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들(조선족) 안해들은 왜 이쁠 까?! |
---|
이유없어도 고향처럼 들어오는 곳이 탈동홈이다. 한담하듯 글을 다수 썼지만 이번 처럼 연재하라는 촉구는 처음이다. 예술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또 중국내 탈북자 삶의 여러면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 탈북자인 나의 여비를 빼앗고 폭력하다 오히려 나 딩군 깡패는 당시 고발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이를 강력히 제지한 것이 선생했다는 그의 아내였다. 더러운 복수는 되어도 이익이 뭐냐이다. 오히려 법적피해와 벌금... 그래서 내가 살아 났다. 그것이 감사하여 훗날 한국에 도착하여 감정을 접고 그들이 그토록 오고 싶어 하는 한국행을 도와주려했다. 마침 한국의 준재벌기업인 도루코 회장(탁시근 정주출신)을 잘 알게되어 부탁했다. 회고록 한부분을 부탁할 정도로 저를 좋아했던 관계였으므로 오케이. 당시 한국오기 힘들어 중국돈으로 2만원인가 5만원 들여야 한국올때이다. 중견기업이 담보 초청하면 그냥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깡패들이 평안히 돈만 벌다 가겠는 가였다. 중국에서처럼 술마시고 캥판피우고 범죄하면 나보다 회장님 낯에 똥칠...그래서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 성인되어서 난생처음 깡패속에 있어보니 놀라운 것은 깡패 아내들이 하나 같이 이쁘고 똑똑 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 가?! 눈물나도록 동정햇다는 깡패아내(유치원선생출신)에게 물었다. 남자같에서 응하려 했는데 알고보니 유명깡패로 다른 선을 보려고 나가니 어느새 알고 패거리들이 가로막고 죽여버린다고 해서... 지금도 무섭냐고 하니- 애 둘 낳는데 뭐가 무섭냐고 딩딩날았다. 정말 주정하며 애들패고 난리일때 아내가 세차게 나서니 꼼짝 못해... 이렇게 이쁘고 똑똑한 여자들을 쟁취한 깡패들이 부러웠다. 깡패처럼 여자들을 우선 따먹고 봐야 하나?! - 요즘 탈북여성들이 팔리고 성노예이고 말이 많다. 내가 있을때는 탈북여성이 전무 할때인데 그때는 남자가 <팔리던 시절>을 경험했다. - 숨어 있는 곳은 농촌보다 도시가 낮기에 연길시에서 조선족 집 세 곳을 전전 하며 숨어 있었다. 하루도 아니고 1년씩 숨어 있다는 것이 감옥이 따로 없었다. 남의 집에 있으니 그저 노예처럼 숨죽이고 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열심히 청소하고 일했다. 아무리 노예가 되 받들어도 어른보다 아이들의 괄시가 어쩔 수없이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농번기때는 집주인의 농촌에 있는 친척집에 보내달라고 하여 농사일을 도왔다. 꽁짜로 농사 도움을 받으니 매우 좋아하였다. 훈춘, 길림에도 갔었는데-길림시에서 연변쪽으로 오는 초입에 량가자촌에 촌장 집. - 수걱수걱 농사일은 물론 그 집과 함께 있는 딸 자매가 운영하는 식당주변을 북조선의 위생사업하듯 깨끗이 정리하고 매일 청소해주었다. 동네에서 - 멋 있는 인부를 구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 어느날 주인이 날 불러 앉히고 -자기 둘째 딸과 살지 않겠는가 진지하게 묻는다. 첫째딸은 이미 시집, 사위와 한집에 있는데 ... 밤새도록 마작에 미쳐 있다. 술 담배는 고래이고... 이에 비견한 북조선나그네는 술담배는 커녕 수걱수걱 일 잘하고 일이 끝나면 샤와하고 책보는 것이 전부. 탈북자인 나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였지 결코 멋있는 남자가 아닌데. 그럼에도 주인부부와 둘째딸이 보건데 맏 사위와 형부와 비견해 볼때는... 그래서인지 둘째딸(사실이지 언니보다 이뻤다.)도 몇번이고 사랑의 눈빛으로 접근 해오는데 속은 불같지만 이거야 연애를 해보았어야지...오직 때려부지자 혁명 만 부르짖었는데... ------- 아이고! 낮이 일을 많이해 졸음이 와서....미안 죄송 끝 - 자고 일어나니 ...아래 댓글 자 연변독수리님때문에 빨리 써야 겠다고 생각. 애까지 낳았다고 험테기 쓰지 말아야지^^ - 애는 고사하고 솔직해서 오히려 쫓겨나게 되어. 북에 있을 대 연애하나 없고 혁명만 부르짖는 중국영화가 가장 재미 없었다. 근데 그게 내꼴이고 개혁개방된 중국인들이 오히려 얼마나 발그러졌는지요. 여자 남자 좋아하는 것이 뭐가 혁명의 대상이냐이다. 아침 저녁나는 그 집 옆의 내가에 가서 세수하고 냉수마찰 또는 목욕하고 오다보면 이유없이 둘째딸이 마주 오다 내가 피하려 하면 앞가슴을 내밀며 막아나선다. 이에미나이 어카라고 이 야단이야. 여자다룬 경험이 없는데다 탈북자꼴에 여자 다쳤다가 문제되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커. 그러면서도 여자에 굶주려 속에서는 불 같고... 차라리 이 처녀가 나를 끄러안아주었으면 ... - 둘째딸과 살겠나는 주인부부의 물음에 - 지금생각하면 천하바보천지같은 솔직한 말 <이처지에 여자를 책임질 수 없는데 어떻하지요?> 그 거 몰라서 물어봤겠나, 이런- 여기서 점수가 떨어져 이 집을 떠나야 했다. 사실 좋은인부 땜에 식당과 집주변이 변신했다는 소문이 나 파출소에서 먹고가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먼 친척이지만 길 맞은 켠 식당에서는 질투심이 날 만하기도 했다. 이들이 신고했는지?? 주인집은 결단해야 했다. 하나방법은 둘째딸과 살게한다. 호구증은 돈 주면 하니까. 또하나는 소문때문에 아쉬워도 내보내야 했다. - 나를 데리러온 조선족 깡패는 - 이런 쓍치같은 거,,,벗기고 해먹을 판인데 주겠다는 것도 차버려- 상머저리! - 입에 다들어 온 떡을 밷어내는 생머저리 짓을 했지만 그때 탈북자로서 규범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범죄하지 않고 또 인심을 얻으면 공안도 잡아가지 않는다! 물론 훗날 범람하는 탈북 인파 속에 별의 별 사건이 많아져 이 공식이 꼭 맞는 것이 아니어서 무고한 탈북자들이 희생양으로 되기도 하였지만 그 때는 그랫다. 이 공식을 체득하여 쏘련 넘어갔을 때도 살아남아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본다. 모스크바 망명시절 - 건설공으로 탈북한(이진호)친구가 있었는데 목수재간도 높지만 주색을 좋아하다 끝내 여자문제로 신고되어 오지 못하는 불상사를 바로 곁에서 보았던 것이다. - 사역때문에 작년에 중국오가는 여객선 안에서 공안출신 조선족과 한방. 심양공안국에서 은퇴, 현재는 자녀따라 한국국적취득자.
내가 탈북자 출신 임을 숨기고 탈북자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단마디로 <다 잡아 죽여야 해요(북송).>하고 격하게 나왔다. 공안시절 동족으로서 탈북자가 불쌍하여 집에 여러명 기거시켰는 데 어느날 쓸만한 것 가지고 말도 없이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말 들으면 탈북자는 죽일 놈이다. 그러나 인간사 어디를 보나 그런 놈은 있다. 요즘 문제되는 세월호 선장, 군부대 가혹행위 등을 보라. 그렇다고 다 싸잡아 나쁜놈이라고 할 수 있을 가. 그런 평균으로 볼때 그래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이 탈북자 이다. 지금도 부평초처럼 떠돌며 생사고비, 온갖 구박속에 있을 탈북자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린다.
이에 비해 자유를 찾은 우리는, 또 탈북 못하고 있는 2300만의 북녘동포에 비해 우리는, 2300만의 1에 해당한 로또복권에 당첨된 자들이다. 이 점을 잊지말고, 자살은 꿈에도 꾸지 말고 감사하며 어려움들을 이겨나기를 기원드린다.
경험이 최고의 재산과 지식이라고 한다. 북남을 경험한자는 우리밖에 없다. 지금은 어렵고 부족하다해도 통일후에는 우리 이상 없다는 비젼을 가지고 열심히 사시기를 두손모아 빌면서- 이만 합니다.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웃음이란 분의 상욕을 보니 그 시절의 순수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ㅋㅋ
그 둘째딸과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졌는가요? 결과는 없는것 같은데 과정이 여전히 궁금하네요.. 예전에 내가 근무하던 연길 어느 곳에 북한엘리트 남자가 와서 복장공장을 운영했는데 그 마을에 조선족여자랑 살며 애까지 낳았던데, 그 북한남자는 돈이 억수로 많더군요. 그 당시 자가용도 몇대 없던 세월에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니.. 어느 당간부 자녀인듯, 후에 보이지 않던데 아마 북한에 숙청되어 가족을 데리고 해외로 도망친듯..
- 버티고개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08-08 19:09:51
- 버티고개님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4-08-09 09:05:04
감사하며 당장 수정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