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점령한 요서 산둥 제나라에 백제 사람이 많쵸
그걸 이용해 해상왕국을 새운 장보고
중국,일본에서 해상신으로 유명한 장보고지만
한국에서는 신라사관 때문에 엄청나게 저평가
70,80년대 군부정권때는 군바리 천민출신으로 역사책에서
저평가 받았고 지금와서 고평가 받는 인물입니다.
신라놈들 뒤통수치고 신라방으로 장보고 밥상에 숟가락 올린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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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 요서 공략설 (남조 사서를 근거로 삼음)
2. 백제 요서 지배설 (1번에서 진화 - 지배 근거가 되는 자료는 없음. 위치도 모름. 지배 기간은 만들어냄)
3. 백제 요서 지배설 + 백제 산동 지배설 (근거를 찾을 수 없음. 굳이 근거를 대자면 산동 지방이 선진시대 동이족 거주지라는 점)
4. 백제 요서 지배설 + 백제 회수 - 양자강 유역 지배설 (신라말 유학자 최치원이 그 지방을 소란케 했다고 한 말을 근거로 삼음)
http://orumi.egloos.com/3459239
이 글은 1997년 4월 17일에 작성하여 하이텔 한국사동호회에 올라갔던 글입니다.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수준이 10년 전에서 한걸음도 진전하지 못한 증거라고나 할까요?
당시 이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은 이 글에 대해서 제대로된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1+1=2 라는 주장과 같은 글이니 관심이 없는 분은 패쓰하세요. [의견]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1997-04-17 10:25
참 한심한 글입니다만 글에 제목을 붙인다면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글이 두번 만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용석의 어떤 책을 보면 백제가 중국의 서촉지방(즉 삼국시대에 유비가 자리잡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글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1. 본 글과 앞으로의 글에 사용되는 모든 텍스트는 김성구님이 자료실에 올려주신 데이터를 이용합니다. 김성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완성형으로 변화되면서 제 부주의로 누락된 글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土濕水鹹, 不得安居.
백제의 땅을 <천험지리天險地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북으로는 한수가 막아주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막아주고, 남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서로는 큰바다가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륙론자들은 대해大海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라 큰 평야라는 뜻이라고 우겨댔다.) 여기서 大海를 큰 평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조阻(막을 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남이 모두 터진 곳이라면 그곳이 어떻게 <천험지리天險地利>한 곳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비류는 이 <천험지리天險地利>를 버리고 해빈海濱에 가서 살고자 했습니다. 해빈海濱은 바닷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평야의 변두리라고 번역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곳이 바닷가라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토습수함土濕水鹹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은 습하고 물은 짜다라는 뜻입니다. 함鹹이라는 글자는 <소금기 함>입니다. 이로써 백제의 서쪽에는 큰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온조왕 13년의 기록입니다.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 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위 기록은 마한과의 경계를 정한 것인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으로 한계지으며, 서로는 큰바다에 다하며, 동으로는 주양에 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해大海를 큰 평야라고 한다면 끝간데 없는 그것의 어디를 경계로 삼는단 말입니까?
3. 다음은 고이왕 3년의 기록입니다.
三年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여기에는 서해西海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서해西海>라는 지명으로 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본다면 뒤에 나오는 대도大島(=큰섬)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해의 큰 섬에 가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4. 다음은 근구수왕 5년의 기록입니다.
五年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이것은 중국의 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惡風)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5. 다음은 진사왕 2년의 기록입니다.
二年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나라사람중 15세 이상을 뽑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하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 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6. 다음은 전지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기사중 일부입니다.
<전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전지가 머무르며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도海島를 바다의 섬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번역법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때의 섬은 남해의 섬일수도 있고, 서해의 섬일수도 있지만 앞의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서해의 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 다음은 개로왕 18년의 기록입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사신을 중국의 魏나라에 보내서 올린 표에 臣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백제는 중국의 위魏나라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는 한반도 뿐입니다.
8. 다음은 역시 개로왕이 보낸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위 글의 내용은 위나라의 사신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백제로 오다가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즉 위나라에서 백제로 오려면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고, 위나라는 백제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 바다는 지금의 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9. 다음은 개로왕의 사신에게 위나라의 효문제가 답한 내용 중 위의 내용에 관하여 답한 부분입니다.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위 글은 전에 사신을 보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들을 위무하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아 존망을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보낸 말안장 등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백제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부해浮海)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 다음은 위 효문제가 백제에게 준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백제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물海物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극 정성을 인정해서 몇가지 물건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해물海物이 쓰여서 백제가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 다음은 역시 개로왕 18년의 일로 중국의 사신들이 백제에 오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중국의 사신인 소안이 동래東萊(산동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로 갔다가 서해 연안을 따라 우리나라로 오는 항로를 이용합니다.)에서 바다를 건너(浮海) 개로왕에게 오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오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중국도 바다를 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2. 다음은 문주왕 시해 사건을 삼근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김부식이 달아놓은 평입니다.
<唐><憲宗>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又烏足道哉!
당 헌종의 시해범도 3세가 지난 뒤에야 잡아 죽였으니, 바다 모퉁이(海隅)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童蒙)가 어쩔 도리가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되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대학자> 김부식이 백제를 중화에 비유하면 <해우지황벽海隅之荒僻>한 곳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입니다.
13. 다음은 동성왕 5년의 기록입니다.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西海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14. 다음은 동성왕조 말미에 붙어있는 기록으로 중국측에서 바닷길이 험한데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해로숙징海路肅澄, 요로무체要貢無替라는 부분이 바로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역시 백제와 중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다음은 무왕 28년에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무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여기에서 해우하광海隅遐曠, 충도간조風濤艱阻라는 것은 바다 멀리 있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다음은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보낸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
위 내용 중 잔산항해棧山航海라는 것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라는 뜻으로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7. 다음의 의자왕의 어린 시절의 기록 중 일부분입니다.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의자왕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바다 동쪽의(海東) 증자曾子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이 말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8. 다음은 의자왕 11년에 당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이고 영토가 벌려진 것이 개이빨처럼 인접했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묶어서 호칭할만큼 삼국은 아주 인접해 있으며, 또한 바다가 경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과 삼국이 붙어있었다면 애당초 저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지요.
19. 다음은 의자왕 20년의 기록입니다.
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서해西海 해변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어 백성들이 그것을 먹었는데, 다함이 없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땅속에서 물고기가 나와 죽을 리는 없으니, 백제의 서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0. 다음은 당나라 정벌군 소정방의 행로를 그리고 있습니다.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소정방이 성산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濟海) 백제의 서쪽(國西)인 덕물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21. 다음은 백제의 장군인 의직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맞아 싸울 전략을 품하는 내용입니다.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당나라 병사는 멀리(遠) 큰바다(溟海)를 건너 오므로(涉)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베에서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므로 마땅히 육지에 내려서기를 기다려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바다가 나오고 배가 나오는데도 바다 해를 평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22. 그 외에 백제 정복전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文度>濟海卒 統衆浮海 海水爲丹
<문도文度>제해졸濟海卒 은 웅진 도독이 된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는 것이고, 통중부해統衆浮海는 유인궤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손인사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며,해수위단 海水爲丹이라는 것은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하며 전선이 모두 불태워져 바다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가 서해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측 기록은 모두 거짓이라는 시각을 갖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믿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사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논의를 폈습니다.
마포에서
http://orumi.egloos.com/2657391
5. 동백제(한반도), 서백제(산동-회수-양자강) 설 (4번에서 발전. 역시 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 후일 근거로 태왕사신기가 사용될 수 있음. 이건 그저 동로마-서로마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에 불과함)
3. 재야사학 비판 (1)
사실 이 재야(在野)라는 말은 벼슬을 하지 않고 민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굴곡된 한국사에서 지조있는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처럼도 사용되 어 왔습니다. 덕분에 ‘재야’라는 말만 붙으면 훌륭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 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강단에 서고 있는 사학자들을 ‘강단사학자’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재야’라고 부르는 일부 역사연구가들에 의해서 발생했습 니다. 이 사람들의 상당수는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점을 더욱 강점으로 내세우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식민 사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들이 나름대로 광범위한 조사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자신의 전거 이외의 전거는 모두 조 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백 이면 백, 모두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야끼리는 상충되는 의견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으며 거론할 때에도 ‘강단사학자’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예의를 갖추어서 말합니다. 가령 1987년 정신문화연 구원에서 개최했던 “한국상고사의 제문제”라는 토론회에서 임승국은
“한편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지만 상고사는 상고사 전문학자가 써야하고 논증 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제발표 중에는 상고사와는 무연한 학자가 상고사학을 마치 명승지관광여행이나 하는 기분으로 어색한 주제 밑에 모험적인 페이퍼 를 내놓고 있다. 세상이 다 아는 근세전공학자가 고조선의 제문제를 운위한다 는 것은 그 용기가 가상하지만 학문은 결코 만용이 허용될 수 없는 분야이다. (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p 184)”
“이 고대사는 그 A, B, C가...... 고대사학자가 해야 됩니다. 고대사와 관계 없는 사람은 고대사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어요.(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 신문화연구원, 1987, p 231)”
라고 말하며 천관우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사학과 출신이 아닙니 다. 그는 고대 정외과 출신입니다. 물론 그래야 식민사학자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에 대하여 천관우는
“그런데 저도 고대사 관계 논문이라는 것을 처음 발표한 것이 1974년이니까 지금부터 13년이 되었고, 그 뒤에 고대사관계 논문을 하여튼 열 댓편 써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인제 저도 좀 고대사연구자 속에 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 니다. (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p 263)”
라고 응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 연구를 주로 해온 박성수에 대해 서는 임승국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박성수는 여기서 발표는 하지 않고 논평만 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고대사와 관계없는 사람은 고대 사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임승국 자신의논리에 어긋난다는 것은 강조할 필 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임승국의 역사관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자유> 80년 9월호에 “정사광복과 역사인식”이라는 글에서 임승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80년 5월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는 점도 감안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조국의 산하엔 개천이래 최대의 숙정선풍이 일고 있다. 과연 조국 광 복 이후에 쌓이고 쌓인 부조리를 말끔히 청소해 줄 것인가? (중략) 그 숙정의 규모나 대담성에 있어서 지난날의 어떤 숙정보다 ‘매머드’급이었다고 해서 찬양할 수는 있겠으나 (자유 80.9 pp. 79-80)”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의 천적사상이오, 대항무기는 오직 민족주의 민족철학 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공산주의의 면전에서 패배주의적 민족관을 고취 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무장해제를 뜻함이다. 오늘날 이단사학, 반체제사 학, 식민사학의 잔재는 국가안보적인 차원에서 다스려야 한다.(자유 80.9 p 8)
그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기야 <자유> 11월호에는 “이적 해국사필과 국 가안보”라는 글을 써서 전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두환을 자극해 보고자 합니 다.
“지금 정계 ~ 관계에는 환웅천왕 이래 최대의 숙정선풍이 일고 있다. 그야말 로 숙연한 순간이오, 기대했던 후련한 역사의 한토막이 아닐 수 없다.(자유 80.11 p 26)”
“실로 해국사필의 해독은 언필설난의 경지에 있다. 숙정당국은 한국사 1000 년속에 서려온 미해결의 장을 용약처결하는 영단을 내려줄 수는 없는가?(자유 80.11 p 32)”
위에 보다시피 그는 드디어 동료 학자들을 공권력으로 처단해 주기를 요청하 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국사광복은 대통령각하의 의지하나로 결정될 수 있는 민족의 숙원사업 인 것이다. 민족사는 오랫동안 용기있고 과단성있는 민족의 지도자를 감당하 여 왔다. 국사혁명이라는 과업은 애오라지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만이 해결할 수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가장 뛰어난 영단을 지닌 민족지도자를 모신 <새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중략) 이 모 든 가능성이 오직 새시대 지도자의 의지 하나에 달린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이 시공이야말로 억겁의 세월이 집약된 역사의 찰라라고 아니할 수 없다.(자유 81.4 p 74)”
이 글은 그가 역사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가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면 역사의 진리가 입증된다는 무시무시한 논리입니다.
“망국적인 국사학자들은 마땅히 국가안보적인 입장에서도 그 해국이적사필이 응징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중략) 저들은 이 나라의 정신전력을 와해시킴으 로써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부전승을 안겨주려는 해국적 심보가 아닌 다음에 야...(자유 81.4 p 81)”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 아닙니까?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 롭게 한다면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뭐라 변명한다해도 학자가 할 수 있 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바라보는 역사관은 어떤 것일까요? 위 세 글 안에는 그의 역사관 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민족주의를 반공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국가안보(반공)에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국가체제철 학이라고 주장합니다.
“국사는 물론 사회과학의 한분야이다. 그러나 국사가 영향하고 점유하는 국 가 ~ 사회적 그리고 현재 ~ 미래에 걸친 위치나 좌표 ~ 비중은 사회과학분야 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다름아닌 국가체제철학이기 때문이다.( 자유 80.9 p 83)”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국가체제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공산주의와 지금 대결하고 있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은 반공!이니 승 공!이니 하는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오 통념이다. 그런가 하 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무기력 무 방비적인가를 광복 35년의 체험을 통해서 절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 유민주주의의 제원칙에 일부 수정을 가해서라도 보다 중요한 국가안보를 지키 려는 노력을 경주해 왔던 것이다. 제외국이 뭐라고 비판하드라도 우리는 우리 의 실정에 어울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든 것이다. 정치 는 이상이나 꿈이기에 앞서 싸늘한 현실이기 때문에 국가안보를 위한 이러한 자유유보 인권유보는 국민적인 양해사항으로 용인되었든게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굳이 ‘자유민주주의를 향하여 Excuse me, I am sorry를 애걸하면서 까지 자유민주주의에 집착해야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물론 국제정치사 회라는 현실때문에 ‘자유민주......’라는 상호(?)는 떼어내 버릴 수 없겠지 만 지금이야말로 한국정치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걸 때가 아닌가 한다. 혹자 이를 국수주의라고 비방해도 좋다. 도이취나 일본은 국수주의때문에 멸망했 지만 우리나라는 도리어 사대주의로 나라가 망했던 것이다. 우리가 국수주의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 근세 이후 국수주의다운 국수주의 한번도 못해본 한국 사의 치욕은 차라리 국수주의가 숙원 섭리일지도 모른다. 항차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추구하려면 공산주의의 사상적 철학적 천적인 강 력한 민족주의!(그것을 국수주의라 혹평해도 좋다)와 그 토대 위에 뿌리박은 강력한 체제철학의 필요성은 차라리 숙명적이오,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철학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정치철학을 들먹일 필요 도 없이 오늘날 한국정치엔 철학을 필요로 한다.(자유 80.11. pp. 29-30)”
좀 길게 인용했습니다만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국민 적 양해라고 말하는 유신체제는 지금 국민적 합의 사항으로 “악”이었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간판이고 철 학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니요? 여러분은 이런 사고방식 위에서 건전한 역사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면 임승국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또 어떤 것일까요?
그는 위 <자유> 80. 10월호에서 도이취 민족이 제1, 2제국의 위대한 조국을 이어받아 나치즘 아래 1차대전 패배 불과 20년만에 세계를 상대로 전쟁할 수 있는 현대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 기치 아래 아랍은 세계경제를 좌우하게 되는 ‘좋은 전례’를 남겼다고 합니다. (pp. 62-63)
민족주의는 또한 민족주의는 위대한 민족사의 발견광복에 있으며 민족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자국사를 미화하고 외국사를 왜곡하기도 해왔던 것이 세계 민족주의의 추세라는 것입니다.(p 63)
그는 이어 우리 민족사는 역사를 왜곡하지도 않은 채 민족주의를 고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주장합니다.(p 64)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민족주의란 자민족만이 잘살면 된다는 민족주의일 뿐입니다. 그것은 민족주의도 아니고 그저 (그가 폄하해도 좋다는 대로)국수 주의일 뿐입니다.
그는 한국사를 5개의 조국으로 구분합니다. 제1조국은 환인의 나라인 환국, 제2조국은 신시개천의 환웅의 나라, 제3조국 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제4조국은 부여 -> 삼국 -> 고려로 이어지며 제5조국은 5공화국으로 이어집니다. 조선이 없습니다. 그의 조국에는.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선사>를 일인들이 왜곡한 것을 바로잡 으려 하지 않고 그것을 덮어서 없애버리려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올바 로 보는 자세일 수가 없습니다. 일인들이 왜곡한 조선사를 되돌리지 않으려는 자세는 곧 일인들이 해석한 조선사가 옳다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조선은 역사에서 이야기하지 말자, 부끄러운 나라다라는 것이지요. 바로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바라는 바입니다. 고려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것 은 어느 나라입니까?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 나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민중은 어느 시대의 민중입니까? 왜 그 시대를 버려야 합니까? 기껏 일본인이 날조한 역사때문에요?
임승국은 일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선 그는 일본 국어 교과서에서 “후지산”운운하며 시작한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들의 민족주의 정신을 부러워 합니다.(자유, 81.4 p 77-78, 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 문화연구원, 1987, p 239) 또한 이미 그 함정에 대해서 설명한 기마민족설에 대해서도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고 있습니다.(자유, 80.11 p 31)
근본적으로 일왕실은 백제왕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자유, 81. 4 p 77-78)이므로 언젠가 그들이 백제 땅을 다시 찾겠다고 돌아온다면 그는 “어서 오십시요”하고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글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임승국의 글은 일제의 식민사관이 파놓은 함정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만주의 영향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만선사관에서 그는 과연 벗어나 있습니까? 일제가 파놓은 덫에서 빠져나가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가 조선을 버리는 것은 만선사관의 영향이며, 기마민족설 및 백제와 일본 천황가를 연결하는 주장은 일선동조론의영향입니다. 그는 일왕실을 집나간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백제가 왜 집나간 자식이 되겠습니까? 나찌 아래서 프랑스는 괴뢰 비시정권과 망명 드골정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임승국의 논리대로라면 정통은 비시정권에 있는 것입니까? 이런 논리라면 일본이 한반도의 주인이라고 주장해도 반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본말을 전도하고 선후를 뒤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 다. 그 근본을 잘라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주의 영향을 받았다에서 만주는 본래 우리 것이다라는 주장은 반도라는 지형적 환경 아래 놓여있는 우리에게는 더 패배감만 조성하는 무의미한 주장입니다. 반도라는 지리적 조 건이 우리민족에게 장애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 선동조론도 그렇습니다. 조상이 누구건 일본과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주장은 서로가 서로에게 재산권 행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주장일 뿐입니다.
사실 단지 지배층만 가지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가령 지금까지 발해를 지배층만이 고구려 유민인것처럼 주 장한 학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킬 근거로 그것을 활용했습니다. 일종의 정복왕조처럼 본 것입니다. 그 러나 최근 발해의 기층민인 백산말갈 등은 고구려 시절부터 우리 민족으로 취 급받은 족속으로 발해는 명실공히 우리민족 국가라는 학설이 나왔습니다. 이 런 자세가 진정 민족을 생각하는 역사자세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주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학자들의 경우 은근히 여기저기서 비쳐 집니다. 아직 노골적으로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주 없이는 영광도 없 다는 그들의 논리를 쫓아가면 결국 동일한 결과에 부딪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주 없이도 영광스러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입니다. 만주 없이는 영광없다는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자가 파놓은 악 질적인 함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잘보여주는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한배달 창간호(1988 가을) 에 실린 육군대학 교수 도갑현의 “고토회복을 위한 정책적인 배려를...”을 살펴보면
“즉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된 해(AD 926년)가 지금부터 1062년 전이라는 세월 은 이스라엘이 옛 연고권을 주장한 2000년이란 기간과 비교해 볼 때 불과 그 반 밖에 되지 않아 우리 민족이 망각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고토회복의 꿈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선례로 삼아, 신념으로 연고권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p 108)”
라고 되어있는 것입니다.
http://orumi.egloos.com/214014
첫글부터 털리네. ㅋㅋㅋㅋㅋㅋ 아 시발 답이 없다. ㅋㅋㅋㅋㅋ 백제가 점령한 요서 산둥 제나라래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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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중에 진시왕 아버지 그 누구냐 그 유명한 장사꾼
나중에 중국 다 먹잖아
아니지 대륙 최초로 통일 하잖아 중원을 전부다 최초로
그게 최초의 중국이라는 나라의 시작 이잖아 진나라
근데 진시왕
자기 옴마 때문에 열받아서 다 죽여버리잖아
자기 아버지쪽 사람들
지금의 중국하고 뭐 비슷하지 뭐
모택동이 대륙통일하고 콩사탕으로 식량 모자라 헤메다가 등소평이 개방정책으로
다시 물꼬 트고 뭐 다시 살만하니까 시진핑 나오고
뭐 그러는것과 똑같지 뭐
암튼 제나라 백제 맞습네다 찾아보세용 시간 되시면
삼국사기도 대륙의 삼국사기 맞고용
그런걸 일일이 어떻게 다 기억해요
먹고살기도 바쁜데
암튼 맞아요 왜냐하면 네가 옛날에 중국 갔을때 안내하던 중국동포분이 그러드라고
산동사람들 하고 전라도 사람들 하고 특징이 비슷한데 형님은 많이 다른것같다고
그래서 네 그랬지 똑같다고 그건 아저씨가 쓰레기들만 보셔서 그렇다고
쓰레기들은 원래 거의 다 비슷비슷 하다고 그리고 지금은 개방 초창기라 공산주의 사회라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있어 그런 막장인생들 외에는 가기를 꺼려한다고
그때 네가 분명히 들었다니까 똑같다고
안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보자마자 똑같다고 느낄수있겠니 그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인데
제나라 맞아요 그리고 그후 네가 책에서 봤는데 한자 무지 먾은거 일본사람이 번역 한건데
아 생각 안나네 무슨 발해관련 논문 인가 뭔가 그랬는데
암튼 거기에도 나와요 중국쪽하고 일본 하고 고구려 백제 관련해서 막 치고박고 싸웠다고
전쟁 초기에 그래서 광개토왕비 글자 조작하고 뭐 이런면서 그랬다고 그게 무슨 저 뭐시냐
만주 무슨 청나라 무슨 마지막 황제 나오는 그 무슨 나라냐 암튼 있어요
그건 인터넷에도 안나와요 지금은 그런 책도 없고
옛날에 회사 말아먹을때 아 시바 책 물에 다 젖어 엄청 버렸는데
그때 진짜 많았는데 고서도 몇귄있고
암튼 믿어요
좀
맞다니까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려고 지은 것이 아니라 기우제나 제사 용으로 지은겁니다.
1000여년 전의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데 별을 관측하고 싶으면 높은 산에서 하지 들판에서 했겠습니까
잘 알다시피 신라시대보다 훨씬 더 옛날인 2500년 전의 공자 맹자 시절에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다녔잖아요.
이른바 맹모삼천지교.
헐~~~~
이기 오데서 너 이리와봐 너 오늘 죽었어 이기오데서 아구창 아구창 아구창
너오늘 죽었어 에이시 아~놔~~
고마해라 꼬마야 뭐든 지나치면 머리아프단다
정리정돈 잘해놓고
안그래도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아는 이야기가 되였겠지만
지능의 차이인지 환경의 차이인지 그건 잘모르겠지만
어찌되였던 참 특이하구나
하긴 그게 뭐 대수겠냐 알면 또 뭐하고
그냥 밑에 골때리는 재주를 부려놓았길레 확인차 한번 줘박아 본거니까
오해는 하지말고
너무 흥분 한것같아 한마디 했다
열심히 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