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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의 의미와 유래
해리맘 0 591 2006-05-10 09:59:37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일반 백성들은 가난하게 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냥 있었다고 하기 보다는 매우 오랜 시간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신분제라고 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으로 나누어놓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인데, 신분해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95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피지배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피지배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해서 곡식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품을 만들어내지만 대부분을 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자신은 늘 가난하고 피곤하게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세계의 여느 민족과 마찬가지로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가난과 관련된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 입에 풀칠도 못한다. 등의 말들이 모두 가난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을 나타내는 말 중에서 특이한 것은 “보통 이상으로 아주아주 가난한 상태를 가리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그냥 가난하다고 하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했을까요?
이 말에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어려웠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녹아있어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항문이 찢어진다는 것은 변을 정상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을 잘 못 볼 것들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됩니다.

변을 볼 때 항문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지독한 변비에 걸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변비는 요즘 사람들처럼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항문이 찢어질 정도로 변비를 일으키는 주범은 바로 소나무 껍질인데, 이것은 구황식물로 가장 많이 활용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봄이 되면 소나무 껍질을 벗기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을 정도입니다.

소나무의 성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딱딱한 소나무 껍질을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먹는 소나무 껍질은 겉껍질이 아니고 속껍질입니다.
소나무의 겉껍질은 보습과 보온을 위해서 매우 딱딱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겉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약간 누런 색깔을 띠는 속껍질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낫 같은 것으로 벗겨서 먹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이 아니고, 지난해의 양식이 모두 떨어지는 봄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때는 겨울잠을 잔 소나무가 새로운 잎과 열매를 만들기 위해 땅 속의 물을 끌어올리는 때인데, 이때는 속껍질에 물이 매우 많아서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겨울에 심어서 모내기를 하기 전에 베어서 양식으로 하는 보리를 봄보리라고 하는데, 이 봄보리가 나오기 전까지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때를 흔히 일러서 보릿고개라고 하는데, 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식물로 주로 소나무를 썼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봄이 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백성들이 줄을 서서 산으로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기는 바람에 마을에서 가까운 야산은 거의 벌거숭이가 된다.’는 것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전통시대 피지배계층의 백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 껍질 중에 가장 상등품으로 치는 것은 나무의 맨 꼭대기의 길이가 길고 하나 밖에 없는 나무의 중앙에 솟아있는 햇순인데,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누가 일찍, 그리고 빨리 발견하느냐를 경쟁할 정도였습니다.

이 햇순은 길이도 길뿐만 아니라 겉껍질이 얇기 때문에 속껍질을 벗겨내기가 훨씬 쉬운데다가 수분이 매우 많고, 속껍질의 두께도 매우 두꺼워서 가장 알찬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앙에 있는 햇순줄기는 한 나무에 하나뿐이라서 한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오래된 가지로 옮겨가게 되고 낫을 사용하여 두꺼운 겉껍질을 벗겨낸 다음 속껍질을 채집하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움직임이 둔한 노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식구가 여기에 매달려서 껍질을 벗겨내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야산의 소나무는 봄만 되면 몸살을 겪게 되고, 말라 죽는 일이 허다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의 껍질을 거의 모두 벗겨내서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물을 올리지 못하여 나무는 말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지 못하도록 금지했지만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벗겨낸 소나무 겉껍질을 송구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으로 날라져서 어머니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벗겨온 속껍질은 맨 위의 송구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부분은 상당히 질겨서 그대로는 씹기도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벗겨온 껍질을 넘겨받은 어머니는 그것을 솥에 넣고 물을 많이 부은 다음 오랜 시간 동안 끓이게 됩니다.

벗겨온 껍질을 끓이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오래 동안 끓임으로서 껍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을 많이 넣은 죽으로 만들어서 양을 늘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루에 벗길 수 있는 껍질이 많지 않은데다가 소나무 역시 한정되어 있어서 저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식물로 소나무는 그래도 좋은 식품이 되는데, 이것마저 떨어지게 되면 들판의 풀뿌리까지 캐어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소나무껍질은 가난한 상태에서는 상당히 고급품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나무껍질은 먹을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그 후에 문제가 발생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소나무 껍질은 섬유질인 채소나 과일과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껍질은 물이 많을 때는 부드럽지만 수분이 줄어들면 매우 딱딱하게 굳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나무껍질을 아무리 오래 끓여서 죽으로 만들어 먹더라도 그것을 모두 소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변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장을 거치면서 수분을 빼앗긴 소나무껍질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나무 껍질을 먹은 백성들은 자연이 변비에 걸리게 되고, 변을 볼 때 너무 힘을 주어서 항문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해마다 겪었기 때문에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을 말할 때 이런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항문이 찢어질 정도로 힘을 주어야 하고, 항문이 찢어져야 겨우 변을 볼 수 있었던 선조들의 가난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이런 말이 생겼겠는가! 지금의 우리가 겪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 변비가 옛날에는 가난의 대명사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소나무껍질을 먹어야 했고, 그것으로 인해 변비가 걸려서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어렵게 변을 보아야 했으니 이중 삼중의 고통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상황을 변비와 연결시켜 말함으로서 고통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않고 약간 희화화함으로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을 감소시키는 여유를 지닐 수 있게 되는 지혜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지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한 상태를 말할 때 “이가 갈린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송곳 같은 이가 멧돌같이 갈린다”고 함으로서 마음에 여유를 가지게 되고, 분함을 누그러뜨리는 지혜를 이런 표현 속에 담았던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주술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고통으로만 표현하면 그것이 더욱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선조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돌려서 말하는 언어습관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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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비군 2006-05-10 10:30:04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잘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이 이렇듯 선조들이 생활했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네요. 제가 알고 있는 한가지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우리가 보통 '시치미 뗀다' 라고 하는 말은 고려후기에 유행하던 유행어입니다. 당시 원나라에서 비싸게 수입하여 사냥에 사용했던 송골매가 귀족들의 인기스포츠였는데 너무 비싸기 때문에 매의 꼬리부분에 주인임을 증명하는 '시치미'라는 표식을 달아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가 사냥중에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거나 길을 잃어서 다른사람이 매를 주웠을때, 비싼 매를 돌려주지 않고, 대신 '시치미'를 떼어냄으로써 가로채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일컬어 '시치미 뗀다'라는 유행어가 회자되었다고 하네요.

    이런 것들은 지방마다 유래된 지명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 양재(원래 양재역: 조선시대에 말을 바꾸어타는 역)의 또다른 이름인 말죽거리는 병자호란때 피신가던 인조임금이 급한김에 말위에서 팥죽으로 요기를 했던곳이라고 합니다.

    종로의 피막골은 광화문 앞길에 고관대작들이 말을타고 행차를 많이해서 일반백성들은 조금만 가다보면 다시 엎드려 있어야 하는바람에 제대로 길을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옆에 나있는 작은 골목길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말을 피한다는 뜻에서 피마골->피막골이 되었죠.

    또 우리가 잘 아는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때 막강한 권력자인 한명회의 호인데 그의 집이 오늘날 압구정동에 있었고 집안에 지었던 정자 이름이 '압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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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언덕넘어 2006-05-10 23:18:30
    넘 좋은 글을 읽다가 저도 한가지 들은 풍월이 있어 읊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렸을 때 왕십리에서 살았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살구지다리'라는 곳엘 가서 시뻘건 개천물에 수영을 하며 놀았었습니다.
    그 곳에는 깨어진 채로 버티고 서 있는 돌기둥이 몇개 있었고 다리의 상판 쯤으로 생각되는 돌 판이 흐르는 물에 가로질러 누워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그 상태로 있지않았나 생각되는 다리 자리였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훗날 그 근방이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 쯤 되는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군사들은 서로 그 경계를 두고 활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화살들은 그 살구지다리가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떨어졌고 그래서 그
    다리 이름이 '살꽂이다리'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답니다.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본래의 뜻은 잊어버린 채 발음하기 좋은 쪽으로 변하는 현상이 있는가 봅니다.
    우리 꼬맹이 친구들은 그 다리를 원인도 모른채 '살구지다리'로 불르며 정신 없이 놀기에 바빴었지요.
    한양대학교 옆에 있는 그 다리는 얼마전 잘 보수되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어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아! 옛날이여....
    가난은 싫지만 옛날은 항상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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