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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인간 그리고 문학
Korea, Republic of 이지명 1 385 2015-01-01 11: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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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인간 그리고 문학

 

나는 북에서 태어나 52년을 살았다. 그렇게 살아온 땅을 떠난 지도 어언 10, 사람이라면 살다 온 그곳에 대한 미련과 향수로 가슴 적실만도 하다. 하나 나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있다면 혐오와 분노, 절망감뿐이다. 가난했어도 그 곳엔 두고 온 혈육도 있고 52년간의 아린 추억도 있다. 그런데 왜? 어찌 보면 나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영혼 없는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동강난 우리의 조국이 비로소 하나가 될 때 그때라야 내 정체성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될지, 지금으로선 막연하다.

 

딸과의 통화

 

작년 10월 어느 날 나는 오랜만에 북에 있는 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연줄을 넣어 철산반도(평안북도)에 출가해 사는 딸을 북 중 국경에 불러냈다. 그때까지 아무리 연줄을 넣어도 응대도 하지 않던 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통화에 응했다. 삼엄한 경계속의 국경이고 수시로 교차하는 전파 탐지기의 감시 그물망 안에서의 긴 통화는 딸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될수록 필요한 말만 그것도 통화 2분을 초과하면 안 되는 초긴장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 눈물부터 흘리는 나를 향해 던진 딸의 말에 나는 그 순간 숨이 컥, 멎는 듯 했다.

왜 자꾸 절 불러내는 거야요. 내겐 아버지가 없습니다. 다시는 절 찾지 말아요.”

애야

딸이 전화를 끊을 것 같아 나는 황망히 소리쳤다. 다행히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대도 9년 만에 만난 애비한테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난 널 그리 무정한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는데,”

그래요. 아버진 늘 말씀하셨죠.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사람은 항상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흐리지 말아야 한다고요. 아버진 그렇게 작품도 썼고, 그런데 뭡니까? 아버지가 먼저 나라를 배반해요? 그렇게 떠나면 이곳에 남은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녕 몰랐단 말인가요? 끊어요. 말하기도 싫군요.”

전화는 끊어졌다. 폰에 찍힌 번호를 눌러도 이미 전원까지 끊긴 상태였다. 그때처럼 절망에 몸부림친 때는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딸이 아버지를 거부한다. 내겐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금지옥지 키운 내 삶의 전부이기도 했던 딸이 9년 만의 통화에서 절교 선언을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내 모습은 아마 세상 가장 비참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바람 부는 한강변을 오래도록 걸었다.

돌아보면 볼수록 부끄러운 나의 과거가 늠실거리는 강물 위로 흘러간다. 오로지 하나밖에 몰랐던 세상, 개인의 존재란 소유주 자체가 부정해야만 했던 그곳의 삶이었다.

그러한 삶이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비참한 삶이었던가를 나는 나라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 하나만의 인생을 그리 살았다면 후회는 아마 배로 줄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위에서 준 과업대로 나름 열심히 작품을 썼다. 수령의 위대성 현명성을 내 가슴에 끓는 충심으로 만들어 낼 당시만 해도 나는 지금의 가슴 치는 후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주체시대에 사는 사람의 삶이란 오로지 당과 수령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는 섭리로 시작된 나의 창작 생활은 나뿐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결정적 도구였을 뿐이었다. 독자들에게 나라를 위해 당을 위해 수령을 위해 일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쳐 살아야 함을 형상적 글로 설교하던 한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을 쥐어뿌리고 (반역)의 길을 택한다.

독자들을 수령의 전사로 영생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던 사람의 탈출, 그거야말로 독자를 우롱한 행위였다. 딸도 나의 독자였다. 그러고 보면 딸의 절교선언을 가슴아파할 권리도 사실상 내게는 없었다.

 

북의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무릇 반역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통할 수 없는 역적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그건 아마 역사의 철리일 것이다. 하지만 딸의 말처럼 나는 지금 (반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반역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어머니란 말보다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란 말을 더 먼저 배운 아이, 크면서

꼭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 아이는 중학생에 어울리지 않게 선인들이 쓴 소설책에만 관심을 보였다. 국내는 물론 당시 범람했던 러시아, 중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 문호들의 쓴 글을 밤새워 읽으며 크면 꼭 이런 좋은 작품을 쓰리라 다짐했다. 학교에서 있은 수학과 물리경연 같은 데서는 늘 꼴찌를 차지했지만 글짓기에서는 단연 첫 자리를 차지했던 소년의 소원은 군에 입대한 다음해에 이루어 졌다.

열아홉 살에 쓴 첫 단막극이 인민군문예에 대서특필로 실리고 군 군무자축전 출연작품으로 선정되었을 때 며칠 동안 잠 못 이루며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던 그때가 지금도 아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어 평양의 큰 극장에서 공연된 그 작품은 대회최고 수상등급인 특등 상을 받는다.

이후 인재라는 호평을 받고 과분하게도 평양영화대학 창작학부로 급 소환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나는 보따리를 지고 소속 군부대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작품엔 손색이 없었고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천성적 재능을 가졌다고 인정하면서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는 한 가지 이유로 대학에서 축출된 것이었다.

당시 평양영화연극대학은 아무나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아니었다. 철저한 인재 양성기지로 출신을 엄격히 따지던 곳이었다. 출신이 나쁜 사람이 비록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당의 요구를 심오하게 담은 작품을 시종일관 창작할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의 아버지는 왜정 때 선친으로부터 넘겨받은 땅 3정보(1정보는 삼천 평)가 있었다.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하면서 5정보를 가진 사람은 지주로 규정하고 청산했고 3정보면 부농으로 취급 받았다. 북한정부가 규정한 성분에서 부농은 완전한 제한대상이다. 제한 대상이란 당장 청산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자그마한 트집거리라도 잡으면 이유 없이 청산해 버리는 위험천만한 신분이다. 일절 진급이나 출세는 접어야 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그런 성분을 가진 내가 일류급 대학에서 버젓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정확한 출신성분을 몰랐던 나는 그만 아연실색했다.

평상시에는 거론되지 않다가도 내 경우와 같이 무언가 이루어질 때면 세밀한 신원조사가 실시된다. 사돈에 팔촌까지 따지는 신원조사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성분이 아니었다. 결국은 혹 떼려다 혹을 붙이고 돌아온 셈이었다.

땅을 치며 저주해야 마땅할 일이었지만 나는 그때 현실이 아닌 아버지를 원망했다. 사회에 대한 실망을 가질 대신 어떻게 하나 그 사회가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나름 굳게 결심했다. 9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나온 나는 내 희망과는 다른 지질대학에 다니면서 한편으로 청진사대 어문학부 과정을 야간으로 독학했다.

문학이란 알면 알수록 그 심도가 무한대로 깊다는 것도 그 과정에 알게 됐고 그럼에도 무한대의 내심까지 과연 내가 들어갈 수 있겠냐는 걱정은 뒤로 미뤘다. 그냥 글쓰기가 좋았고 하고 싶었을 뿐이다.

탄광기사로 일하면서 고심 끝에 써낸 여러 작품 중 대표적 작품이 바로 (충신)이라는 단막극이었다.

역시 군 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성인이 된 딸을 둔 아버지가 군부대에서 별을 단 군관이 아닌 하사관으로 평생을 복무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부하로 있던 대원이 어느 날 상좌계급장을 달고 부대여단장으로 부임한다. 기계화 보병여단에서 많은 장갑차를 위시한 기계설비들에 능통했던 아버지는 몇 차례에 걸친 제대명령서를 받았으나 사랑하는 (자식)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에겐 일단 유사시에 적진을 향해 돌진할 많은 기계수단들이 귀한 자식처럼 보였던 것이다. 승진할 기회도 있었으나 모두 미루고 특무상사라는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수십 년간을 설비와 장비를 돌보는 데만 몰두한다. 누가 그리 하라고 강요한 것도 없고 시킨 일도 없었다. 조국통일의 성전에 한 몫 할 부대전투기자재들을 아끼는 그의 마음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어느 날 딸은 이런 말을 한다.

난 아버지가 부끄러워요. 한때 아버지부하로 있던 여단장아저씨만 봐도 아버지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알겠어요. 왜 그러고 있죠? 남들처럼 승진은 못해도 그 특무상사 군복은 벗을 수 있잖아요.”

딸에겐 늘 기름 묻은 작업복을 걸치고 기름투성이가 돼 그저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능력 없어 승진도 못하는 줄로만 안다. 나이 오십이 넘었어도 아들 같은 젊은 군관(장교)들에게 먼저 거수경례를 해야 하는 아버지모습이 딸에게는 얼굴에 모닥불을 들씌운 것처럼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저 웃기만 할뿐, 마음속 진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딸이 야속했으나 아버지는 그길로 부대에 나와 장비들을 돌보며 마음속 아픔을 달랜다. 일터에서도 그를 이해 못하고 손가락질 하며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누구도 맡은 일에 모든 걸 바쳐 당에 만족을 드리겠다는 그의 충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못난 사람, 고지식해 승진도 못하는 사람, 그저 그렇게 살다 세상을 등질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낳은 딸도 이해 못하는 것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가슴에 고이 간직한 그의 충심이 어느 날 부대를 방문한 최고 사령관인 김일성에 의해 드디어 인정받는다.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숨은 애국자라는 높은 평가와 이러한 충신들에 의해 우리인민군은 백전백승의 군대로 거듭날 것이라는 과분한 치하를 받는다. 이어 가슴에 노력영웅 훈장까지 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에 흐느끼는 딸을 안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과 수령에게 바치는 충심의 표징은 겉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 속 진심에 있는 것이니라.” 그 말은 받은 명예나 직위 자체가 충신이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진심으로 당을 받들려는 충신의 진정에 관한 정리이기도 했다.

또한 진심으로 당을 받들고 일하노라면 언제인가는 꼭 당에 의해 그 보상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을 대변하는 수령의 햇빛은 항상 우리의 마음속을 비치기에 전사는 늘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일편단심 당을 위해 진심을 바쳐야 한다는 삶의 논리를 이야기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 작품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내가 조선작가동맹 작가로 공식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도저히 내 작은 가슴으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그 뒤에 있었다. (충신)은 곧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면서 지정 영화로까지 발돋움 했다. 지정 영화란 위의 지시로 학생이든 근로자든 간부든 전민이 무조건 관람하고 감상문을 써 직장별 조직별로 충성모임까지 해야 하는 일종의 대 선전사업이었다. 그렇게 되면 창작자는 작가라면 너도나도 받고 싶어 하는 명예칭호까지 하사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영화화면 어느 곳에서도 내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는 대 성황리에 상영되었어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단순 단막극 (충신)의 창작자였을 뿐 작품을 영화로 만들든 연극으로 만들든 그건 만든 영화창작사의 점유물일 뿐이었다.

허전하고 무엇에 속은 것 같은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그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내 저작권을 가지고 위에 대고 어떤 제의라도 했다면 나는 영락없이 개인을 내세우려 하는 나쁜 사상의 원본자로 심판대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당원이라면 본인이 해 놓은 일이 누구의 명의로 나가던 노동당과 수령께 만족을 드렸다면 그것으로 웃음 짓는 사람이어야 했다. 진정으로 당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영원한 동행자로 될 수 있는 자격은 바로 개인을 버리는 것이었다. 누구의 이름으로 나가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으로 모대기긴 했지만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그 사회의 물속에서 자란 사람이었기에 그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 충신의 높은 정신세계를 강조한 작가가 자신에게 닥친 그러한 일에 좌절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또 당에서 시키는 대로 창작을 해야만 이름도 알리고 명성도 쌓을 수 있는 만큼 체제의 어용작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후에도 작품을 통해 정권이 요구하는 많은 주인공들을 만들었다. 내가 내게 만든 삶이란 것은 철저히 만들어 준 삶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삶이 아닌 삶이었음을 이제 와서 숨기지 않는다.

주견을 잃고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없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자유세계에 와서야 깨달았다. 내 하고 싶은 말, 내 쓰고 싶을 글, 제한 없이 표현하고 제어 없이 마음껏 글을 쓸 수 세상, 이런 세상이 있음도 모르고 산 세월이 참으로 한스럽다. 그것도 52년이란 긴 세월이기에,,,

돌이켜 보면 내가 내세운 참다운 충신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던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북에서의 나의 창작은 어디까지나 수령우상화의 전형을 내세워 많은 군중을 교양하라는 당의 문예방침에 따른 선전물에 불과한 것일 뿐 작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음을 나는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됐다.

 

2의 인생

 

나는 남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산다. 나의 주견대로 마음껏 쓴 소설도 발표했다. 아마도 그것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그린 재탄생의 고고성일 것이다.

200812, 자유대한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는 내가 저주스런 북한에서 시작된 어용작가 삶을 끝낸 내 인생의 전환기였을 것이다.

내가 쓴 이 소설은 그 누구의 간섭이 없이 내 주견대로 써 세상에 최초로 발표한 소설이기도 하다. 평은 과분했다. 발표된 즉시 KBS 한민족 방송드라마로 각색되어 전국에 방송될 때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원작 이지명, 각색 박길숙 하고 시작 처음 내 이름이 소개될 때 울컥, 치미는 격정으로 나는 오랫동안 눈시울을 적셨다. 북에서 받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단 한순간에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정권의 하수인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면서도 겉으로는 수령만세를 외쳐야 하는 수족의 삶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는 일이 이렇게 내 인생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동리목월문학지 2014년 봄 호에 실린 첫 단편소설 (복귀)를 나는 잃어버린 50여 년의 내 반생을 되찾는 기분으로 썼다.

더 이상 정권에 아부하고 굴종하는 주인공이 아닌 그 정권에 반기를 들고 죽음으로 가족을 살려내는 주인공을 통해 나는 파쇼적이고 독재적인 북한 정권을 허물기 위해 일떠서는 북 주민들의 정신적 일면을 강조하려 했다.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고 본다. 수수천년 이 땅에 태를 묻고 부강한 조국을 후대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민족의 거족적 삶을 한 줌도 못되는 몇몇 독재자들에 의해 제약됨은 누가 봐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남쪽에 와서 작가란 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을 비로소 찾게 되었다.

설사 딸에게서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내가 단행한 탈출의 행위를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탈북을 오염된 나를 버리고 본래의 나를 찾는 것으로 본다. 내 작가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그려졌다.

아직도 독재정권의 늘인 선전과 오도된 진실 아닌 진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고향, 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참혹한 현실과 그것을 만든 정권의 전횡을 작품을 통해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북에서 온 작가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것만이 독재정권을 위해 글을 썼던 오염의 함정에서 깨끗이 탈피하는 길이기에,,,

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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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지명 ip1 2015-01-01 11:47:54
    잘못다쳐 삭제되어 다시 올림니다. 죄송합니다. 새해를 맞아 두고 온 혈육이 그리워 올렸을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동지회 회원 여러분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2015년엔 모두 행복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이 성공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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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ip2 2015-01-01 11:53:48
    삭제하셨군요. 이해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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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ip3 2015-01-01 21:15:13
    자유의 새해에도 좋은 작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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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복 ip3 2015-01-02 08:14:02
    딸이 참 똑똑해요.
    전화 도청은 필수라는 것을 알고 ...
    이런 딸에게 시집가는 남자는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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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네임이나끝에 ip4 2015-01-02 09:21:44
    림일 작가님처럼
    이지명 작가라고 표기하면 눈에 확 들어 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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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칭작가 ip5 2015-01-02 10:38:19
    자칭작가와 너무나 대조적인데요. 아니 자칭작가는 감히 이분이 않았던 자리도 가지 못할분이지요. 자칭작가 자칭작가 흐흐흐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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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화 ip6 2015-01-02 12:32:06
    좋은 글 많이 게재해 주십시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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