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여, 만세반석의 틈에 숨으면 起死回生(기사회생)하여 번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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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0:26.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The conies are but a feeble folk, yet make they their houses in the rocks;)]
사반은 바위 오소리라고 한다. 微物(미물)이라도 微弱(미약) 微微(미미)해도 집을 바위틈에 짓는다고 한다. 다 그들에게 각기 나름의 지적인 능력을 주심이다. 만유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 미생물과 식물과 생물의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존이나 등에서는 아직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고 하니, 미확인 생명체의 그 종류의 내용의 끝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화성에도 생명체가 있다고 열열 마니아들 곧 우주생명체를 추적하는 단체들은 간혹 나름의 증거물을 올리고 있고 상상초월환경에도 생명체가 있다고 나사가 발표한 적도 있고.
존재를 만드시고 그 존재에게 어디서든지 생존하는 능력과 지적인 능력을 부여하시면 그 속에서 그 나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이 가능하다면 그럴만한 기술문명이 받쳐준다면 만유에 가득한 별들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 곧 생명체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각 별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그 주어진 여건의 환경 속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될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인간에게 드러난 것만도 무수한데,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별들의 세계에 어떤 존재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존재로 만들어지고 생명을 부여 받아 그 주신 환경에서 그 나름을 영위할까?
그들은 다 그 나름의 목적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목적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고 그 존재로 이어지게 하려면 번식활동을 할 것이다. 우리가 속한 은하계도 다 탐색하지 못하는 기술력을 가진 지구의 의미는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아시는 분의 지적인 능력을 받아 누리지 않는 한 그것들을 독해하는데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알아보는 능력이 없다면 모든 것은 밤처럼 캄캄한 것이다. 밤이 오면 인식 인지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을 선용하는 기준의 의미와 사용의 방법상의 의미와
천적끼리 치열하게 죽이고 죽는 의미들의 내용에서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신 만큼의 그 나름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 열악한 곳에서 그들의 보금자리를 삼는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생명력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다. “빌립보서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항상 이기는 삶을 강조하심이다.
사람은 지구에서 그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다. 그리 우월한 것이라도 그저 한계를 가진다. 그 때문에 전능하신 자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오시는 성령으로부터 받게 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을 가지면 영생한다고 창조주 태초의 말씀이 인간으로 오셔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6: 47.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류가 먹어야 할 양식 영생하는 양식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령으로 누리는 것 곧 먹어야 세상을 마귀를 이기고 영생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죽어도 다시 살게 하시는 떡인데, 창조주가 주시는 이 떡은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다. 누구든지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질의 통제를 받아 행동하게 된다. 그 통제와 본질을 받아 누리는데 이를 생명의 떡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통제력! 그 통제력으로 완전히 통제당해 세상에서 몸소 본을 보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시다.
생명력을 자기 본질에서 나오는 그 나름 지적인 통제력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력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오는 거룩하신 지적인 통제력이시다. 피조물의 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력은 스스로 계신 생명력이시다. 그 분량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만물보다 크시다. 강하시다. 선하시다. 비교할 수 없어서 지극히 크고 강하고 선하다 한다. 그 통제력으로 인간을 다스리신다.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이다.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 본질과 그의 통제를 받는 자만 모든 피조물의 공격을 능히 이기고 스스로의 부패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제력을 얻어 영생을 얻게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계신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오는 통제력이 곧 생명의 양식이다. 그 통제력의 원천이신 태초의 말씀이 인간으로 오셔서 예수님이시고 그의 살과 피가 되신 것이다. 대한민국은 망하느냐 사느냐의 기로라고 소리친다.
망하게 하는 자들이 가득한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그 틈에서 도저히 하는 짓이 이기려고 하는 짓은 아니라고 한다. 생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각 존재의 생명의 다양성에서 우리는 우선 그 종이 그 거처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며 하나님의 주신 종족번식을 많이 해서 번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나름의 생명력 곧 통제력의 본질과 그 차이가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만 영생하시고 그분만 홀로 거하시고 만유보다 크시고 만유의 생명을 다 합해도 그분의 생명력에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는 간격 수정 같은 궁창이 심히 두렵게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태초의 말씀이 인간으로 오신 육신을 가지신 파격적인 은혜를 깨닫는 것도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지적인 한계 속에 갇힘이다. 그것의 합으로 현재의 문명을 이루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의 선용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 문명이 결국 재앙의 시작이고 내용이다.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통제력으로 사용해야 인간에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된다. 자유가 되고 행복이 되고 모든 부요가 되는 것이다. 그 통제력이 태초의 말씀이시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심이다. 그 살과 피를 인간 속에 두시면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로 오시는 성령의 통치를 그 심령 속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그 날부터 하나님의 영생하시는 생명력의 통제력을 누리게 된다.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나님의 생명력만 영생이시다. 피조물의 영생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생은 스스로 계신 이의 영생이시다. 그 생명력으로 영원한 통치의 본질과 내용으로 삼으신다. 그분이 우리 속에 오셔서 통제하심 곧 성령의 통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인간의 통제력으로 낸 의나 선이 아닌 하나님의 통제력으로 내신 의와 선으로 행함이 곧 구원이다.
그 구원은 인간이 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오는 하나님의 통제력의 통치이시다.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나님의 생명력을 누리는 자들만 영생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력이고 그 생명력은 하나님의 통제력이시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생명의 통제력을 받아 누리게 된다. “The conies” 히브리구음으로 shaphan {shaw-fawn} 사반이다. rock badger, coney, the hyrax이다. 이들도 거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생을 위한 거처를 어디에 둘 것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을 누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 거처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만세반석의 틈에 두어야 한다. 그분의 손에 못 자국 옆구리 창 자국 그 발에 못 자국이 있다. 그 속으로 우리의 거처를 삼아야 비로소 영생하는 거처를 얻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할렐루야!
“요한복음 15: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2: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인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만세반석임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육적인 지혜의 한계를 직시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적인 것이다. 영생하게 하시는 통치다.
“요한복음 14: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발 옆구리에 구멍을 내 주시지 않았다면 그 누가 감히 그 틈에 거처를 정할 수 있겠느냐? 이는 인간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거처다. 국가안보의 평강도 그리스도가 주신 거처에서 나온다.
‘are but a feeble’ 히브리구음으로 atsuwm {aw-tsoom} or `atsum {aw-tsoom} 아추움 아우-추움 오-추움이다. mighty, vast, numerous이다. 아주 약한 (효과 의지 등이) 형용사적인 의미 곧 허약한, 미미한의 의미인데 거대한 센 사람이 센 물체가 센 거대한 막대한 굉장한 광대한 명사적인 의미는 광활한 넓이, 다수의 의미와 아주 대비되는 작은 존재를 의미한다. 아추움이란 구음은 우리말에 없다. 소멸되었을까? 작다 미미하다. 미약하다. 이런 의미구음만 남은 것이다. 곡절을 겪은 것이라면 변형이 되어 있을 것인데, 낮춤은 어떤가? 아춤->낮춤
사실 우리 상고조상으로 주목이 되는 욕단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창세기 10: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이름은 히브리 구음으로 Yoqtan {yok-tawn} 요크탄 요크-타운이다. smallness 이다. 아주 작은 키라 이름을 그리 붙였나 보다. littleness, pettiness가 동의어인데 微小(미소) 矮小(왜소) 빈약 옹졸의 의미들이다. 그 때문에 아추움에서 비교대상을 생각하듯이 정상인의 키보다 작은 욕단에게서 큰 것을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때문에 유전 심리가
큰 것 지향이다. 대한민국이라고 할 때 큰 大(대)를 앞에 둔다. 어떤 분은 한을 칸으로 한다면서 몽고어로 칸은 크다. 라는 뜻이기 때문에 크다를 두 번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한민족은 유전 심리적으로 큰 것을 선호한다. 그 때문에 작은 것은 낮춰본다. 아추움은 낮춤의 어원이 되었을까? 벌레 같은 소신이라도 감히 아룁니다. 티끌 같은 존재라도 감히 간언하옵니다. 뭐 그렇게 자신을 낮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생존을 위해 그런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시대마다 높음을 정하고 그 수준에 도달치 못하면 낮춰보는 대하는 낮춤이다.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다 무서운 추위에 낮춰진다. 그 때문에 추움이라는 말이 나온 것일까? 곡절이 아무리 그 아추움을 우리말에서 소멸시키려고 해도 결코 소멸되지 않고 다른 형태라도 살아남은 것일까? 춤도 그러하다. 침을 흘리는 짓은 춤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낮춤의 의미들일까? folk는 히브리구음으로 am{am}암이다. nation, people, 우리말에 앎은 아는 것이고 암은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그렇고 말구에 사용 되는 구음이다. 암 ‘감탄사’ ‘같은 말’ 아무렴(말할 나위 없이 그렇다는 뜻으로, 상대편의 말에 강한 긍정을 보일 때 하는 말). 유의어: 아무렴, 아무러면 보편적인 의미를 강조함이다. 곡절을 겪었을 암이다.
‘yet make’ 히브리구음으로 suwm {soom} or siym {seem} 수움 숨 쉬임 쉼이다. to put, place, set, appoint, make이다. 숨을 곳 쉴 곳 등으로 연결되어 사용되는 숨과 쉼은 아직도 우리 곁에서 살아 있다. 숨다 쉬다 등으로 남은 말이다. 숨다 ‘숨ː따’ ‘동사’ 보이지 않게 몸을 감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다. 또는 잠재되어 있다. 유의어: 숨기다, 파묻히다, 피난하다 쉬다 ‘쉬ː다’ ‘동사’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 잠을 자다. 잠시 머무르다. 유의어: 놓다, 멈추다, 안식하다. 바위틈에 숨고 쉬는 장소를 만들도록 사반에게 주신 지적능력이다.
‘they their houses’ 히브리구음으로 bayith {bah-yith}바이스 바흐-이이스이다. house, dwelling habitation이다. 우리말에 과연 그대로 남았는가? 변형되어 어딘가에서 그 음을 면면히 이어오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바이이스흐를 음 그대로 읽으면 바이이트흐가 된다. 바위틈이다. 우리민족이 고산준령으로만 이동하는 궤적이니 산중 나무로 집을 짓는 것보다 巖穴(암혈)에서 지난 세월이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처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바이이트흐 곧 바이이스가 집이라는 의미로 의식화 되었을 것이다. 바위틈이 그 구음이다.
‘in the rocks;’ 히브리구음으로 cela` {seh-lah}세라 세흐-라흐이다. crag, cliff, rock 이다. 세다 ‘세ː다’ ‘형용사’ 힘이 많다. 행동하거나 밀고 나가는 기세 따위가 강하다. 물, 불, 바람 따위의 기세가 크거나 빠르다. 유의어:거세다, 굳세다, 딱딱하다.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어원이 암석 암반 절벽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일까? 우리말 세다가 cela` {seh-lah} 세라에서 나온 것이라면 의미가 동일하다. 오소리에게 바위틈이라는 집을 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견고성과 강함 세기를 강조함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세다 힘 세라 가 나온 것일까?
이사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 이로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바위 중에 바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유하시는 만세반석이시다. 그 틈으로 들어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못을 받으시고 창을 받으셨다. 그리로 우리 대한민국이 들어가 거주하면 현재의 빨갱이들에게 당하는 망국병에서 벗어나서 기사회생하고 도리어 자유통일하고 간도 땅도 회복하고 천하 제일국으로 번성하게 된다.
<구국기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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