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기획] 드라마 같은 한국 산업의 克日史
1994년 반도체서 시작된' 對日 승전보'… 디스플레이·스마트폰으로 속속 확산
'新日鐵 제자' 취급당하던 포스코도 도요타에 납품하며 40년만에 日 넘어
"정밀기계 등 아직 뒤처진 분야 많아"
1994년 9월 각 일간지에 '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라는 전면광고〈사진〉가 실렸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256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삼성전자가 게재한 광고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지면 절반을 차지하는 구한말 태극기 사진이었다.
공교롭게도 삼성전자가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공식 발표한 날(8월 30일)은 경술국치일(8월 29일) 다음 날이었다. 태극기 광고는 세계 메모리 시장 1~3위를 독식해온 일본을 기술로 눌렀다는 극일(克日) 선언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하도급국가서 대등한 경쟁자로
광복 이후 70년은 한국 사회 전 분야에서 진행된 '극일의 역사'였다.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한국인의 대일 정서는 항일(抗日)에서 극일로 변천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부국(富國) 일본을 이기기 위해 그들이 성공한 발전 모델을 맹렬하게 뒤쫓아가는 식으로 승화됐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분석했다. 일본 경제에 대한 도전 의식과 추월 열망은 한국 경제 및 기업들에 더없이 큰 발전 원동력이었다.
그 역사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역시 메모리 반도체다. 본지가 국내 대표적인 일본 및 산업·기술 전문가 11명에게 설문한 결과에서도 메모리 반도체는 총 9표를 받아 광복 이후 70년에 걸친 한·일 기술 경쟁사에서 단연 최고의 극일 사례로 꼽혔다.
한국 기업들은 광복 이후 70년간 일본에 대한 도전 의식과 추월 열망을 원동력 삼아 발전해왔다. 사진 위부터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맨 오른쪽) 삼성그룹 창업자와 이건희(오른쪽에서 둘째) 회장, 1976년 현대중공업에서 해외 선주들을 안내하고 있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973년 포항제철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순간 만세를 부르는 고 박태준(가운데) 포스코 명예회장과 임직원들, 2011년 LG화학과 함께 2차전지 설비 국산화를 이뤄낸 경기도 화성의 협력사를 방문한 구본무(가운데) LG 회장. /삼성전자·현대중공업·포스코·LG 제공
'산업의 쌀' 반도체에서 시작된 극일의 기운은 2000년대 IT(정보기술) 산업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로 절정을 맞았고, TV·디스플레이와 휴대폰 등 IT산업 전반에서 대(對)일본 역전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개발하고 세계 시장의 거의 100%를 장악했던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 정상에 오른 LG디스플레이, TV의 대명사였던 소니를 제치고 글로벌 1등에 오른 삼성전자의 성취도 가슴 벅찬 이야기다. 허영호 전 LG이노텍 사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을 앞서는 시기가 올지 회의했던 기억들이 생생한데 이제 그 꿈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최문기 전 미래부장관은 "일본을 넘어 글로벌 넘버원이 된 반도체 기술이 디스플레이 산업 경쟁력의 바탕이 됐고 그것이 다시 스마트폰 등 다른 ICT(정보통신기술) 산업 전반에 경쟁력 상승이라는 선순환을 불렀다"고 말했다.
◇광복 70년은 기술 克日의 역사
포항 영일만과 울산 미포만에서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현대중공업이 이뤄낸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생산성 면에서 신일본제철을 누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가 된 포스코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1968년 5월 포항 영일만 바닷가에 연건평 198㎡(60평)짜리 2층 가건물이 들어섰다. '롬멜 하우스'라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다. 2차 세계대전 때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독일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처럼 황량한 처지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창립 요원 34명 가운데 제철소란 시설을 구경이라도 해본 이는 박태준을 포함해 단 2명. 현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조차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혼잣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09년 1월. 아사히신문은 '신일본제철의 제자'로 취급받던 포스코가 드디어 그 꼬리표를 뗐음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포스코 강판을 외면하던 도요타 본사, 그것도 일본 내수용 자동차에 포스코의 자동차용 강판이 납품되기 시작한 것이다. 포스코가 자동차 강판을 생산한 지 27년 만의 일이었다. 도요타는 자체 실험 결과 포스코 강판이 신일본제철 등 일본 국내산 제품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한데도 품질상 차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2년 3월 현대중공업이 울산 조선소 기공식을 열었을 때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이 채 1%도 안 되는 조선 약소국이었다. 1960년대에 글로벌 조선 시장의 절반을 차지한 일본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세계 제일 조선소였던 미쓰비시중공업은 "한국이 대형 선박을 건조한다는 건 무모하다"고 했다. 그런 미쓰비시를 현대중공업이 추월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1년. 1983년 일본의 경제 전문지 '다이아몬드'는 현대중공업의 세계 1위 등극 소식을 전했다.
이어 현대자동차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현대차는 1990년대 말부터 10년간 매달 모든 공장장과 부품협력업체 대표가 참여하는 총수 주재의 품질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가 100번 가까이 이어지면서 현대차는 이제 일본 자동차 메이커 그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는 글로벌 메이커가 됐다. 이 밖에 삼성SDI와 LG화학이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리튬이온전지,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이동통신 기술 등도 전문가들이 꼽은 대표적 극일 사례였다.
그러나 산업 전체로 보면 우리가 일본을 추월한 분야보다는 여전히 따라잡아야 할 분야가 더 많다. 이우광 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디스플레이용 편광판과 기능성 필름 등 소재·부품과 리튬이온전지 음극재 등 기능성 화학소재, 정밀 공작기계와 산업용 로봇 분야 등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호흡이 긴 투자가 필요한 기반 기술 분야들이다. 권혁기 숙명여대 교수(일본학)는 "이제는 시야를 넓혀 다양한 선진 기업과의 협력과 상생의 기회를 증대하면서 한국식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극일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