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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공)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Korea, Republic of 돌통 0 462 2019-02-06 01:18:57

                             북한과 (중공)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북한과 중국(중공) 의 건국 관계..

         ???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도와 맹활약한 이들이 북한군 중추가 됐다. 국·공내전 때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에 투입됐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하다. 베이징에 입성한 중국공산당 군대.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의 부일(附日) 왕족·귀족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무혈 병탄(倂呑)했다. 이로써 일본 영토는 조선반도, 류큐열도, 타이완, 남사할린, 남쿠릴열도, 관동주(다롄), 태평양 도서로 확장됐다. 일본의 조선 병탄을 전후해 조선인 일부가 만주와 연해주, 중국 본토 등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했다. 안동의 이상룡 가문과 이육사(이원록) 가문,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가문, 의열단의 김원봉과 김상옥, 이태준,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최재형, 김구, 윤봉길, 이승만, 신채호, 김무정(김병희), 김두봉 등이 대표적이다. 최용건, 김책(김홍계), 강건(강신태), 김일성(김성주), 김일(박덕산) 등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있던 동북항일연군 세력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김좌진, 홍범도, 최진동 등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는 체코군단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갖고 1920년 북간도 허룽(和龍) 일대에서 벌어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혁명 계속하라” 유언 남긴 (쑨원 황포군관학교). 일본의 만주 진출이 계속되면서 더 많은 수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으로 가보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해 중국 본토가 축록전(逐鹿戰·제위, 정권을 얻기 위한 다툼) 상황으로 바뀐 1917년, 쑨원(孫文·1866~1925)은 망명지 도쿄에서 돌아와 광저우를 수도로 하는 광둥군정부(廣東軍政府)를 세웠다.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宮岐滔天)과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형제 등이 쑨원을 지원했다. 쑨원이 주도한 광저우 정부와 돤치루이(段瑞) 등이 주도한 베이징 정부 간 대립이 격화했다. 쑨원은 광저우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좡족(壯族) 군벌 루롱팅(陸榮廷)의 공작으로 상하이로 쫓겨났다. 1917년 11월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중국의 견해는 무시됐다. 이에 분노한 학생, 노동자, 상인 등이 5월 4일을 기점으로 중국 대도시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의 역할에 주목한 리다자오(李大釗)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등 13명의 지식인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CCP)을 창당했다. 그해 5월 쑨원은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 정부 총통에 취임했다. 루룽팅이 베이징 정부와 모의해 광둥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쑨원은 루롱팅의 쿠데타를 저지했다. 쑨원은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참모본부를 북상시키는 등 북벌을 시도했으나 광저우에 남아 보급을 담당하던 천중밍(陳炯明)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쑨원은 간발의 차이로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도쿄로 망명했다. 러시아 혁명이 궤도를 찾아가자 쑨원은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쑨원은 레닌이 파견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마링을 만나 혁명 수행 방법을 문의했다. 마링에 설득된 쑨원은 공산당원의 국민당 개별 입당을 허용하는 등 국민당을 좌경화했다. 세포조직이 만들어지고, 국민당은 전투조직이 됐다. 리다자오와 마오쩌둥 등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 간부로 선출됐다.  쑨원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소련에 파견해 군대 조직과 훈련 방식을 배우게 하고, 샌프란시스코 화교 출신 랴오중카이(廖仲愷)로 하여금 광저우 교외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게 했다. 프랑스에서 막 귀국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황포군관학교 주임대리에 취임했으며, 예젠잉(葉劍英)과 조선인 최용건 등이 교관으로 부임했다. 의병장 허위의 종질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하게 되는 허형식과 김원봉이 입교했다. 두위밍(杜聿明)과 린퍄오(林彪)는 가장 우수한 생도였다.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을 통한 북벌을 추진했다. 국민당의 좌경화를 위협으로 느낀 기업가들이 별도 무장집단을 만들려 했으나 쑨원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쑨원은 베이징 군벌과 담판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은 1925년 3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쑨원은 부인 쑹칭링에게 “혁명을 계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좌·우 갈등 속에서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국민당 핵심으로 부상했다.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에 북벌을 명령했다. 국민혁명군은 예상외로 단 9개월 만에 창장 이남 9개 성(省)을 석권했다. 북벌 과정에서 공산당이 지도하고, 노동자·농민이 참가한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이들은 토호(土豪) 타도와 토지 분배를 요구했다. 공산당 세력이 창장 중류 한커우(漢口) 조계 강제 회수를 시도하자 열강의 국민당에 대한 압력이 강화됐다. 군벌 농민 착취가 공산당 세력 배양 장제스는 1927년 4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대거 숙청했다. 이로써 1차 국공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국민당에서 축출당한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허룽(賀龍) 등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1927년 8월 장시성 난창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27년 12월 예젠잉과 최용건, 김산(장지락), 김성숙 등이 주도한 광저우 봉기도 실패로 끝났다. 장제스는 1928년 제2차 북벌을 감행했다. 군벌 군대는 민족주의로 의식화된 국민혁명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혁명군에 항복했다. 만주에도 국민당의 청천백일기가 나부꼈다. 1928년 정식 발족한 국민정부는 입법·사법·행정·고시·감찰 등 오원제(五院制) 정부를 구성하고,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 중심의 독재가 더욱 강화됐다. 국민정부는 1931년 5월 약법(約法)을 공포해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국민당을 제외한 여타 모든 정당의 정치 행위를 금지했다. 부패한 군벌이 정권에 합류하고, 군벌 추종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혁명성을 상실했으며, 부정부패가 일상화했다.  장제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백색 테러조직 남의사(藍衣社)에 의한 반대파 암살과 납치, 고문도 자행됐다. 군벌 주축의 지방정부가 토지세를 거두고, 국민당 주도 중앙정부는 상공업세와 관세를 거두는 이중구조가 됐다. 군벌의 농민 착취는 공산당 세력을 배양하는 온상(溫床)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경제 분야에서는 다소 성과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됐다. 하지만 10년간 계속된 공업화 노력에도 농업 분야가 국내총생산(GDP)의 65%나 차지했으며 제조업 비중은 2.2%에 머물렀다. 일본, 소련 등의 외침(外侵)과 공산당 봉기에도 대비해야 했기에 예산은 대부분 국방비로 지출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세계경제공황(1929년)으로 농촌경제는 붕괴 일보 직전으로 내몰렸다. ‘꼭두각시’ 만주국 세운 日 장쉐량. 만주군벌 영수이자 한족 민족주의자 장쉐량은 만주의 이권을 독점하던 일본에 대항해 새로운 만주철도 부설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일본은 1931년 9월 선양 인근 철도를 폭파시킨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은 손쉽게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傀儡) 만주국을 세웠다. 중국공산당은 장시성 루이진(瑞金)과 장시-후난성 경계에 위치한 징강산(井岡山) 등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했다. 공산당은 만주사변으로 중국혁명군(국부군)의 공격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점령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1930년경 공산군(홍군)은 15개 소비에트, 6만 병력으로 성장했다. 국부군은 여러 차례 홍군을 공격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1931년 11월 마오쩌둥을 수령으로 하는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가 루이진에 수립되고, 보구(본명 친방셴(秦邦憲))의 공산당 임시중앙도 상하이로부터 옮겨왔다. 김무정과 김산 등 조선인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위기를 느낀 국부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했다. 국부군은 1933년부터 독일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포위 압박 전술인 토치카 전술을 구사하면서 루이진 소비에트를 포위해 들어갔다. 장기간에 걸친 국부군의 압박으로 루이진 지역은 생필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받게 됐다. 공산당 지도부는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새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국부군은 1934년 10월 텅 빈 루이진을 점령했다. 포위망이 약한 지역을 돌파한 8만6000명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부군과 적대적 군벌들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서북쪽으로 행군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덩샤오핑, 린퍄오, 펑더화이(彭德懷) 등이 이끄는 홍군은 구이저우성 쭌이(遵義)를 경유해 양자강 대도하(大渡河)를 건너 1935년 10월 목적지인 옌안에 도착했다. 홍군이 행군한 거리는 9600㎞나 됐으며, 옌안에 도착한 인원은 출발할 때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7000여 명에 불과했다. 마오쩌둥은 쭌이회의에서 소련파 왕밍(천샤오위)과 보구 등을 제압하고 중국공산당 지도권을 확립했다.  중농 출신 마오쩌둥은 독서인이었다. 마오쩌둥이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다는 점에서 곧잘 조조(曹操)에 비견된다. 마오쩌둥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오쩌둥이 1925년 32세에 지은 사(詞) ‘심원춘, 장사(長沙)에서’ 일부를 소개한다. 獨立寒秋 (스산한 가을)  湘江北去 (상강이 북으로 흐르는) 橘子洲頭 (귤자주 어귀에 홀로 섰노라)  看萬山紅遍 (바라보니 온 산을 덮은 단풍) 層林盡染 (우거진 숲까지 물들였구나) 漫江碧透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물엔) 百爭流 (오가는 배에 부딪힌 강물만 출렁이네) 鷹擊長空 (솔개가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뒤엔) 魚翔淺底 (물고기 떼 한가롭게 노니나니) 萬類霜天競自由 (만물이 이토록 다 자유로운가) 廖廓 (이내 가슴에 슬픔만 차오르네) 1936년 말 국부군은 20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옌안의 홍군을 공격했다. 장제스가 추진한 ‘배일(排日)과 반공(反共) 동시 수행 정책’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산시(陝西)성 실력자로 한족 민족주의자인 양후청(楊虎城)은 홍군 토벌에 소극적이었다. 만주를 일본군에 빼앗기고, 부사령관으로 부임해온 장쉐량도 항일 우선을 주장하는 홍군에 동정적이었다. 장제스, 감금되다 시안사건 속 국민당원. 앞줄 가운데가 장제스. 양후청과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독전(督戰)을 위해 시안(西安)을 순시한 장제스를 체포·구금하고, 항일과 내전을 종식할 것을 강권했다. 홍군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까지 협상에 참여한 결과 양후청과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장제스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로써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홍군 3만은 국민혁명군 8로군(八路軍)으로, 중·남부 유격대는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됐다. 일본은 1937년 7월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어난 국부군과의 충돌을 핑계로 중국 본토를 공격했다. 일본은 전쟁 초기에는 파죽지세를 과시했으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대도시와 주요 도로만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힘의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지원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중국에서 열세를 보였다. 일본이라는 외적(外敵)과 싸우면서도 만주족이 잃어버린 ‘중원의 사슴’을 차지하기 위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간 경쟁은 계속됐다. 홍군은 일본군에 밀린 국부군이 후퇴한 농촌지역에 침투해 권력 공백을 메워나갔다. 1936년 초반 1만 명 수준이던 홍군은 1945년에는 근 100만 명을 헤아리게 됐으며, 당원 역시 4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배지역은 100만㎢, 인구는 1억 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패배할 조짐이 보이자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 재발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국민당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했다. 이 회담 결과 1945년 10월 10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충칭 시대의 국민당 정부는 관료 부패 이외에도 장(蔣), 안(安), 쿵(孔), 천(陳) 4대 가문으로 이뤄진 정권 핵심 세력의 전시치부(戰時致富)로 악명을 떨쳤다. 화폐 남발이 가져온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 불만이 높아갔다.  국부군은 미국의 원조와 소련의 중립적 태도에 힘입어 홍군에 대해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10월 10일 협정’을 파기했다. 1946년 6월 26일 장제스가 홍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국부군과 홍군은 내전에 돌입했다. 홍군은 각개격파 작전을 해나갔으며, 점령지역 내 토지개혁을 실시해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대했다. 또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해 국부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전술을 추진했다. 부패한 국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1947년 말부터 국민당, 공산당 간 세력관계가 역전됐다. 한강 이북 통제하려 한 장제스 당시 가장 공업화된 만주는 국·공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곳이었다. 만주에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건설한 상당한 규모의 공업시설이 있었다. 만주의 전력, 제철, 시멘트 생산량은 본토 전체를 합한 것의 몇 배에 달했다(1943년 기준 중국 전체 석탄생산량의 49.5%, 제철 87.5%, 시멘트 66%, 전력 72%, 철도 50%). 1930~40년대 만주(다롄-선양-창춘-하얼빈-치치하얼 지역)는 세계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만주에서의 승패가 국·공 내전의 승부를 가를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 6월 11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우리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승리의 토대를 확보하는 셈이고, 승리는 결정된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장제스 역시 “만주가 없으면 중국도 없다” “우리가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중국이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 2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고위간부 2만여 명과 최정예 20만여 병력을 투입했다. 장제스 역시 ‘동북행영 정치위원회’와 ‘동북보안사령부’를 설치해 슝스후이를 주임, 두위밍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베이징 북부 청더(承德)를 통해 최정예 기계화사단 포함 13만7000명을 투입했다. 미군도 톈진항, 다롄항 등을 통한 국부군의 만주 투입을 적극 지원했다.  이보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전후해 장제스는 한강 이북을 국부군 통제 아래 두려 했다. 그만큼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 처지에서 순치(脣齒)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만주 쟁탈전은 중국 내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 미·소는 물론 남·북한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 만주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남북의 운명이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총력 다해 中공산당 지원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왼쪽)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국부군이 만주를 차지하면 북한은 남북 양쪽에서 포위당하고, 공산군이 승리하면 한국의 안보 부담이 가중된다. 특히 북한은 만주에서의 승패가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전쟁 진전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코민테른 계열 동북항일연군과 강한 연계를 가진 김일성은 “조선혁명의 입장에서 만주가 장제스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승만은 “중국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 정권 기관지 ‘민주주의’는 “미국이 해로(海路)와 공로(空路)를 통해 수십만 명의 국부군을 만주로 수송해 중국의 내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혼란 상태이던 한국이 장제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공고히 한 북한은 공산군을 적극 지원했다. 

(마오쩌둥 옆 김일성. 1954년 10월 1일 중국 톈안먼 광장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5주년 기념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오른쪽)과 김일성 북한 주석. [징화시보])

  만주에는 1936년 조직된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해 10만 명 넘는 사회주의 계열 무장 세력이 있었다. 만주 조선인들은 대거 공산군(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만주 조선인들이 공산군을 지지한 주요 이유는 공산군이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다가 민족 차별을 하지 않아서다. 훗날 지린성 당서기까지 승진하는 청주 출신 자오난치(趙南起·조남기·1926~2018)도 이때 공산군에 가담했다. 강건, 김무정, 박일우, 김광협, 김웅, 최광, 이권무, 방호산(이천부), 전우 등이 조선의용군을 지휘했다. 만주지역 전투 과정에서 공산군에 입대하는 조선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만주에 잔류한 140만 조선인의 5%인 6만2942명이 입대했다. 1948년 랴오선(遼瀋)전투 후 방호산의 제1지대는 공산군 제166사단으로 재편됐다. 국·공내전 초반 국부군과 북한경비대 간 충돌도 발생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46~1947년 5월간 국부군은 16차례 불법 월경을 했으며, 17차례 북한 쪽에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中共·중공)은 전쟁 초기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을 후방기지로 활용했다. 1946년 봄 동북민주연군(공산군의 일부) 부총사령관이자 백족(白族) 출신 저우바오중은 김일성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중공은 1946년 7월 평양에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사무소)를 설치해 전략물자 공급, 남만주-북만주 간 교통·통신선 확보, 각종 물자 구입 업무를 수행했다. 중공은 남포와 신의주, 만포, 나진에 4개 분소도 설치했다.  1946년 가을 국부군은 만주 토벌전에 나섰다. 린퍄오의 제4야전군은 전쟁 초기 연전연패했다.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은 신생 북한 정권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중국 내전 결과에 정권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본 김일성은 총력을 기울여 공산군을 지원했다. 1946년 국부군이 선양과 창춘 등을 점령하고 주요 철도와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공산군은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된 채 고립됐다. 국부군에 속했다가 공산군에 투항한 1만8000여 명 약 2개 사단 병력이 부상자와 함께 전쟁 물자 2만여t을 갖고 단둥과 지안에서 북한 내부를 거쳐 북만주로 이동했다. 공산군은 물자는 물론 병력 이동도 불가능하게 돼 국부군에 의해 각개격파 위기에 처했는데, 북한을 교통로로 활용함으로써 패전 위기를 극복했다. 민족의 비극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 만주의 조선인들은 대도시로 도망해 생명을 부지했으며 북한은 일제가 남겨둔 기차 2000대분 군수물자를 공산군에 제공했다. 1947년 북한-중공 간 ‘중국동북물자북조선통과협정’이 체결돼 1947년 10월부터 1년간 나진항 등을 통해 총 1435만t의 물자를 공산군에 수송했다. 북한은 국부군에 의해 고립된 만주 내 해방구에 식량, 석탄, 의약품, 소금 등을 1948년 1년간 30만t 이상 지원했다. 여기에는 화약 420t, 초산 200t, 고무신 15만 켤레가 포함돼 있다. 산둥성 등 여타 지역에도 원조 물자를 제공했다. 공산군의 북한 내 통로는 2개로, 육로는 ①단둥→신의주→투먼으로 연결되는 선과 ②지안→만포→투먼을 연결하는 선이었으며, 해로는 ①다롄→남포 ②다롄→나진이었다. 중공은 1948년 말 랴오선 전투 승리 후 북한의 지원이 더는 필요 없게 되자 설치 2년 7개월 만인 1949년 2월 동북국사무소와 분소를 폐쇄했다.  이렇듯 만주의 조선인들은 공산군의 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공산군은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 소수민족의 땅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다.  조선인들은 주로 제4야전군에 소속돼 랴오선 전투에서부터 쉬저우 전투, 창장 도하, 하이난다오 공략까지 투입됐다. 하이난다오 공략 전투는 조선인 장교의 아이디어(트럭 엔진 장착 보트로 초신속 접근)를 활용해 쉽게 승리로 끝났다. 동북항일연군 및 소련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김일성의 북한 정권 장악은 외세의 영향 아래 성장한 지도자가 한반도 정권의 권력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몽골 지방군벌 이성계의 조선조 개창과 비슷한 점이 있다. 국·공내전 말기 김책이 마오쩌둥에게 공산군(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 조선인 대원의 북한 귀국을 요청한 결과, 이들은 1949년 말부터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의 중핵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군 4, 5, 6, 7사단 등에 편입됐다. 마오쩌둥으로서는 인민해방군 내에 대규모 조선인 무장 세력을 안고 갈 이유가 없었다. 김일성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3개 사단(북한 육군의 47% 차지)과 남일, 알렉세이 허(허가이), 박창옥 등의 기여로 고려인 1개 연대를 확보하고 난 다음 남침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4사단 18연대가 제일 먼저 서울에 입성하는 등 조선인 부대가 남침 선봉에 섰다. 북한군 중 최초로 한강을 건너 김포와 영등포를 거쳐 경기 서부와 충남, 호남, 경남 지역을 석권한 북한군 6사단 주력도 국·공내전 시 명성을 얻은 사단장 방호산 휘하 조선인으로 구성돼 있었다. 중국에 잔류한 조선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인민지원군) 38, 39, 40, 42군에 집중 배치돼 한반도에 투입됐다. 북간도(옌볜)는 6·25전쟁을 전후해 북한의 충실한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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