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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이 현 대통령이랑 다른 이유
Korea, Republic of 위선주의척결 0 560 2017-02-20 21:14:42

[물밑 한국사-25] 우리나라 역사에는 3명의 여왕이 있다. 신라에만 있었는데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역사의 의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신라 왕실의 신성화 과정에서 성골이 발생하고 그 신분에 집착한 결과로 보고 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성골 신분으로 왕좌에 올랐지만 진성여왕은 성골이 사라진 뒤에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를 시점에서는 여성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예언을 받고는 억지로 아들을 낳는 주술을 행했다. 주술로 성별이 바뀌는 일이야 어차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혜공왕이 어린 시절 여성스러운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한 실망으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즉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헌안왕은 이런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내게는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 옛일에 선덕과 진덕의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아서 본받을 일이 아니다. 사위 응렴은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도록 하라."

 이 사위 응렴이 경문왕이다. 진성여왕의 아버지이다. 그 자신은 사위로서 왕의 친딸을 제치고 왕좌에 올랐는데, 그의 딸이 왕위를 잇는 아이러니를 보이게 된 것이다. 왕의 사위가 왕위를 잇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나라를 구하고 공주와 결혼하여 왕국을 물려받는 동화는 흔하디 흔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여왕에게는 남편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쉬운데 그렇지 않다. 선덕여왕에게도 남편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飮) 갈문왕이라고 나온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또 창녕 조씨의 족보에는 조상이 선덕여왕이라고 나온다. 조씨의 시조 조계룡이 바로 음 갈문왕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심지어 선덕여왕에게는 아들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성이 왕이 되는 것은 여성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신라는 혜공왕 때부터 나라가 기울어져 혼란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점에 나라의 최고 지도자에 여성이 올라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미 부정적인 인식이 퍼져 있는 상태에서 다른 왕족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한 지지도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대는 곧 배신당하고 말았다.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른 뒤에 비선 정치를 펼쳤다.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 남편 위홍을 파트너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임금이 평소에 각간 위홍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 즉 진성여왕의 삼촌이었다. 경문왕 때에는 조용히 있었으나 조카가 헌강왕이 되자 상대등의 자리에 올랐다. 상대등은 신라의 귀족을 대표하는 자리이다. 차기 왕권을 노리는 강력한 자리이기도 했다. 경문왕을 비롯해서 두 아들인 헌강왕, 정강왕이 모두 요절이라 할 만한 젊은 나이에 숨졌는데 위홍은 굳건했다. 이런 강력한 경쟁자를 제치고 진성여왕이 왕권을 꿰찬 셈이기도 하다. 

 위홍이 실권을 장악하고 한 일은 향가를 모은 <삼대목>이라는 책의 편찬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문화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기울어져가는 나라에 바쁜 일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나 그의 업적으로는 오직 이것만이 전해진다. 그는 진성여왕 즉위 2년 만에 아직 한창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어버렸다. 진성여왕은 위홍에게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는 왕호를 내렸다. 

 진성여왕은 위홍이 죽은 뒤에 미소년 두세 명을 데려와 음란하게 지내며 이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랏일을 하게 했다. 당연히 나라꼴이 개판이 되었다. 아첨과 뇌물이 횡행하고 상벌과 기강은 무너졌다. 신망과 굳건한 왕권으로 자리에 올랐으나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국이 이 모양이면 규탄의 성명이 나오는 법이다. 길거리에 실정을 비판하는 격문이 나붙었다. 누가 저지른 일인지 알아야 하는데 찾아낼 방법이 없자, 범인을 만들기로 한다. 유명한 재야인사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끌려왔다. 대야주의 거인(巨仁)은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삼국사기>에는 그다음 일어난 일이 이렇게 적혀 있다.

-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졌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자연현상으로 적어놓았지만 대규모 촛불시위라도 일어났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뒤숭숭한 시국에 조정에서 징세를 재촉하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소년 끼고 놀아나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그 돈을 내놓으라 하자 백성들이 울컥하고 만 것이다.

 뒤늦게 최치원을 등용해서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진성여왕에게는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지만(<삼국유사>를 보면 양패가 막내아들[季子]이라고 나온다. 유추해보면 아들이 셋 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큰오빠 헌강왕의 숨겨진 아들을 내세워 태자로 삼았다. 적통을 되살려 나라의 위기를 헤쳐나가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잡히지 않았다. 도적떼가 서라벌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왕위에서 하야했다. 그는 물러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군읍이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이 모두 전쟁터이니, 어찌 하늘의 재앙이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 것이랴. 모두 내가 몽매한 탓으로 이 도둑들을 부른 것이니, 죄가 주륙을 받아 마땅하고 이치상 사직해야 한다."

 진성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6개월 후 생을 마쳤다. 기껏해야 30대 초반이었을 나이였다. 비록 나라를 잘못 다스렸으나 최소한 자기 자리에서 물러날 염치는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정치를 잘못한 왕은 많지만 자신의 실정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난 왕은 진성여왕뿐이다.

[이문영 소설가]


사실 동의하진 않으나 중요한건 신라흉노론이니 뭐 신라의 무능으로 호족들이 각지에 날뛰었다니 하는데 적어도 저 사람은 잘못을 늬우치고 인정했지 결국 고려나 신라사이에 호족들이 더 쓰레기였네 신라가 무능하다고 하지만 호족들 더러운 짓만큼은 아무것도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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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꺼지소 ip1 2017-02-21 05:31:51
    이 미친개 또 짖어대네.
    위선척결아 역사공부하면 너같은 바보가 될가봐 우리 자식들도 역사공부는 안 시킬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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