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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자 입니다
Korea, Republic of 살인자 0 290 2014-09-04 20:16:35

막 타자 한 글이라 좀 엉성 하여도 고냥 일어 보이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 000 의 3째 아들로 태여 났습니다.

저의 어머님 강 정희 는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 면 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천주교 교육을 밭

으면서 어린 나이에 영세를 받고 신자로 성장하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북한은 공산정권이 설립되고 종교를 말살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 강 용길 은 남조선 노동당 청년 부장으로 활동 하다가 체포 되었고 석방 후 지

리 산 에서 사망 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 가 남로당 이였다는 이유로 만경대 혁명학원 군사 교원을 하시던 아버지와 우리

어머님은 오지로 추방당하고 우리는 배 곪는 날이 배부른 날보다 더 많았습니다.

아들 2명 딸 한명과 아버지를 공양 하시고 부양하신 우리 어머님의 허약해진 몸으로 저를

임신 하시 엇습니다.

병원에서 급성 간염이 오시였다고 저를 낙태 시키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머님은 생명을 지우

시는 것 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저를 끝가지 지키시고 저를 세상으로 내보내 주시

엇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뜻을 지킨 어머님 세상의 빛을 보내 하여주신 어머님을 40년 동안 원망 하

였습니다.

저는 1963년 6월 3일 함경북도 경성군 증평 리 안금 이라는 동네에서 불구로 태여 낫 습

니다.

모양만 사람이고 팔과 다리는 문어처럼 물렁거리는 기형적인 아이로 태여 난 저는

아버지의 짐 형제들에게는 창피한 동생 형이 엇 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저를 위하여 매일 기도 하시고 저를 위하여 약초도 구입 하시고 맛있는 것도

해주시여 저의 뼈가 단단하게 되었고 6살에 걷기 시작 하였습니다.

제가 걷기 시작하자 어머님은 너무 행복하시여 눈물 을 훌리 시였습니다.

저는 애기처럼 넘어지고 다치고 뼈가 부러지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병신, 병신,

하며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의 놀림이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불구로 태여 나 6살까지 세상에 험한 말을 배워볼 기회가 없어 순수하게 하느님 보

시기 좋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전쟁피해 증상으로 성 억제 능력을 상실하시여 바람을 피워 다시 함경도

연사군 발전소 건설장으로 추방 당하 옅습니다.

1970년 어느 날 광양 초등학교를 입학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학생 중 제가 제일 키가 작았습니다.

첫 수업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의 난쟁이 송치 원숭이 하며 놀려 됐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저는 아이들의 놀림 대상 이었습니다.

오후에 또 다른 아이가 저를 놀리자 욕을 모르고 자란 저는 제일 나쁜 말이 생각나서 “새각

씨 야 . “

하고 처음으로 반항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와 하고 웃고 어떤 아이들은 배를 않고 땅에서 대굴대굴 또 한 아이는 저를 발

로 찾습니다.

저는 정말 첫 등교 날 눈물을 제일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매일 눈물로 수년을 공부하였어도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하였습니다.

건설 현장을 놀이터로 한 초등학교 학생들은 배운 것이 건설 자 수만 명 중에 쌈 잘하는 깡

패들의 무훈담이나 그들의 하는 거칠고 무식한 말만 따라 하게 되었고 저도 서서히 동화

되어 갔습니다.

광양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친구들도 생기고 나도 저녁이면 영화관에 가서 형들의 패싸움 하

는 것도 보고 건설 노동자들의 때리고 악을 쓰며 막말을 하는 것도 배우면서 나도 싸움 잘하는

사람이 되는 환상도 하고 싸움을 하는 기술도 배우고 싶어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친구 가 왔는데 저의 큰형님의 저의들을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 야

저분의 2건설에서 싸움 제일 잘하는 사람이야 까불지 마, “

하고 말하고 아버지와 그분의 대화가 끝나자 바로 귀에다 뭐라 뭐라 하는 것입니다.

“형님 ”

하고 저의 아버지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형님 맏아들의 나보고 싸움하는 것 가르쳐 달라고 하네요,”

“네”

“애들아 나는 여기 수 만 명의 건설 자 들 중 제일 가는 주먹이지만 사실 나보다 더 싸움

잘하는 분이 있다, “

“너의 아버지다 전쟁 때 정찰 중대장이 이었다,”

우리는 모두 놀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전쟁 장교 인 것을 알았지만 정찰 중대장이라니,

우리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가”

라고 하시면서 윗방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그날 밤 야심 까지 영웅의 싸움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이 남는 것 은 투지 정신 오직

저놈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마음 그리고 많이 맞아야 한다는 것 …….

이날 이후 학교 에 가면 아이들의 때리면 xxxx 새끼하고 덤비고 맞고 또 맞고 거친 말은

골라 가면서 하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고 골목대장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태아에서부터 약골이고 뼈가 약한 저는 이기는 싸움을 하지 못하고 터지고 찍기고

찢어지고 부러지고 동네 약한 아이 대장만 하였습니다,

맞으면 밤에 때린 아이 집 창문을 부수고 창고에 불을 달아놓고 파이프로 아이들의 머리를

치고 저는 점점 나뿐 아이가 되었습니다,

공부하기도 싫고 학교도 싫고 집도 싫고 하여 기차를 타고 평양 평성 사리원 함흥 청진 해

주 등 북한 여러 곳 을 방랑 하였습니다,

여기서 칼 쓰는 법 서리하는 법 등 배우고 점점 깡패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싸움도 잘 못하고 약하고 작은 저를 되리고 가려는 친구가 없어서 저는 기차역 창고

지하실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를 하였습니다,

이 지하실은 6.25때 폭격을 당한 자리에 창고를 지었는데 개구멍으로 들어가면 지하실이

있다는 것 을 북한 경찰은 모르고 있었고 깡패들의 아지트가 된 것입니다,

도적놈들의 가져 오는 것 중에 책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북한도서 소설 철학 북한 금지 도서를 읽고 저녁이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제가 몬테크리스토 백작 돈키 호데 축복 제인 에어 삼총사 타잔 전쟁과 평화 어머니 등 많

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여 주면 아이들은 드라마 보듯이 기다리고 저를 사랑하여 주었

습니다,

여기서 소설과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포에르바하 등 공산주의 서적도 읽고 나도 사람 처

럼 살려고 학교를 찾아 갔습니다,

학교에서는 저를 무척 반가워하였습니다,

1년 중 2개월도 공부를 하지 않은 저를 졸업장을 주고 서두수 발전소 건설장으로 보내 주

얻습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여 북한 5번째 훈장과 메달 그리고 현금 천원을 가지고 사랑하는 어머님

의 계시는 고향으로 10년 만에 돌아 왔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8형제를 키우시면서 정말 고생 하시 이었습니다.

마침 둘째형 결혼식이라 매형 누나 형님 형수 동생 조카 수십 명의 북적대고 명절 분위기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어머님의 보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을 찾아 여기 저기 다니다가 창고에서 불빛이 새여 나는 것 을 보고 창고 문을

열었더니 어머님의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착실한 천주교 신자시기에 한번 도 기도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다른 기도는 모르시는지 몰라도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사도신경을 만 하시

이었습니다.

저를 제일 사랑 하신 어머님은 제가 아파 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성모송 하시고 사도 신경 하여 주시 이었습니다.

제가 크면서 속으로 하시 얻고 제가 영세를 받고서야 어머님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

경을 저를 위하여 기도 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장모와 아내가 없을 때 모자가 함께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 신경

기도를 눈물 흘리며 올 리 이었습니다.

북한의 종교 탄압의 심해지자 어머님은 속으로 기도를 하시 얻는데 걸어 가시면서도 누워

서도기도 를 하시 얻는 데 이때 어머님 입이 움직였습니다.

하여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은 어머님을 정신병자로 치부 하시여 병원에 강제로 입원 시킨

적도 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의 이름을 김(金)성(成)천(天) 한문 그대로면 하늘을 이르라 이지만 북한

현실에서 문제 되지 않기 위하여 지우신 이름입니다.

어머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살라는 뜻이라고 제가 영세를 받은 후

에 말씀 하여 주시 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의 다시 창고에서 어머님께서 나의 어린 시절 자장가처럼 들려주시던 성모송을 하

시는 것입니다.

“어머님”

너무 놀라신 어머님 모습의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머님 왜 여기서 또 중얼거리십니까?”

“어미 한데 말버릇 없이……. ㅉㅉㅉ ”

제가 초불 2개를 더 키워 보니 옥수수 수십 가마니 가 뒤주에서 담겨 져 있는 것입니다.

“어머님 강냉이 어디에 쓰시려고 …….”

“너의 형 결혼식 날 입을 정장과 형수 입을 한복을 마련하자면 이것 다 팔아도 모자란다.

마침 잘 왔다. 나를 도와주렴. “

“엄마 이 많은 강냉이 팔아야 옷 두벌 산다는 말씀입니까?”

북한에서 1개월 노동자 쌀 공급 양이 18kg인데 저희로선 수백kg의 옥수수를 팔아서 옷

2벌 장만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 의 설명 하여 주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북한에서 주는 식양으로 부족한 양식을

북한 법을 어겨 가시면서 옥수수를 심어서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또 이것을 팔아

자식의 결혼식 날 옷을 잘만 하시는 우리 어머님.

이것을 판다면 어머님은 나라에서 주는 280g 의 옥수로 간식도 없고 고기도 없는 북한실정

을 아는 저로서는 어머님의 배고파하실 여름을 생각 하니 눈물의 났습니다.

“엄마 정장하고 한복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1000원이다”

“그래요 엄마 믿는 신에게 빌어보세요

그러면 돈 1000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입니다. “

장난도 하고 싶고 울적하신 어머님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기 때처럼 해가며 …….

“ 엄마 눈감아 빨리 …….”

순진하시고 착하신 우리 어머님은 눈 감으시고 주님 하고 또 기도를 하시였습니다.

저는 다시 어머님 손을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마치 거친 나무로 깍은 물건 같은 엄마 손을 보면서 눈물을 머금고 제가 청년 시절 10년을

번돈 1000원을 가만히 엄마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눈을 뜨시던 어머님은 아이고 주님 감사합니다.

하시고 펑펑 우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준 돈을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어머님의 순간 미웠습니다.

“우리 아들 웬 돈이냐? “

“어머님 제가 10년 모은 돈입니다.”

공산당원인 아버지 어머님을 괴롭히는 나의 원수 아버지 와 8남매를 키우시느라 새 옷 한번 못 입어 보시고 배불리 먹어 보지 못하신 나의 어머님 단돈 100원도 만져 보지 못하신

나의 어머님 오늘은 거금을 받으시고 눈물을 오래 동안 흘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엄마 울지 마 울지 마.”

“아들아 너는 주님의 주신 선물이다.”

다른 아들 보다 몸이 약하다고 늘 마음 쓰였지만 주님은 나에게 이런 보배 아들을 주시 이었구나. “

우리 어머님 의 말씀 하시는 주님은 누구인지 몰라도 어머님의 섬기는 신이라는 것을 우리

식구 중 저만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28년 만에 우리 어머님의 행복하시는 것 처음 보았습니다.

저를 내보시고 2시간 후에야 어머님의 집으로 들어 오시 엇습니다.

술 먹고 안주 먹고 희희낙락 하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미웠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게시든 없든 관심도 없는 더러운 사람들 …….

다음날 저는 2재형과 형수 와 함께 북한 청진 수남 수장으로 갔습니다.

시장에서 정장을 만들 중국천 사고 한복감 사고 형하고 소주 한잔 하고 나니 1000원하고

300원의 어디 간지 없어 진 것 입니다.

집에 오면서 말이 없는 저를 보기 민망하였는지 형은 자신이 벌어서 값을 것이니 걱정 하

지 말라며 위로를 하여 주는 것입니다.

저는 형에게 화를 냈습니다.

나의 청춘을 바쳐 번 돈이 한 끼 식사에 옷 두 벌 감이라니 생각 하니 나라에 속여 산 것 갗

고 청춘 을 허비 한 것 같은 나의 심정은 모르고 허튼 소리 하는 형이 싫었습니다.

그래도 10년 고생하여 모은 돈 으로 나의 사랑 하는 어머님 행복하게 하여 준 것만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결혼식 이 끝나고 고향으로 다 돌아가고 막내와 어머님 저만 남았습니다.

어머님께 저의 심정을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님 저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어머님 과 저를 위하여 일하고 살 것입니다.

어머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병원 원장님과 친한 사이시니 저를 소개 시켜 주십시오.

저는 사회 보장 환자로 치료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사를 할 것입니다. “

맞고 오고 불 지르고 때리고 공부 안하고 가출 하여도 눈물 흘리시며 저를 타이르시던 어머님 용서 하시던 어머님 아무 말씀 하시지 않으시고 병원장을 만나서 저를 사회 보장 환자로 만들어 주시 이었습니다.

수십억의 인류의 어머님 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 얻을 것입니다.

장사 경험도 없지 돈도 없지 뭘 한다는 말인가 등 잔소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님은 아무 말 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저를 믿고 도와 주시 이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 않고 잡아가는 북한에서 유일 하게 자유인은 사회보장환자와

장애인 이 이었습니다.

태아 때부터 불구 이었던 것을 아시는 원장님은 저를 사회 보장 환자로 만들어 주시 얻습니다.

미국 한국에 대하여 말씀 해주시고 보위부 승인을 받지 않은 라디오를 주신 형님을 찾아 갓

습니다.

“형님 돈 좀 꿔 주십시오.”

“얼마나?”

“300딜러요”

“ 뭐 이놈아 너 이때까지 번 돈이 얼마냐?

1000원이라며 미친놈 “

“핫 핫 허 허 ”

한참 웃으신 형님은 저를 청진시에서 유명한 낙타 봉 식당으로 데리고 가시여 냉면을 사주

이었습니다.

신흥 각 갈매기 각 냉면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맛있게 먹었습니다.

매점에서 세븐 담배 한 갑 맥주 2명 위스키 1명 사가지고 저에게 주시면서 청년 공원에서

기다리라고 하시고 어딘가 가시 이었습니다.

1시간 후에 북한에서 보지 못한 신사 한분 모시고 왔습니다.

“형님 이놈이 오늘 200달러 한 끼에 다 먹었소.”

훗날 알게 되였지만 낙타봉 식당 냉면 한 그릇에 2원10전 바꿈돈 달러 환률 1:2 일반 사람들이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스키 이름도 가격도 모르지만 그날 한 끼에 200달러를 쓴 것도 훗날 낳았습니다.

200달러면 북한 돈 4200원 정도 1988년 기준 으로 이런 것입니다.

한국 노동자 약 6백 달러 미국 노동자 월 3000달러라는 것 등 3일간 형들에게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형들의 말씀이 너의 10년 가치는 50달러야 그런데 60년 가치를 빌러달라고 하면서 저를

놀려 됐습니다.

다음날 아무 말씀 없이 300달러를 주는 것입니다.

제가 돈을 빌려 왔을 때 우리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또 “주님 감사 합니다.”

고 기도를 하시 이었습니다.

이론으로 배운 정치 경제학과 현실 은 너무 달랐습니다.

1000달러를 빌려도 다 망하였습니다.

이때 청진에서 전철우 씨가 배를 타고 한국으로 망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단속이 강화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저보고 청진 인곡에 누군가 잠수복 10벌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3000달러도 넘는 것인데 1000달러를 판다고 하니 공기 인지 진짜 인지 알아 오라

만약 진품이면 너 빛 탕감 하고 배로 줄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친척이 인곡에 있어 저는 10일 만에 진품인 것을 알고 형에게 알리고 그것을 구입하고 황해도 옹진군 수산 업소에 가져다주고 막대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저는 3년 만에 북한 노동자가 400년을 먹지도 않고 모아야 하는 거금을 가지게 되었습니

다.

우리 어머님만 이 사실을 알고 “아들아 옷도 평범하게 행동도 옛날처럼 하라”

고 잔소리를 하였습니다.

거만해진 저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외제 담배와 일본 옷 한국 신발을 신고 거들 먹

거렸습니다.

주변에는 사람들의 항상 매일 같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 고향에는 소리 없이 장사 하는 사람들의 있었지만 저는 너무 요란하게 소문을

내면서 살았습니다.

저의 형제 들 집에 가면 장사군 삼촌 이라 하는 동네 아낙들의 말도 좋게 들렸습니다.

어머님 의 말씀을 거역한 아들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송평 구역 안전부에서 가택 수색을 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매일 술 먹고 북한 정권을 저주 하고 북한 경찰을 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어머님이 이런 사실을 아시고 저의 집으로 오시 이었습니다.

저의 친구들을 다보내고 저에게 손을 대시고 기도를 하여 주시 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6년을 들어온 거라 기분의 좋아 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주는 것도 주님이요 거두는 것도 주님이다. “

“네”

“그리고 용서해라”

용서라는 말씀에 화가 났습니다.

“뭐요 용서 흥 난 그놈의 경찰 죽일 거요

죽인다고 요“

그리고 어머님을 집에서 내 쫒아냈습니다.

어머님은 추운 겨울 저의 집 앞에서 2시간 기도를 하고 가시는 모습을 옆집 사람이 알려

주얻습니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간절한 말씀을 거역하고 경찰을 죽이려고 자전거를 타고 경찰의 집으로 가

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저는 사회보장 환자 권리를 박탈 당하고 함경도 은덕군 고건원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물감 공장 굴뚝에서 경찰을 기다리다가 삽으로 목을 치고 쓰러진 것을 다시 쳤습니다.

그놈의 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면서 푸푸 퍽 꾸르륵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저는 차를

타고 멀리 제가 일하는 현장으로 왔습니다.

하도 주민들의 돈과 재물을 많이 빼앗고 죄를 많이 지어 누가 죽였는지 경찰도 지금까지 범

인을 못 잡았습니다.

통일 후 가족 분들에게 정식 사과 할 것입니다.

아니면 감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저를 사랑하시여 북한 경찰의 눈을 멀게 하여 주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주님용서 하여 주십시오

하느님에게 용서 하여 달라고 기도 올린 것 주님만 아시는 일입니다.

“주님 주님만 아시는 일을 오늘 공개합니다.

주님에게 이런 엉터리기도 올린 것도 주님께서 만 아십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용서 하신 주님 저는 왜 용서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왜 저에게 벌을 주십니까? “

저는 주님에게 버릇없이 한국생활 10년을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런 저를 주님용서 하여 주십시오.

살인자 000을 용서 하여 주십시오.

경찰을 죽인 후부터 저는 악몽에 시달리고 장사를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몸은 허약하고 돈은 없고 시간이 가는 대로 살던 어느 날 이 엇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이 여자를 소개 하여 주는 것입니다.

26살 꽃나이 어린 아가씨 얻습니다.

친구 집을 빌려 우리는 행복 하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 하고 땔감도 부족하고 그래도 행복하였습니다.

더는 아내를 불행하게 살게 할 수 없어서 아내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 친구 집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장사를 하고 오직 탐욕으로 살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친구 집에 가서 돈을 좀 구해 오려고 떠난 여행이 나의 생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간리 평성에서 굶어 죽는 사람을 보았고 평양지하철에도 거지들의 득실거리는 것을 보고 저는 비참한 북한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주체사상 탑 앞에서 저는 결심 하였습니다.

꼭 여기에 김정일을 교수형 하리라...“

친구 집에 도착하자 친구는 정말 반가 워 하면서도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친구 집에는 아내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파라티브스 라는 전염병에 들어 운신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는 염소를 잡고 술도 대접하여 주었고 북한 현실에 대하여 몇 일간 토론을 하였고 친구가 저의 말을 듣고 이런 조언을 주었습니다.

“내가 평성을 가다가 기차가 멎어서 걸어가는 데 철길위에 황소 한 마리가 머리를 숙이고 뒤발 질을 하며 마주 오는 기차를 노려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어.”

... 기차와 싸우려는 것 이 분명 하였지 결과는 소가 피를 토하면서 십여 메타 밖에 떨어져 나가는 거야 ,,,

,,,이때 나는 결심 했어 북한을 맞서는 것은 황소와 같은 거라고 다시는 북한을 반대하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을 거야.

미친 짓이다.,,

정말 실망 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유일 하게 저와 북한을 반대 하고 싶어 하고 정의감이 강한 동지 얻는데 또 북한 함경북도 부령군 석막 리 초달에 있는 군수품 창고도 습격한 동지 . . .*1991년 8월경 동지4명과 군수품 창고 습격하였음 지금도 북한에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으며 이글이 밝혀지면 친구들의 위험 하여 구체 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친구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1997년 8월 저는 친구 집에서 전염병인 파라티브스 에 전염되여 높은 고열 때문에 정신을 읽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아내도 15일간 전염병으로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아내와 어머님 께서 저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 자 저의 머리 가 빠지더니 털도 다 빠지고 성기와 목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어머님과 아내는 저를 열심히 간호하여 고열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어느 날 아내가 나무 하려 산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 온 아내는 얼굴에 땀과 때 국물을 흘리면서 저를 위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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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사진 ip1 2014-09-06 19:42:18
    당신은 살인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만약 살인자라면 김구 안중근 윤봉길 모두 살인자입니다 자금의 북한은 일제통치를 능가힙니다 즉 당신은 애국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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