을 접하고 난 후, 정은혜씨에게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정은혜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고려해 사진촬영을 하지 않고, 인적사항과 관련되는 문제들은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12월5일 만난 정은혜씨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여대생들과 다를 바 없이 밝고 활달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튀어 나오는 평안도 억양이 그녀가 북에서 내려왔음을 짐작케 했다.
  
할머니에게서 기독교 배워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됐습니까.
『조부모님 때부터 집안이 기독교를 믿었습니다. 원래 우리 집안은 황해도에서 살았는데, 金日成이 정권을 잡고 기독교를 청산할 때, 기독교를 믿던 이웃들과 함께 평북 산간오지로 쫓겨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북한이 공산화된 이후 50년 동안 가족이 신앙을 계속 지켰습니까.
『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몰래 예배를 보아 왔다고 합니다』
 
예배에는 가족들만 참석했나요.
『가족들 말고도 인근 마을에 사는 분들이 적으면 5~6명, 많으면 7~1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의 나이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대개 50代 후반에서 60代였습니다. 우리가「회령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60代 할아버지의 딸도 같이 왔는데, 그는 30代 중반쯤이었습니다』
 
예배는 누가 이끌었습니까.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이끄셨습니다』
 
정은혜씨도 예배에 참석했나요.
『저는 나이가 어려서 동생이랑 밖에서 망을 봤습니다』
 
그럼 기독교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어 려서부터 할머니가 무릎에 저희들을 앉혀 놓고,「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金日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잠시라도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하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가도 많이 불렀고요』

 

  
2003년 3월 남북한 종교인들의 3·1절 민족대회차 명동성당을 방문한 북한「천주교」신도들.

金日成이 唯一神인 북한에서「종교의 자유」는 철저한 박멸의 대상이다.

 
할머니의 성경책
 
성경책이 있었습니까.
『日 帝 시대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시던 세로쓰기를 한 오래된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그 성경책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아버지도 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그 성경책을 한글로 풀어 손으로 쓰셨는데, 그게 열 권쯤 됐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작은 성경책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성경은 어떻게 구했습니까.
『아버지가 중국에 있는 먼 친척뻘 되는 조선족 목사로부터 얻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종교에 대해 뭐라고 배웠습니까.
『학교에서는「종교는 마약이다」라고 배웠어요』
 
종교에 대해 집에서 들은 것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서로 달라 갈등을 겪지는 않았나요.
『종교를 비난하는 강의를 듣거나, 종교를 부정적으로 그린 「성황당」 같은 영화를 볼 때는 조금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어 왔기 때문에 큰 갈등은 없었습니다』 
 
지하교회가 들통 난 것은 언제였습니까.
『金日成이 죽기 전 해인 1993년 가을이었습니다』
 
낌새가 있었나요.
『망 을 보는데, 예배 보러 온 이웃마을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낯선 사람이 한동안 지켜보다가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서 어른들께 그 말씀을 드리니까, 그 아저씨도 「누가 따라 붙는 것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얼마 후부터는 아버지께서「평소 가까이 지내지 않던 黨간부들이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이것저것 묻는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 어땠는지 기억하세요.
『1993 년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옷가지 등이 밖에 팽개쳐져 있고, 집안 여기저기 발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겁에 질려 울고 계셨고…. 다음날부터 어머니와 언니, 오빠들이 보위부에 불려가 10여 일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 후 아버지 소식은 못 들었습니까.
『네』
 
그 후 어떻게 됐나요.
『한동안 그 마을에 살다가 1994년 말, 가족 모두 더 깊은 산간오지로 추방됐습니다』
 
다른 친척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나요.

『아버지가 잡혀간 지 석 달 후, 청진에 살던 외숙모가 보위부에 잡혀갔습니다. 우리 집에 왔다가 아버지가 잡혀가셨다는 말을 듣고,「우리 집에 있는 성경도 얼른 감춰야겠다」며 급히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미 보위부에서 사람이 나와 있더래요. 보위부원이「너,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묻자,「그렇다. 나는 예수를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잡혀갔답니다. 외숙모 가족들도 오지로 추방됐는데, 광주리 같은 데 사람을 담아 위에서 끌어올려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작업반장 등으로 있던 친척들도 다 撤職(철직·해임)됐습니다』
 
추방지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인민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산골짝으로 쫓겨가 나무뿌리를 들추고 뙈기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어 가족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1996년「고난의 행군」때가 특히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잡혀가기 전에는 그래도 제법 사는 편이어서 쌀밥을 먹었는데,「고난의 행군」때 처음으로 죽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시래기 등을 넣어 죽을 끓여 주셨는데, 그게 목에 넘어가지 않아 울면, 내게는 묽은 쌀죽을 끓여 주셨어요』
 
학교는 어떻게 다녔습니까.
『친척 집 신세를 지면서 고등중학교를 마쳤습니다』

 


1997년 9월 평양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남북한 개신교도들

  
脫北
 
신앙생활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 버지께서 식사 때면 성경 말씀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성경 말씀과 북한의 현실을 비교해서 말씀해 주신 것들, 특히 종말에 대해「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한 마가복음(13장12절) 말씀을 해주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추방지에서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가족끼리 예배도 못 보고…』
 
북한은 언제 떠나왔습니까.
『2003년 여름에 언니와 떠났습니다』
 
어떻게 북한을 떠나게 됐나요.
『1990 년대 초 우리 집을 찾아와 성경을 전해 주셨던 조선족 친척 목사님이 2003년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은 아버지가 잡혀간 후 우리 가족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지, 도울 방법이 없는지 등을 알아보려 사람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보위부에서 우리를 떠보려고 보낸 사람인 줄 알고, 그냥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이 험한 길을 사흘 동안 계속 찾아온 사람이니, 믿어 보자」고 했습니다. 
 
그 사람 편에 보낸 휴대폰으로 목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 한밤중에 언니와 산꼭대기에 올라가 추위에 떨면서 통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부모님 이름, 전에 살던 집 구조 등을 꼬치꼬치 물어보더군요. 목사님이 우리에게「중국으로 넘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를 위해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가나. 고생을 해도 같이 하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 천국에서 목사님을 뵙겠다」고 했습니다. 
목 사님은「너희는 아직 젊다. 그곳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평생을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어차피 시집을 가게 되면 어머니 곁을 떠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서 더 배우고 세상 보는 눈을 넓혀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하시더군요. 어머니께서도「목사님 말씀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정은혜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당시 갓 쉰이 넘으신 나이였는데, 그때 벌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가 하얗게 샜어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아주머니들이 예쁘게 꾸미고 계신 것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막 나요』 
 
어떻게 脫北했나요.
『목사님이 보낸 안내인과 함께 밤중에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물이 허리까지 차더군요. 한 15분쯤 지나니 중국땅이더군요』 
 
중국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친척 목사님께서 보살펴 주셨습니다』
 
중국에서 교회에 처음 가봤겠네요.
『네, 교회라고 하면 집에서 몰래 조용히 예배 보던 것을 생각했는데, 건물에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 있고, 증폭기(앰프)에서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이러다가 잡혀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교회 안에서는 일어나 춤추고 율동하면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눈물이 막 나왔습니다.「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세상이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여태까지 이런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골 국경 넘다가 언니는 잡혀
 
정은혜씨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한국에는 잘 온 것 같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금방 밝은 목소리로『네』라고 대답했다. 
 
지금 다니는 대학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습니까.
『원래는 신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께서「아직 나이도 어리고 한국 사회도 잘 모르는데, 일단은 일반 대학에 진학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경험을 쌓는 게 좋다」고 권하셔서, 일반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습니다』
 
대학 생활은 어떻습니까.
『영 어공부 하는 게 조금 어렵습니다. 북한에서는 영어를 별로 중시하지 않거든요. 北에서 내가 못 배운 것을 인정하고, 새 땅에서 한 살짜리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떼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배워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편하고, 배우는 것들이 재미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추방지에서는 우리 집 양쪽에 있는 집에서 감시를 했고, 집안에 도청장치가 있어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집 밖에 나와서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놀리면서, 아무도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와서는 내가 바른 행동을 하면 주위 분들이 칭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럴 때면 정말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요.
『명 절 때면 가족이 보고 싶어서 많이 웁니다. 같이 몽골 국경을 넘다가 잡혀간 언니를 생각하면…. 몽골 국경을 넘기 위해 중국을 떠난 날이 언니 생일이었어요. 「집에 그대로 있었으면 어머니와 함께 생일을 보냈을 텐데, 우리는 자유를 찾겠다고 길 위에서 생일을 보내는구나. 한국에 가서 생일을 쇠자」고 했는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정은혜씨는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으며 한참을 흐느꼈다.「아차」싶었다. 정은혜씨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 몽골 국경을 넘을 때의 일을 물어보았다.
 
『나 와 언니, 10대 중반의 소년, 그리고 안내인이 일행이었어요. 인적 없는 사막을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밤이 되자, 안내인이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며 「저기가 몽골에 있는 우리 목적지다. 철조망을 세 개만 넘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철조망을 두 개 넘었는데, 세 번째 철조망 근처에 중국 공안들이 매복해 있었어요.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나는 도망치다가 모래를 파 구덩이를 만들어 숨었습니다. 밤새 공안들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탐조등을 비춰 댔어요. 밤새 울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날이 밝은 후 보니 아무도 없더군요. 돌아갈 수도 없어서 철조망을 넘어 몽골로 들어갔다가 몽골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언니 소식은 그 후 못 들었습니까.
『네, 북한으로 보내져 강제수용소에 갇혔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어머니나 다른 가족 소식은 들은 적이 있나요.
『못 들었습니다』
  
『한국 목사들 방북, 진정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한국에서 목사들이 남북 기독교인 교류를 한다고 북한에 가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관계자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이 나오자 정은혜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웃기는 얘기죠. 저는 북한에 봉수교회·칠골교회가 있다는 것을 중국에 가서야 처음 알았어요.
유 명한 목사님들이 북한에 가서 金日成이나 金正日을 만나고 와서 마치 남북화해를 위해 큰일을 하고 온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볼 때면, 우습고 가슴이 아파요. 그들이 봉수교회에서 조그련 사람들이랑 형식적인 예배를 볼 때, 숨어서 숨죽이고 예배를 보다가 잡혀가는 진정한 信者(신자)들을 잠시라도 생각했는지 묻고 싶어요』

 

출처 : 월간조선 2007년 01월호

출처 :북한주민인권

http://cafe.daum.net/remember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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